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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하지만 그도 정말 다를까? (62/88)


#62. 하지만 그도 정말 다를까?
2023.06.03.


그녀와 마주칠 일이 한 번쯤은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라울의 곁에 있는 에르제의 모습이었지 이런 장면을 떠올렸던 것은 아니었다.

벨리아는 칼리드의 곁에 에르제가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이번에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벨리아. 정신 차려.’

지금은 이렇게 수렁에 빠져들 때가 아니다.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고, 시간이 부족했다.

벨리아는 눈을 꾹 감고 내면의 어두운 감정을 모두 정리한 뒤 눈을 떴다.

그러곤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평소와 다름없이 말을 건넸다.


“칼리드. 손님과 대화 중이었나 보군요?”

“아. 벨리아. 안 그래도 그대를 찾아가려던 참이었어.”

“그런가요? 저도 지금 당신과 할 얘기가 있었는데.”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을 마치자 칼리드도 마주 웃어주며 곁에 있는 에르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키네트라 남작 영애야.”

“반가워요.”

“에르제 키네트라입니다. 이번 꽃 납품을 저희 가문에서 담당하게 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꽃 납품을 했다던 곳이 키네트라 남작가였나?

그때 살펴보았던 서류에서는 분명 담당자의 이름이 달랐던 것 같은데.

벨리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에르제가 화들짝 놀라며 해명했다.


“아! 납품 담당자는 원래 샤핀 남작님이었는데 몸이 안 좋아지셔서 저희가 대신 오게 되었어요. 꽃 재배는 저희 키네트라 남작가와 샤핀 남작가를 비롯해 3개의 가문이 함께하고 있거든요.”

만약 문서에서 키네트라 남작가의 이름을 발견했다면 곧바로 에르제를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여러 가문이 함께 공동으로 하는 사업이었고, 판매하지 못하고 남은 꽃을 바자회에 납품하는 것뿐이었기에 사업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는 굳이 파악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에르제를 만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가 어떤 삶을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황후궁에 갇혀 있던 벨리아가 자세히 알 수도 없었으니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제 감정을 티 내지 않으며 사람 좋은 얼굴로 에르제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런가요? 좋은 꽃을 납품해주어 고마워요. 덕분에 바자회가 한층 아름다워졌어요.”

“아뇨! 아뇨……. 이번에 꽃이 많이 남아서 다들 걱정이었는데 공주님 덕분에 다들 한시름 놓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벨리아의 감사 인사에 에르제가 볼을 붉히며 손을 휘저으며 마주 인사를 해왔다.

지금의 에르제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느끼는 이 분노와 공포가 사라지는가?


‘그럴 리가.’

벨리아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더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던 벨리아는 상냥하지만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말을 돌렸다.


“소중히 재배한 꽃을 이렇게 좋은 일에 쓰게 해주어 고맙다고 나중에 따로 각 가문에 편지를 보내도록 할게요. 그보다 저희가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이것 때문이지?”

그때 자신의 말을 끊고 끼어든 칼리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시원하게 웃으며 시종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가리켰다.

그건 분명히 카프리에 후작이 후원한 마도구였다.

벨리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어떻게?”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돌아갈 채비를 하다가 자신들의 물건이 아닌 게 끼어 있었다고 돌려주러 왔다더군.”

벨리아가 놀란 얼굴로 에르제를 바라보자, 에르제는 배시시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저희 물건이 아니니 돌려드리러 오는 건 당연하죠.”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큰일을 면했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 폐가 되었을까 걱정했는걸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에르제의 표정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화사하고 순수하고,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사람임이 여실히 느껴지는 밝은 기운.

그녀는 차분하고 조용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벨리아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시종에게 물건을 서둘러 경매장으로 옮기라 지시하곤 몸을 돌렸다.


“……곧 경매가 끝나요. 미안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나요? 감사 인사는 제대로 하고 싶군요.”

“물론이죠!”

“그럼 먼저 가볼게요.”

수잔과 레이첼에게도 마도구를 발견했다고 전해야 했다. 하지만 칼리드와 에르제를 함께 있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 벨리아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에르제를 홀로 두고 가는 걸 신경 쓰는 줄 알았는지 칼리드가 걱정 말라며 다독였다.


“그대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해. 키네트라 영애는 내가 신경 쓸 테니까.”

그는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나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벨리아는 그게 더욱 기분이 나빴다.

평소에는 다른 이들에게 그토록이나 무심했으면서.

왜 에르제에게는 다른 태도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끔찍해.’

그는 괜찮을 거라고, 그는 믿을 수 있을 거라고 되뇌었던 게 며칠이나 지났다고.

고작 에르제를 마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의심하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벨리아는 잠시 말을 고른 후, 그에게 고맙다고 겨우 인사한 후 자리를 피해버렸다.


“벨리아. 잘 봐. 저 여자가 내 황후가 될 거야.”

