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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목적과 수단과 진심 (57/88)


#57. 목적과 수단과 진심
2023.05.16.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 지나 어슴푸레한 새벽이 되어 있었다.

칼리드는 언제 왔는지 벨리아를 꼭 껴안고 함께 누워 있었다. 벨리아는 몸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품 안을 벗어났다. 그러곤 침대에서 내려와 테라스로 향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개운했다.


“예쁘네.”

최근에 바쁜 일이 많아서 이렇게 여유롭게 테라스에서 풍경을 감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새벽의 고요하고 서늘한 기운이 세상을 감싸기 시작했다.

밤 사이 축축해진 공기가 햇볕에 점점 말라 바스락거렸다.

그게 못내 아쉬워 벨리아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 등에 담요가 둘러졌다.


“그러다 감기 걸려. 이젠 아침저녁으론 쌀쌀해.”

“고마워요.”

벨리아가 담요를 꼭 붙잡았다.

그러자 칼리드가 담요가 둘러진 그대로 벨리아를 포옥 품에 안았다.


 


“피곤은 좀 풀렸어?”

“네. 어젠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나 봐요.”

다정한 그의 물음에 벨리아가 평소와 같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칼리드는 벨리아의 정수리의 턱을 대고는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처럼 졸려서 칭얼거렸다고 생각하니 그게 또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젠 정말 잠투정이었군.”

“네?”

“어쩐지 그대가 어렸을 때 어땠는지 알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칼리드는 말없이 계속 웃기만 했다.

벨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머리를 꾹 누르고 있는 그의 얼굴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칼리드는 한참을 벨리아를 껴안고 있다가 해가 완전히 떠 세상이 환해진 뒤에야 놓아주었다.


“이제 들어가요. 사람들이 보겠어요.”

벨리아가 몸을 돌렸다.

그녀를 따라 다시 방으로 들어오며 칼리드가 말했다.


“어제 티파티는 어땠어?”

“아…….”

벨리아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칼리드가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바자회를 크게 열 거예요.”

“바자회?”

“네. 동참하고 싶다는 레이디들이 많았어요.”

“잘됐군. 참여하기로 한 게 누구지?”

그의 물음에 벨리아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흐음? 의기양양한 표정이군?”

“후후.”

“카프리에 후작 영애가 함께하기로 했나?”

오?

벨리아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대가 그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덴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건 카프리에 후작가밖에 없지 않나.”

심지어 그는 묻지도 않은 대답까지 줄줄 읊으며 자신의 생각이 어떠냐는 듯 눈을 찡긋 깜빡였다.


“와. 맞아요. 정답이에요.”

이런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한량인 척하며 지냈던 거지?

벨리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카프리에 후작 영애가 전적으로 절 돕고 싶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사피오 백작 영애와 주버크 백작 영애도 참여 의사를 밝혔어요.”

카프리에 후작가는 말할 것도 없고 사피오 백작가와 주버크 백작가도 굉장히 부유한 가문이었다. 게다가 축적된 부를 이용해 많은 사업을 하며 더 큰 부를 모으는 중이었다.

어디 가서 빠질 만한 가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 외에도 작게라도 후원을 하고 싶다는 사람도 꽤 있었고요.”

벨리아가 무척 기분 좋다는 듯 산뜻한 표정을 지었다.


“잘됐군. 그대의 소문이 사교계에도 꽤 많이 퍼진 모양이야.”

벨리아는 자선 사업을 시작하고 꾸준히 여러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원하는 보육원에 매달 들르는 것은 물론 신인 예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만났다.

게다가 빈민가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직접 나서서 둘러보기까지 했다.

진료소를 짓는 동안 치료사들에겐 당분간 형편이 어려운 제국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이어가도록 했다.

그 모든 비용은 벨리아가 부담했다.


“생각보다 소문이 빨리 퍼졌네요?”

“지금 그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나 보군.”

제국의 거리마다 벨리아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타국에서 온 공주님에게 제국민들이 이토록 호의를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 거리를 걷는다면 모두가 그대의 뒤에서 꽃가루를 뿌리며 졸졸 쫓아올 정도야.”

“에이. 설마요.”

사실 벨리아도 어느 정도 눈치채긴 했다.

후원하는 보육원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관심은 곧 사그라들 것이기에 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조금 인기가 많아진 거지 그렇게 과장하지 말아요.”

칼리드는 억울했다.

과장이라곤 전혀 들어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니까.


“아무튼, 치료사들이 의료 봉사하는 게 정말 컸어.”

“그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일을 행하는 거니 다들 의욕에 차 있기도 하고요.”

벨리아가 가볍게 대꾸했다.

치료사들은 벨리아가 의료 봉사의 직접 취지를 설명해 주었을 때부터 무척 의욕적이었다.

좋은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예비 황자비이자 로니카의 공주인 벨리아가 직접 그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에 크게 감동한 것 같았다.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오른 칼리드가 벨리아를 향해 말했다.


“그대는 모든 것들을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말하면서도 사람을 대할 때는 늘 진심이었어.”

보육원을 후원하는 것.

의료 봉사를 시작하게 한 것.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

폭설에 대비해 준비하는 것…….

그리고.


“……나조차 그대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었지. 하지만, 어때? 그 모든 것이 목적만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나?”

