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사라진 물건 (61/88)


#61. 사라진 물건
2023.05.30.



 
카프리에 후작이 말없이 그저 미소 지은 채 가만히 사람들을 살폈다.

예술가들과 귀족들 모두가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곧 열릴 경매에 앞서 다들 파티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벨리아 공주님은 제 생각보다 총명하신 분이더군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칼리드의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벨리아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니 어째 본인이 더 으쓱이는 기분이었다.


“전하께서 표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도 신기하고. 최근에 재미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빈정대는 거라면 그만둬, 후작.”

칼리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 둘은 아주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관계를 이어온 협력자였다.

표면적으로 후작이 나서진 않았지만, 칼리드의 일을 몰래 도운 적도 많았고 칼리드가 뒤에서 카프리에 후작의 일을 도운 적도 적지 않았다.


“레이첼이 공주님이 좋다고 이야기할 때, 솔직히 놀랐습니다.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아이가 아닌데…….”

칼리드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건 알 바 아니고. 바자회도 끝났으니 이제 황궁에 놀러 오지 못하게 단속 좀 해 봐.”

징글징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카프리에 후작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어쨌든. 그 아이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 벨리아 공주님이 무척 선한 사람이라는 거겠죠.”

후작은 손에 들고 있는 샴페인을 칼리드를 향해 들어 올렸다.


“좋은 분을 만나셨군요.”

그의 말에 칼리드가 웃어버리곤 자신의 잔을 그의 잔에 부딪혔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하하. 그건 그렇지요.”

칼리드는 후작의 곁에 서서 난간에 팔을 기대었다.

그러곤 벨리아가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찾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벨리아가 누군가와 대화하며 웃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드의 눈이 휘었다.


“오늘은 적당히 소문만 퍼지면 돼. 의심의 씨앗만 던져두는 거지.”

어차피 정말로 카프리에 후작이 2황자의 손을 잡았을 거라고 믿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 라는 의심만 심어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어. 벨리아의 곁에 별 이상한 놈들이 얼쩡거리는군.”

칼리드가 벨리아와 대화하며 헤벌쭉 표정이 풀린 한 청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얼씨구?

벨리아에게 반해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이었다.

저걸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예비 남편이 곁에 있는데.

칼리드가 후작의 손에 먹다 남은 샴페인 잔을 쥐여 주고는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벨리아에게 다가갈수록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피부로 와닿는다.

직접 대화하는 청년뿐 아니라 주변의 남자들은 죄다 벨리아를 보며 입을 벌린 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쯧. 인기 많은 사람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군.’

속으로 혼자 농담을 던져보며 칼리드가 걸음을 옮겼다.


“벨리아.”

칼리드가 나지막이 벨리아를 불렀다.


“응? 아, 칼리드. 언제 왔어요?”

칼리드는 시선을 청년에게서 떼지 않으며 벨리아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러곤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저기서 그대를 보고 있었지.”

마치 이 여자는 내 여자라고 선언하듯, 그의 태도엔 거침이 없었다.


“얘기는 끝났나? 그렇다면 나에게도 시간을 조금 내주지 않겠어?”

벨리아는 사람들 앞에서 칼리드가 대놓고 애정을 표현하자 조금 민망해졌다.


“왔으면 미리 얘기하지……. 잠시만요.”

벨리아가 대화를 나누던 이들에게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칼리드에게 팔짱을 끼곤 자리를 옮겼다.


“뭐 하고 있었어요?”

“카프리에 후작이 있길래 잠시 얘기 좀 하느라. 그대는 무척 즐거워 보이더군?”

“아하하. 뭐예요. 질투하듯이 말하지 말아요.”

벨리아가 꺄르르 웃자 칼리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질투하는 거 맞는데?”

“됐어요. 그래서 카프리에 후작이랑은 무슨 얘기 했어요?”

칼리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벨리아가 물었다.


“흐음. 그대는 정말이지…….”

“농담하려고 저 부른 거예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녀석들을 치우고 싶기도 했고. 내가 왔는지 안 왔는지 안중에도 없는 것도 좀 그렇고…….

칼리드는 어떻게 설명할지 말을 곱씹다가 그냥 씨익 웃어버렸다.

무슨 말을 꺼내도 자신이 너무 속이 좁아 보인다.


“으응? 정말 뭐예요오.”

벨리아가 눈을 뾰족하게 세워 노려보자 칼리드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 알았어.”

“카프리에 후작과 무슨 이야기 했는데요? 중요한 이야기 했어요? 저 이제 경매 시작할 거라 가 봐야 한단 말이에요. 빨리 얘기해요.”

벨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그를 재촉하자 칼리드가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사실은 그냥 입 맞추고 싶어서 불렀어.”

“뭐라고요?”

“하하하. 더 진하게 해도 돼?”

“안 돼요!”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리며 또 한 번 촉, 소리를 내며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칼리드으……!”

“알겠어! 이제 정말 볼일 끝! 가 봐도 돼.”

벨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끌고 와서는 정말 이게 전부라고?


“따로 할 얘기가 있으면 이따 끝나고 해요. 알겠죠?”

벨리아가 총총총 경매품을 준비하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

벨리아는 문득 생각을 멈췄다.

