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의기투합 (58/88)


#58. 의기투합
2023.05.20.



 
자선 바자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귀족가의 영애들이 황궁을 방문했다.

벨리아는 응접실에서 간소한 다과를 준비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공주님!”

예쁘게 차려입고 방문한 그녀들을 벨리아가 다정하게 반겼다.

오늘 이곳에 초대된 귀족 영애들은 연신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밝은 에너지를 내뿜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이들이 마냥 귀여웠다.


‘칼리드는 처음 봤을 때부터 이렇게 어리게 느껴지진 않았는데.’

그것참 신기하기도 하지.

벨리아가 혼자서 피식, 웃음 짓고는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공주님.”

다들 사랑스러운 얼굴로 벨리아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벨리아가 상냥하게 물었다.


“오늘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죠?”

“그럼요!”

어린 귀족 영애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꺄르르,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밝은 모습에 다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들의 밝은 에너지가 전달되는 듯했다.


“하하. 그럼 우선 준비 중인 부분을 가볍게 설명해드릴 테니, 그 이후에 여러분의 의견을 듣도록 할게요.”

벨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모두는 제가 예술가들을 후원한다는 건 알고 계실 테지요. 저는 그들의 작품을 경매의 방식으로 판매할 생각이에요.”

처음에는 가격을 정하고 특정 장소에 모두 전시한 후 구매자를 찾는 전시회를 생각했었는데, 참여하겠다는 이들이 많아 방법을 바꿨다.


“경매로 판매할 생각이라면 귀족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가 필요하겠네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힘이 필요해요.”

벨리아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이 행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모두의 힘을 모아 행사를 잘 만들어보자고 그녀들의 의지를 북돋아 일으켰다.


“제가 후원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미술가, 조각가, 도예가, 음악가 등 분야가 무척 다양합니다. 그들 중에는 유형의 작품을 판매할 수 없는 자들도 있지요. 그러니 일반적인 바자회를 진행한다면 그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그렇기에 생각해 낸 게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도록 파티처럼 꾸며볼 생각입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즐길 거리가 풍성한 바자회가 될 수 있도록 만들 작정인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작품을 판매할 수 없는 음악가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곡을 연주할 것이다.

거기에 요리사도 고용해 바자회에 참여한 귀족들이 만찬을 즐기며 경매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꾸민다면 무척 멋있는 행사를 만들 수 있다.


“모든 작품을 경매에 출품할 수는 없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벨리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첼이 물었다.


“그들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경매에 내놓아도 될 정도의 작품만 골라낼 거예요. 그땐 여러분도 동행해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그녀는 벨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벨리아가 말한 분위기로 진행된다면 바자회에 참여하지 않을 이들도 파티를 즐기러 방문할 것이다. 레이첼은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을 물었다.


“무례가 아니라면, 바자회의 수익금은 어떻게 처리하실 예정인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무례라뇨. 당연히 알려드려야 할 이야기입니다.”

벨리아는 싱긋 웃으며 긴 설명을 시작했다.

작품의 판매금은 작가와 벨리아가 절반씩 나눠 갖기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

그들은 아직 신예였기에 이 바자회가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였다.

거기다 매번 재료비부터 생활비까지 후원해주는 벨리아가 작품판매금까지 투명하게 공개하고 나눠주겠다고 하자, 예술가들은 감동하며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수락했다.


“예술가들에게 작품 판매비를 나눠주고 남은 수익은 모두, 추운 겨울에 힘들어할 빈민들의 식량 배급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벨리아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귀족 영애들은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다.


“정말……. 이렇게나 뜻깊은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주님.”

그리고 레이첼은 또 한 번 벨리아에게 반한 듯 양손을 모아 인사했다.


“오히려 제가 여러분들이 참여해주어서 무척 감동했답니다. 분명히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거예요.”

벨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하자 모두 이미 바자회가 성공한 것처럼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아. 최근 꽃 농사가 끝나 물량이 조금 남은 모양이던데, 그것들을 구매해 바자회가 열릴 장소를 꾸미는 것은 어떠신가요?”

사피오 백작가의 수잔이 의견을 꺼내었다.

무척 좋은 의견에 벨리아가 반색하며 답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농가도 살릴 수 있고 파티장의 분위기도 화사해질 거예요.”

그렇게 누군가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모두가 자신들이 생각해온 의견들을 하나씩 꺼내어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중 벨리아의 눈빛을 반짝이게 만든 건.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정말 좋아하시며 가문의 이름으로 참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가문에서 보관하던 귀중품들 몇 개를 꺼내 경매에 출품하겠습니다. 수익금은 모두 좋은 일에 사용해주세요.”

레이첼의 말과 동시에 다들 가문에서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며 자신들도 동참하겠다 일렀다.


“어머……. 정말 감사해요. 정말…….”