그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가 아니라 에르제야. 그러니 이 손 치워.”

그만해.


“이만 죽어줬으면 해, 벨리아.”

그만!


 
벨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라울이 속삭였던 수많은 말들은 저주처럼 자신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것은 마치 망령과도 같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벨리아가 가슴을 부여잡고 여러 번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벨리아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곪아버린 어두운 내면을 숨기고 상처 입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더욱 단단한 갑옷을 둘러야만 했으니까.

* * *

예술가들의 작품 경매가 끝나고, 모두가 내심 기다리던 귀족들이 내놓은 물건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보석부터 귀한 가구들과 예술품까지 등장했다.

에르제가 카프리에 후작의 후원품을 무사히 찾아준 덕분에 진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행이야.’

처음 준비한 큰 행사라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마도구가 사라지는 큰 문제가 생긴다면 그동안 쌓아온 게 부질없어질 뻔했지 않은가.

에르제가 마음에 들지 않고 꺼려지는 것은 둘째 치고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난감할 뻔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큰일을 해 주었어요.”

차분히 진행되는 경매장을 바라보며 수잔과 레이첼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윽고 카프리에 후작이 내어놓은 마도구가 등장했다.

지금껏 나왔던 그 어떤 물건들보다 가장 치열하게 경쟁이 붙었다.


‘솔직히 이런 물건을 내놓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엄청난 힘이 있는 마도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선 그 무엇보다도 무척 유용하게 쓰일 마도구였다.

카프리에 후작이 내놓은 이 작은 상자는 내부에 무언가를 넣고 수식을 발동하면 본인이 아니고선 절대로 열지 못하게 만드는 ‘잠금’의 능력이 있는 마도구였다. 물론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


‘칼리드에게 필요한 순간이 있지 않을까?’

일회성에 그치는 능력이어도 어쩐지 조금 탐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며 벨리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움직여 칼리드를 찾았다.

그를 찾아 움직이는 시선 끝에서 에르제의 곁에 서 있는 칼리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둘은 그저 경매를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에르제와 칼리드가 함께 있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벨리아에겐 상처가 되었다.

벨리아는 황급히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버렸다.


‘칼리드는 괜찮아. 그는 라울이 아니야…….’

하지만.

그도 정말 다를까?

자꾸만 아득해지는 심정이었다.

* * *

뒷정리까지 함께한 레이첼이 벨리아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전부 마무리되었어요.”

“늦은 시간까지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재미있었어요!”

레이첼이 양팔을 씩씩하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레이첼.”

벨리아가 그런 레이첼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대화를 나누던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벨리아 공주님.”

카프리에 후작이었다.


“오늘 행사, 정말 즐거웠습니다.”

“과찬의 말씀이군요. 제가 후작 영애를 너무 괴롭힌 것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딸아이가 원해서 도운 일이잖습니까.”

후작의 태도는 정중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까 조마조마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딸이 신세를 많이 질 것 같으니, 제 쪽에서 공주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리 무례를 무릅쓰고 얘기를 꺼냈습니다.”

“어머, 오히려 제가 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걸요.”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카프리에 후작은 남부의 비옥한 영지를 가지고 있고 소유한 보석 광산도 몇 개나 된다고 들었다. 게다가 중앙 정치에서도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다.

그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분명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이전 삶에서 카프리에 후작은 라울이 황위에 오를 때 그 어떤 의견 표명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라울을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중립의 표본.


“후작과는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의미심장한 벨리아의 말에 카프리에 후작은 예의상의 대답만을 건네곤 레이첼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직은 아닌가.’

카프리에 후작을 회유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벨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키네트라 남작 영애.”

“공주님!”

칼리드의 곁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에르제를 향해 다가가 벨리아가 다정하게 물었다.


“시간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어요.”

“아니에요! 저는 정말 괜찮은데…….”

에르제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흘깃, 벨리아의 얼굴을 바라보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꼭 보답을 하고 싶군요.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얘기해 봐요.”

벨리아는 어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더는 에르제의 얼굴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어차피 자신과는 접점이 없는 사람이니 확실하게 보답을 해주고 나면 이후엔 그저 해프닝이었던 것처럼 오늘의 일을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는 정말 괜찮은데…….”

망설이는 에르제에게 벨리아가 웃으면서 무엇이든 이야기해 보라며 권유하자 에르제는 꼬물꼬물 움직이던 손가락을 꽉 붙잡고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그렇다면……. 궁의 주인이 허락한다면 황궁에서 머무는 게 허락된다고 들었어요…….”

흐릿하게 뭉개진 발음 사이로도 그녀가 무슨 말을 전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들렸다.


“……네?”

벨리아는 예상치도 못한 말에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나 에르제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려 벨리아와 눈을 마주치곤 보다 또박또박하고 명확하게 제가 원하는 바를 꺼내었다.


“혹시 저도 황궁에서 며칠 지내볼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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