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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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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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재조명
2023.05.27.
미리 대관한 장소에 꽃을 잔뜩 실은 마차가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그 꽃들을 꺼내 어떻게 장식할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 빠르게 손을 움직여 꽃을 다듬었다.
그렇게 테이블과 주변 장소들이 조금씩 화사해질 때 즈음.
주최자인 벨리아가 나타났다.
“꽃도 도착했나 보군요. 잘 부탁해요.”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공주님!”
벨리아는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
경매에 나올 작품들을 살피고, 각 가문에서 후원한 물품들도 따로 확인했다.
그 이후엔 파티의 순서를 살폈고, 음악가들이 연주할 자리와 소리의 울림까지 섬세하게 파악했다.
요리사들이 준비 중인 요리 종류와 과정까지도 신경 썼다.
그녀의 꼼꼼함에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식기가 화려하니 꽃을 과하게 꽂지 않도록 해주세요. 포인트 색상은 잘 살려주시고요.”
“네! 맡겨 주세요!”
벨리아가 우렁차게 대답하는 하녀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꽃을 들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밝아졌다.
“벨리아 공주님!”
“공주님!”
그때 멀리서 대여섯 명쯤 되어 보이는 이들이 벨리아를 부르며 달려왔다.
벨리아가 후원하는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오늘의 경매품으로 나올 작품들의 제작자이기도 했다.
“어서 와요.”
벨리아가 방긋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자 한 젊은 남성이 쭈뼛거리며 중얼거렸다.
“저희가 이런 곳에 와도 될는지…….”
귀족들이 잔뜩 모여 있는 행사에 자신들이 끼어도 되는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안 될 건 또 뭐가 있나요?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즐기도록 해요. 그대들의 자리는 불편하지 않도록 저쪽에 마련해두었어요.”
최대한 귀족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한쪽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파티장이 잘 보이면서도 귀족들의 시야에서 가려져 쓸데없는 시비에 걸리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그것을 깨달은 예술가들의 표정이 감동으로 울렁였다.
벨리아 공주는 말은 별거 아니라는 듯 차분했지만, 행동에서 묻어나는 배려가 늘 이렇게 감동을 자아냈다.
“오늘 그대들의 작품이 얼마에 팔리나 기대해 봐요. 재밌을 테니까.”
벨리아가 찡긋, 웃으며 말하곤 또 다른 곳으로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총총 걸어가는 벨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예술가 중 한 명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벨리아 공주님께서 제국에 오신 건 제국민들에게 정말 큰 행운이야.”
자신들과 이렇게 수더분하게 대화를 나누어 줄 공주님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맞아. 2황자 전하께서 벨리아 공주님과 약혼해주셔서 정말 고마울 뿐이야.”
“그 반대 아니야?”
말이 이상하다며 친구가 놀리자, 남자는 큼큼, 목을 다듬고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쨌든 2황자 전하께서 좋은 분임이 분명해. 그러니 저런 분이 좋아하는 게 아니겠어?”
그들은 자연스레 벨리아와 곧 결혼을 앞둔 칼리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을 내놓았다.
“2황자 전하께서도 오늘 오신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면 알겠지.”
“내 말이 확실하다니까? 내기라도 하겠어?”
“하하. 그래. 그럼 나는 자네의 말이 맞는다는 쪽에 걸지.”
“뭐?! 그럼 내기가 안 되잖아.”
티격태격하는 이들의 어깨를 붙잡은 다른 사내가 벨리아가 알려준 자리로 그들을 이끌었다.
“하하하. 이러지 말고 다들 자리로 가지.”
제국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비슷했다. 벨리아의 작은 선행들이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지면서 가히 폭풍처럼 그녀의 인기가 곳곳을 휩쓸었다.
또한, 벨리아의 이미지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칼리드에 대한 인식도 점점 좋아졌다.
칼리드가 금광을 발견했다는 것과 마물 토벌에 나선 라울을 구해내었다는 이야기가 새롭게 재조명되며, 기존 2황자에 대한 소문이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자아냈다.
“공주님! 준비는 거의 마무리 된 것 같으니 조금 쉬셔요. 지금이라도 쉬어두어야지, 파티가 시작되면 전혀 못 쉴 거예요.”
사피오 백작가의 수잔이 벨리아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말했다.
벨리아는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저 작고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솟아나는지.
“마지막으로 경매가 진행될 단상을 확인하고요.”
“거긴 저희가 이미 전부 확인했답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확인했어요.”
수잔은 단호했다.
그녀는 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가시죠.”
“아니, 잠깐……!”
벨리아가 붙잡히지 않은 팔을 뻗었지만, 소용없었다.
수잔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에는 이미 레이첼과 미아가 앉아서 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늦으셨어요!”
“공주님께서 여기저기 번쩍번쩍 움직이셔서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답니다.”
수잔이 지쳤다는 듯 말하자 레이첼이 후후, 웃음을 터뜨린다.
“아까 주방장이 공주님 드리려고 몰래 만든 거라면서 주고 갔어요. 드셔보세요.”
미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넷 중에 가장 어렸지만, 은근 똑 부러진 면이 있어 함께 있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으음. 고마워요.”
벨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정말이지. 무리하지 마시라니까요.”
수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첼. 공주님께 뭐라 한마디 해주세요. 이러다 정말 크게 앓으실까 무서울 지경이라고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곁에서 벨리아가 작은 소리로 항변해보았지만,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레이첼이 벨리아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선언했던 그날 이후.
바자회 준비로 모이는 날이 많아졌고, 나이대가 비슷했던 수잔과 미아까지 넷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정했다.