어쩐지 레이첼이나 수잔이 잔소리를 할 것 같았다.


“으음. 이걸 어쩐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데.

결국 벨리아는 슥슥, 주변을 둘러보곤 잽싼 몸놀림으로 경매가 이루어질 작품을 보관한 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공주님!”

“히익!”

그리고 그런 벨리아를 발견한 수잔이 쾅쾅, 달려왔다.


“제가 그만 쉬시라고! 말씀! 드렸죠!”

“그, 그게에…….”

결국 벨리아는 수잔의 손에 이끌려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경매 진행하는 걸 구경하고 계세요. 하도 걱정하시니까 아까도 저랑 레이첼이 두 번이나 확인하고 왔어요.”

“……알겠어요.”

그리고 잠시 후.

행사장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오늘의 행사가 열린 목적, 바자회를 위한 경매가 시작되었다.

* * *

그간 힘들게 선별한 보람이 있었는지 예술가들의 작품이 하나씩 선보여질 때마다 귀족들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간혹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한 귀부인들이 자신도 이 작품의 작가를 후원하고 싶다고 따로 말을 전해오기도 했다.

한쪽 테이블에서 자신들의 작품들이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판매되는 것을 지켜보던 예술가들은 감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분위기가 아주 좋아.’

벨리아는 차분한 눈으로 모두를 살폈다. 계속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경매는 무척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곁에서 수잔이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씨익, 웃는다.


“와. 방금 저 그림 엄청난 가격에 판매됐어요!”

미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수잔과 레이첼도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평온했다.

그의 작품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안으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대표 화가가 된다.

후원하는 예술가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었지.’

벨리아의 후원으로 등장한 화가의 그림이 제국을 휩쓴다면.


‘당연히 내 안목을 칭찬하게 될 테니까.’

이전 삶에서도 그의 그림을 보자마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이번에도 다를 것 없었다. 여전히 그의 그림은 아름다웠고 경이로웠다.

벨리아가 입술을 당겨 웃음 지었다.


“아가씨.”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 같던 그때, 어딘가 불편한 표정의 사용인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수잔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수잔의 표정도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무슨 일인가요?”

“……공주님. 큰일이 생겼어요.”

떨리는 수잔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벨리아의 등 뒤로 차가운 기운이 지나갔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벨리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나 지금 진행 중인 경매 물품을 모아둔 장소로 향했다.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수잔의 설명이 이어졌다.


“카프리에 후작 각하께서 후원한 물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요.”

하필.

벨리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 다른 건요?”

“다른 물건들은 무사해요. 하지만 딱 그 하나가 사라졌다고…….”

함께 움직이던 레이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전부 확인을 마쳤어요. 그러고 그 물건들을 모두 창고로 옮겼고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창고로 옮긴 이후에는 확인하지 못했죠.”

벨리아가 착찹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쩐지 자꾸 한 번 더 확인하고 싶더라니.

물건을 옮기는 과정에서 누락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작정하고 훔쳐가지 않는 이상 누락되기란 쉽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저기……. 아까 저희가 창고로 물건을 옮기던 중에 근처로 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위치를 잘못 알고 창고까지 온 모양이라 제가 길을 다시 알려주긴 했는데……. 혹시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물건인 줄 알고 가져간 게 아닐까요? 후작 각하께서 후원한 물건은 겉으로 보면 일반적인 작은 상자처럼 보이니까 착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벨리아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우선 아까 물건들을 정리하던 장소를 한 번 더 찾아보도록 하죠. 그리고 꽃을 납품했던 사람을 뒤쫓는 건 칼리드 전하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어요. 그들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 곧바로 따라가면 늦진 않을 거예요.”

카프리에 후작이 후원한 물품은 마도구였다.

마도구가 사라진 것이니 이건 칼리드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정답이겠지.

자칫 늦어버린다면 바자회를 망치는 것과 동시에 마도구를 잃어버린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저는 곧바로 전하께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줄 사람들을 추가 요청할게요. 그럼 레이첼과 수잔은 창고 수색을 부탁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확인하려던 전하를 막지 않았다면…….”

“수잔.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제 걱정에 그랬다는 거 알아요. 그러니 우선 해결에만 집중하도록 하죠. 알겠죠?”

수잔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아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수잔의 어깨를 두드린 후 칼리드를 찾아 움직였다.

경매가 시작하기 전까지 근처에 있었으니 그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근처를 지나던 시종을 붙잡아 칼리드의 행방을 묻자 정원 쪽에서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걸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하지만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벨리아의 걸음은 천천히 느려지다 이내 우뚝 멈춰 섰다.

경악스러웠다. 미처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벨리아는 흐려진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뿌옇게 변하는 시야 속으로 들어온 눈앞의 장면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니까.


‘말도 안 돼…….’

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벽에 몸을 숨기곤 신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입을 재빨리 손으로 가려 소리를 삼켰다. 숨이 턱 막혀서 내쉴 수가 없었다.

칼리드는 정원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작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와 마주한 채 환하게 웃고 있던 그 누군가는 벨리아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지난 생에서 라울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

제게서 황후의 자리를 빼앗아 갔던 사람.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간 사람.

‘에르제 키네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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