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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친구 하면 안 되나요? (59/88)


#59. 친구 하면 안 되나요?
2023.05.23.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직관하던 이들은 이 자리가 불편해서 잔뜩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눈앞에서 황자와 로니카 왕국의 공주가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아무래도 자신들인 모양이었다.

이들은 빠르게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결국 눈치싸움에서 진 주버크 백작가의 미아가 눈을 질끈 감고는 앞으로 나섰다.


“저, 저기 공주님!”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벨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니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세요!’라는 속마음까지 포함해서 미아가 외쳤다.

하지만 벨리아는 오늘 종일 고생한 그녀들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 칼리드를 달래어 돌려보내기로 결심했다.


“미안하지만 먼저 응접실에 가 있겠어요?”

벨리아는 하녀에게 이들의 안내를 부탁했다.


“어. 그게…….”

“그냥 보내기 마음이 쓰여서 그래요. 금방 가도록 할게요.”

차마 벨리아의 제안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소녀들은 눈동자만 데구르륵 굴리다 하녀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칼리드.”

그리고 그녀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벨리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칼리드를 불렀다.


“……날 방치해 둘 셈인가?”

칼리드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방치라뇨.”

“그대의 사냥개가 주인의 무관심에 지쳐서 목줄 끊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벨리아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서 휙휙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벨리아가 그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오히려 칼리드는 화들짝 놀라는 그 반응을 즐겁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응? 그대가 내 목줄을 꽉 잡고 있어야 하잖아.”

벨리아가 그의 표정에 울컥해 답했다.


“그 사냥개는 이미 길들여진 지 오래라 목줄은 필요 없어요.”

“그럴까?”

칼리드가 위험한 눈빛으로 벨리아에게 한발 다가왔다.

벨리아는 피하지 않고 칼리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칼리드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의아해하며 벨리아가 입을 열려는 찰나.


“읍!”

순식간에 칼리드가 벨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벨리아는 여기가 복도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어깨를 콩콩 두드렸지만, 칼리드는 오히려 더 깊게 벨리아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의 입맞춤이었다.


‘영애들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처음에는 분명히 단호하게 그를 돌려보내려 했었다.

하지만 그와 입술이 맞닿은 순간 이성이 마비된 듯 도저히 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벨리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눈을 감아 버렸다.

* * *



“오래 기다렸나요?”

칼리드를 방으로 보낸 후 벨리아가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을 때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후였다.


“너무 늦었죠. 정말 미안해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벨리아가 그들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다들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심지어 무척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듯싶었다.

벨리아는 그것이 퍽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을 살폈다.

눈치 빠른 하녀들이 다과와 홍차를 잘 내어준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2황자 전하와 사이가 무척 좋으신 것 같아 보기 좋았는걸요.”

레이첼이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저희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벨리아가 서둘러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모두는 칼리드가 자신들을 보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라는 의미가 담뿍 담긴 눈빛이었다.


“2황자 전하께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어요. 후후.”

레이첼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게 물들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정말 민망해서 여러분을 볼 낯이 없네요.”

벨리아는 정말 부끄러웠다.

의도해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 정말 사적인 모습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벨리아의 모습을 보던 이들 모두가 속으로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귀여워.’

청초하고 가녀린 벨리아였지만, 저렇게 볼을 붉히고 있으니 또 다른 느낌을 뿜어내었다.

분명 벨리아의 이런 모습에 칼리드가 푹 빠졌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독점하고 싶어서 2황자가 엄청난 애를 썼을 게 확실했다.

레이첼은 벨리아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녀가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벨리아가 소외된 아이들까지 하나하나 챙기며 웃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진심으로 그들을 어여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은 가식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냥 사랑만 받고 자라왔기에 세상 물정 모를 것이란 평이 많았지만, 오히려 진심 어린 사랑을 많이 받아서 역으로 가식적인 태도는 금방 구분할 수 있었다.


‘벨리아 공주는 사람을 가여워할 줄 알아.’

그건 제국의 귀족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덕목이었다.

우연히 보육원에서 벨리아를 알게 된 이후부터 계속 지켜보았지만, 항상 꾸준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젠 마음의 결정을 내릴 때였다.


“공주님.”

“네?”

열이 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열심히 손부채질하던 벨리아가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저 공주님이랑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요.”

“네?”

사실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로 큰 실례다.

하지만 레이첼은 확신했다. 벨리아에게는 오히려 이쪽이 더 진심으로 와닿을 것이라고.


“공주님과 친해지고 싶어요.”

“네?”

벨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희 친구 하면 안 되나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첼이 무척이나 환하게 웃었다.

* * *

벨리아의 가슴이 콩콩콩, 뛰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자꾸만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친구…….’