 

 
벨리아가 감동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라울과 칼리드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차기 황좌에 칼리드보다 라울이 가깝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알기에 귀족 영애들이 바자회 준비를 도와준다 해도 그녀들이 속한 가문의 이름은 되도록 배제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벨리아의 예상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했고, 이는 그들이 벨리아를 대하는 마음이 정말로 진실한 호의였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제국에 친한 사람이 없어 혼자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해야 하나 조금 막막했었는데…….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더욱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얘기해주세요!”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의기투합하자며 웃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무언가 준비한 건 처음이라, 벨리아는 자꾸만 마음이 몽글몽글 들떴다.

* * *

모두가 사랑스러운 아가씨들이었지만, 레이첼은 정말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레이첼이 벨리아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르기에 최근 둘의 사이는 부쩍 가까워진 상태였다.


“공주님. 이건 어떠세요?”

“오. 괜찮네요.”

레이첼은 정말 안목이 탁월했다.

그녀가 골라낸 작품들은 모두 벨리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른 것들은 조금 더 고민해보는 게 좋겠어요. 일단 여기까지만 하죠.”

벨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오늘 함께한 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괜찮은 게 많았어요.”

“맞아요.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답니다.”

다들 작품을 골라내는 과정도 즐거운지 지루하다는 기색 없이 참여해 주었다.

그게 고마워 벨리아가 그들에게 티타임을 제안했다.


“여러분. 이따 다과라도 들지 않겠어요?”

“어머! 정말요?”

“그럼요.”

벨리아는 하녀들과 시종들에게 이곳의 정리를 맡기고 그녀들을 이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재잘대는 소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벨리아가 방긋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왠지 이들과 함께 있으면 어쩐지 자신도 평범한 소녀가 된 것 같았다.

물론 소녀라 불릴 만큼 어리진 않았지만, 그냥 그들의 밝고 기운찬 느낌이 즐거웠다.


‘예전엔 사교계에서 늘 혼자였는데…….’

업무를 보며 알게 된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말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친구라 부를 수 있던 사람이 데릭이었달까.

그렇게나 벨리아의 제국 생활은 외로움으로 가득했다.


“저희 둘째 오라버니께서 공주님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하더라고요.”

레이첼이 방긋방긋 웃으며 벨리아에게 말했다.


“그래요?”

“네. 무척 아름다우시다고 하길래 제가 얼마나 궁금했는데요.”

“후후. 과찬이군요.”

벨리아가 레이첼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쪽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 멈춰 세웠다.


“벨리아.”

그 목소리에 벨리아가 돌아보자 칼리드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앗!”

벨리아의 곁에 있던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2황자에 놀라 당황했다.

2황자궁이니 그가 있는 것이 놀랍다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여태껏 몇 번이나 방문해도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레이첼이 우아하게 칼리드를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이들 모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인사를 건넸다.

칼리드는 그들의 인사를 까딱 고갯짓으로만 받아주고는 벨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바쁜가?”

“어, 음……. 이제부터 여기 있는 레이디들과 다과를 함께하기로 했어요.”

벨리아의 대답에 칼리드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어머?’

레이첼의 눈에서 이채가 번졌다.


“요즘 계속 바쁘군.”

“바자회를 준비하느라 어쩔 수 없죠.”

벨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 나가는 길이었어요?”

칼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삐진 것 같은데.


‘아. 설마 나랑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나?’

요즘 벨리아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피곤해서 늘 일찍 잠이 들었다.

칼리드도 최근 금광 채굴에 박차를 가하게 되면서 무척이나 바빠졌다. 게다가 금광뿐 아니라 여러 투자사업과 관리하는 일들까지.

사실 벨리아 못지않게 정신없는 사람이 칼리드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칼리드?”

당황한 벨리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드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벨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언뜻 차분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에선 수도 없이 많은 감정이 흘러갔다.


‘괜히 나만 쪼잔해지는 기분이군.’

벨리아는 요즘 매일같이 저들을 만났다.

바자회 준비가 코앞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자신도 바빴지만 벨리아를 만날 생각에 서둘러 방에 가보면 그녀는 이른 시간부터 잠들어 있었고, 아침 일찍 일어나 기다리면 일정이 있다며 곧바로 나가버렸다.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해도 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림 고르는 것도 끝났다고 들었는데!

게다가 오늘도 무턱대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공사를 구분하기 위해 그녀의 일정이 끝났음을 보고받고 치밀하게 시간 계획을 세워 찾아왔다.

그런데 또 자신이 뒷전으로 밀린 것을 보니 칼리드는 괜히 울컥 서운함이 치솟았다.


“……오늘은 일정이 조금 비어 그대와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선약을 빼앗긴 모양이야.”

요즘 매일 저들과 함께하지 않나.

그러니 오늘은 나랑 함께해.

저들을 돌려보내고 나와 있겠다고 해.

칼리드의 시무룩한 눈빛에서 그런 속마음이 죄다 읽혔다.


“으음. 미안해요.”

벨리아는 그가 서운해한다는 걸 눈치챘지만 이번엔 살짝 모른 척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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