물론 아직 벨리아를 이름을 부르는 건 어려운지 다들 공주님이라고 부르곤 했지만.
레이첼이 벨리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수잔의 말이 맞아요. 공주님 요즘 너무 무리하고 계시잖아요.”
“아니…….”
“2황자 전하께서 저희랑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노려보시는지…….”
칼리드가?
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주님 힘들게 하지 말라고 무언의 압박을 하시는데, 정말 무섭다고요.”
“에이, 설마…….”
“그러니 공주님께선 이제 쉬도록 하세요. 손님들이 올 때까진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요.”
하지만 그건 좀.
자꾸만 놓친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서 괜히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괜한 기우임을 알지만 제대로 준비되었는지는 몇 번이고 확인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저들도 공주님이 자꾸 확인하러 나오시면 불안해할 거예요.”
레이첼이 짐짓 엄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마지못해 벨리아가 그녀들의 말을 수긍하자 다들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그럼 주방장이 만든 맛있는 디저트를 얼른 입에 넣어보세요!”
미아가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한참을 그렇게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이 시간은 금방 흘렀다.
순식간에 해가 지고 저녁이 되자 화려한 마차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네요.”
수잔이 떨린다는 듯 말을 꺼냈다.
벨리아는 의연한 표정과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에선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그럼, 손님들을 맞이하러 가죠.”
* * *
벨리아는 방문한 귀족 모두를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눴다.
수고로울 법도 했지만, 끝까지 웃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며 세심하게 신경 썼다.
오늘 참여한 사람들은 바자회에 흥미가 있어 방문한 사람보다 그 외의 것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소문이 자자한 벨리아 공주를 직접 만나보러 일부러 참여했다거나, 카프리에 후작도 물품을 내놓았다 하니 그것이 퍽 궁금해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바자회라고 들었는데 마치 연회 같은 느낌이네요.”
“그러게요. 공주님께서 주최한 행사라 그런지 고급스러워요.”
귀부인들의 취향을 꼭 저격한 듯 곳곳에서 칭찬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일반적으로 바자회가 열릴 땐, 관심 있는 자들만 모여 빠르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벨리아가 주최한 이 행사는 무척 우아했고, 여러 즐길 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교양을 부르짖는 귀족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음악들도 신선하고, 만찬도 황실 연회 못지않아요.”
“이번에 카프리에 후작가나 사피오 백작가 등 부유한 가문들이 후원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벨리아 공주님과 그 가문들의 영애들이 친밀하게 지내는 모양이에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 얘기는 들으셨나요?”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소곤소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카프리에 후작가가 2황자 전하를 지지하겠다는 암묵적인 의사 표시라고도 하던데…….”
“에이, 설마요.”
다들 말을 꺼낸 여인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특히나 카프리에 후작 영애가 벨리아 공주와 무척 가깝다고 해요. 카프리에 후작도 그런 딸을 말리지 않고 행사에 후원까지 할 정도이니……. 사실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다고 봐요.”
모두의 관심이 계단을 따라 2층 테라스로 쏠렸다.
그곳에는 이미 도착한 칼리드와 카프리에 후작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1황자 전하께서 이번에 조금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후작의 마음이 돌아섰다고 암암리에 얘기가 나왔어요.”
“어머머. 세상에.”
“물론 카프리에 후작이 직접 지지를 선언했다거나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진 않았지만, 나중 일은 모르죠.”
그녀가 말을 마치자, 모두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떠돌아다녔다.
2황자가 정말로 황위 다툼에 끼어들 것인가.
1황자는 지금 어떤 상황인가.
카프리에 후작가는 정말로 2황자를 지지하는가.
“그럼…….”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프리에 후작가와 테사 공작가, 로니카 왕국이 2황자 전하를 지지하는 건가요?”
그 말에 좌중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었다.
만약 후작가가 2황자를 지지하는 게 사실이라면, 순식간에 2황자의 세력이 커진다.
그것은 1황자 라울이 차기 황제로 유력하다는 가정이 깨지고 황자들의 황위 다툼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잉고트 제국의 적통 황자는 라울이 아닌 칼리드다.
지금, 이 순간, 모두의 마음속에 한 문장이 섬뜩한 진실로 박혔다.
* * *
“……그래서 전하께선 저를 붙잡아서 무엇을 얻으려 하십니까?”
“후작은 눈치가 빨라서 짜증 나.”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후작의 곁에서 칼리드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칼리드가 짓궂은 눈빛으로 후작을 바라봤다.
그러곤 아주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어차피 내가 뭘 얻든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텐데?”
“예전이라면 그랬겠지만……. 안타깝게도 제 딸아이가 전하의 약혼녀이신 공주님을 무척 좋아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게 되었지요.”
“레이첼이었던가, 이름이.”
칼리드가 벨리아의 근처에서 자꾸 눈에 거슬리던 한 소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벨리아 좀 그만 쫓아다니라고 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꾸 황자궁에 드나들긴.”
칼리드의 말투가 영 아니꼬웠다.
레이첼과 벨리아가 가까워지면서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하. 아시다시피 전 딸아이를 못 이깁니다.”
“……그러다가 후작이 내 편이라고 여기저기 소문나는 수가 있어.”
칼리드가 싸늘함을 담아 작게 그에게 경고했다.
원치 않는다면 발을 빼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이미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사전에 경고를 해주는 친절함 정도는 갖고 있었다.
“글쎄요. 벌써 늦은 것 같습니다만?”
카프리에 후작이 흘깃 연회장을 내려다보았다.
많은 이들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힐끔힐끔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칼리드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진짜 내 손을 잡기라도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