친구라는 말은 솔직히 처음 들어보았다.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단번에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일국의 공주였기에 사교계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치긴 했지만, 공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는 느낌이었지,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거나 놀고 있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주변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녀들은 친구가 될 수 없다.

클로제나 헤럴드도 친구가 아니었다.


‘처음이었어…….’

누군가가 자신에게 친구 하자고 말을 하다니.

왜인지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왜 그리 웃지?”

자신의 방과 연결된 문을 열고 들어온 칼리드가 벨리아를 보며 물었다.

아깐 그리 매몰차게 다른 이에게 가버리더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표정이 스르륵 풀어져 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칼리드는 침대에 누워 있는 벨리아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버려두고 간 보람이 있는 표정이야.”

손길은 다정했지만, 그의 입에선 뚱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벨리아가 그런 그에게 눈을 흘기며 칼리드의 손을 쳐냈다.


“이거 봐. 그대는 유난히 나한테만 너무 매정해.”

“오늘 제 방 출입 금지인 거 잊었어요?”

벨리아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칼리드였다.


“하루 지났는걸?”

“어떻게 하루가 지나……!”

그러고 보니 벌써 자정이 지났던가?

벨리아가 눈을 끔뻑끔뻑 뜨며 그를 바라보자 시원하게 씨익 미소 짓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얄밉다.

그것도 무지하게.


“그래서 뭐가 그리 기뻐서 미소를 짓고 있었지?”

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칼리드가 과장된 몸짓으로 벨리아의 곁에 뛰어들었다.

그 반동으로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꺅!”

얌전히 누워 있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벨리아가 놀라 소리쳤다.

칼리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벨리아를 품 안에 쏙 끌어안았다.


“이거 놔요.”

“싫어.”

그러곤 손에 힘을 더 꽉 주어 벨리아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벨리아는 잠시 버둥거려 봤지만 이내 포기하곤 온몸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어차피 힘으론 이기지도 못할 테니까.


“있잖아요, 칼리드.”

“응?”

벨리아가 그의 품에 얌전히 안긴 채 입을 열었다.


“……저 친구가 생긴 것 같아요.”

고작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꺼내는 것뿐이었는데도, 어쩐지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괜히 제 입에서 나온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칼리드가 의아하다는 듯이 벨리아를 내려보았다.

하지만 벨리아는 칼리드의 가슴에 더 깊이 얼굴을 묻어 표정을 숨겨버렸다.


“……헤헤.”

벨리아가 아이 같은 웃음을 흘리자 칼리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제게 안겨 있는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웃음소리였다.


“그게 그리 좋은가?”

“네에.”

벨리아가 민망한지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제게 친구 하자고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라울의 비로 제국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사람들은 제게 호의를 가득 담아 다가왔지만 그건 결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어쩌면 레이첼이 자신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한 것도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그녀가 벨리아에게 건넨 말 한마디에서 진심이 느껴졌고, 어떠한 이득으로 인해 가까워지고 싶다는 게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마음을 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벨리아는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너무, 너무 기뻤어요.”

벨리아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처음 생긴 친구였다.

이전 삶에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그들과 잘 지내고 싶어요.”

칼리드는 자세한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는지 자세를 고쳐 벨리아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곤 물었다.


“마음에 들었나?”

“……좋은 사람들 같아요.”

분명 마음에 든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확신이 없는 벨리아의 태도에 칼리드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주며 말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그러하겠지.”

그 행동이 마치 작은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쩐지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움텄다.

벨리아는 조용히 속삭였다.


“어쩌면 이전 삶에서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걸까요?”

자신이 라울의 등만 쫓으며 그들에게 벽을 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이전 삶에서의 벨리아 자신은 너무나도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게 주변과 거리를 만드는 줄도 모르고.


“글쎄.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의 그대는 누구라도 곁에 있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거지.”

“……됐어요. 그런 식으로 저 띄워줘도 아무것도 없어요.”

“진심이야. 그러니까 괜히 의심하며 기회를 놓치지 말고 새로운 삶을 마음껏 누려보도록 해.”

전과 달라진 제 행동이라곤 자신이 라울이 아닌 칼리드를 선택했다는 것뿐인데 주변 환경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변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어쩐지 전부 다 당신 덕분인 것 같아요.”

벨리아의 인사에 칼리드가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 찌푸리곤 말했다.


“으음. 그대는 더 자신감을 갖는 게 좋겠어.”

그의 목소리가 산뜻했다.


“내가 반할 정도의 사람이니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대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야.”

칼리드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벨리아는 가만히 그의 말을 음미하다 울컥 북받치는 감정에 눈을 꾹 감고 칼리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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