칼리드의 시선이 벨리아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벨리아는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다.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굳건하긴 하나, 관련 없는 자들에게조차 냉정하게 굴 만큼 차갑지 않았다.


“그대가 알고 있는 미래는 계속 바뀌고 있어.”

그러니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그녀가 수단이 아닌 진심으로 대했던 이들의 마음이 변하는 것 또한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벨리아는 의심하고 또 의심하겠지.


“그대가 그런 무의식 속에서 진심으로 대했던 것들은 모두…….”

칼리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야. 그대가 겪었던 삶에 머무는 망령들이 아니라.”

그의 말에 방긋방긋 웃던 벨리아의 표정이 조금씩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변했으니 주변도 변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을 벨리아는 부정해왔다.


“……알고 있어요.”

벨리아가 당황스러운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하지만 칼리드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대는 몰라.”

그의 눈빛이 무거웠다.


“그러니 제국민들이 그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면하지 마.”

지금의 벨리아가 황제에게 버림받고, 귀족들에게 조롱받으며, 제국민에게도 외면 받았던 황후가 아니라는 것을. 벨리아는 빨리 깨달아야 한다.

칼리드는 한 번 더 강하게 진실을 전했다.


“그때의 그대와 지금의 그대는 달라.”

비극적인 결말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차근차근 뻗어낸, 아주 작은 한 발 한 발이 벌써 이만큼이나 큰 격차를 만들어냈다.

무력하고 나약하던 황후가 아닌, 주체적이고 강인한 벨리아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고……?’

벨리아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과거의 잔상이 쩌걱, 소리를 내며 거울에 금이 가듯 천천히 부서져 내린다.

그 속에 머물던, 누군가의 영광이 자신의 빛이 될 거라 믿었던 바보 같았던 황후의 모습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스스로의 능력은 믿으면서 왜 타인이 그대에게 보내는 호의는 의심하지? 모두 그대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거잖아.”

딱딱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칼리드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정 믿지 못하겠다면, 다음에 나와 함께 거리를 걸어보지 않겠어?”

그는 우리가 함께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이 뒤에서 꽃을 뿌리며 따라올 거라고 속삭였다.


“우리가 피리 부는 소년이 되어보는 거야. 어때? 뒤로는 환호와 꽃길이 펼쳐지겠지.”

시원하게 웃는 칼리드의 표정을 보며 벨리아의 표정도 점차 풀어졌다.


“그대의 인기에 편승해 나도 꽃비를 맞아보고 싶은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가만히 놔두면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갈 태세였다.

벨리아의 얼굴에서 다시금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으면요?”

“그럼 그대로 우리끼리 데이트를 하지 뭐.”

칼리드가 벨리아를 바라보며 씨익,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됐어요. 요즘 얼마나 바쁜데요.”

“흐음. 그거 정말 아쉽군.”

칼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그러곤 벨리아를 단숨에 번쩍 일으켜 꼬옥 안았다.


“벨리아. 그대는 제국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황후가 될 거야. 내가 장담할게.”

한없이 다정한 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벨리아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퍼부었던 저주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 않나.


“내가 빼앗겼던 것들을 돌려주겠다고 했었지?”

칼리드가 벨리아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자 했던 것은 아닌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비록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이라고 해도, 나 역시 그대가 빼앗긴 영광을 돌려줄게.”

 

* * *

칼리드가 남기고 간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빼앗긴 영광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하지만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벨리아는 고개를 흔들곤 서둘러 잡념을 떨쳐냈다.


“하아…….”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고 펜을 들었다. 바자회에 참여하겠다고 했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황궁 방문 일정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 중으로 만나서 일정이나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대략적인 윤곽은 잡아두었으니, 이들의 의견을 듣고 보다 확실하게 계획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과 친분을 찬찬히 다져두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장의 편지를 정성껏 작성한 후, 벨리아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목이 뻐근했다.


‘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황후라니.’

벨리아는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잉고트 제국에서 자신에게 무조건으로 호의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니.


“……믿을 수 없어.”

하지만 그런 벨리아에게 칼리드는 지금의 모든 것들이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망령이 아닌,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들임을 기억하라고 했다.

벨리아가 아득해지는 마음에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사람의 감정이란 부질없어. 분명 쉽게 변하고 흔들리겠지.’

하지만 칼리드가 하는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믿고 싶었다.


“…….”

그의 호의는 금방 사라질 것이고 자신에게 보이는 이 애정은 아주 잠깐의 관심일 뿐일 거라는. 이런 의심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귓가에서 라울의 비웃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도 누군가를 또다시 사랑하게 되고 그를 온전히 믿고 싶어졌냐고 황제인 라울이 제게 되물었다.

벨리아는 여전히 이전 삶에 얽매여 있었다. 하나씩 떨쳐내고는 있었지만, 온전히 그 기억을 지워버리긴 쉽지 않았다.


‘칼리드는 라울과 달라.’

하지만.


“하아…….”

벨리아는 한숨과 함께 싹트는 불안감을 과감하게 잘라내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책상에 엎드렸다.


“……아니야. 달라.”

그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를 믿어도 돼.

그는 라울이 아니야.


“무서워하지 마, 벨리아.”

벨리아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 말을 중얼거렸다.

무서워하지 마, 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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