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기선 제압
(56/88)
56. 기선 제압
(56/88)
#56. 기선 제압
2023.05.13.
그리고 그게 신호탄이 되었는지 다른 영애들도 슬며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도 참여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저도 좋은 일에 동참하고 싶어요.”
벨리아는 감격했다는 듯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웃는 얼굴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빠르게 살폈다.
‘사피오 백작가. 주버크 백작가. 그리고…… 카프리에 후작가.’
손으로 가려진 벨리아의 입은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들 모두 제국의 중앙 정치 세력에서 꽤 힘이 있는 대단한 가문들이었으니까.
“정말 감사해요! 많은 이들의 참여가 있다면 행사를 진행하기 더욱 수월해질 거예요.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거고요.”
“정말요? 와아, 기뻐라.”
레이첼이 손뼉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었다.
“저는 공주님께서 따뜻한 마음으로 꾸준히 선행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감명 받았답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거물들이 걸려들었다.
특히 카프리에 후작가의 고명딸인 레이첼이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게 중요했다.
그녀는 앳되고 순진해 보이지만 무려 후작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가씨였다. 그녀가 부모님과 세 명의 오빠들의 열렬한 애정을 받는다는 것은 제국 내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사교계에서 엘린 칸테리프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레이첼이 적극적으로 사교계를 휘두르려고 했다면 지금의 사교계는 두 부류로 나뉘어 있을 게 분명했을 정도로.
“꾸준히 보육원에도 후원하고 계시죠?”
주버크 백작 영애가 물었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정도로만 소소하게 후원하는 거지만요.”
“공주님께서 매달 보육원들을 들러 꼼꼼하게 챙기시는 거 알고 있어요. 이건 가식적인 행동이 아닌 진심으로 후원하는 거잖아요!”
늘 조용하던 레이첼이 조금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
“게다가 지금 짓고 있는 진료소의 취지도 들었답니다. 저는 꼭 공주님이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레이첼 카프리에는 볼이 잔뜩 상기되어서 벨리아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선 사업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레이디들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더 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럼…….”
벨리아는 조심스레 준비했던 말을 꺼내었다.
“작고 소박한 행사이지만 혹시라도 참여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제게 따로 말씀해주세요.”
제국의 사교계에서 벨리아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밀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여기서 동참하는 자들이 벨리아의 기반을 단단하게 받칠 소중한 이들이 될 것이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돼.’
이전에 슬쩍 티파티에 참여했을 때 칸테리프 공녀의 사교계 입지가 무척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두가 그녀를 추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벨리아는 이들을 반드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직감으로 확신했다.
“참여를 희망하는 분들께는 나중에 따로 연락을 드릴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그렇게 벨리아가 자선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 엘린은 벨리아에게 쏠려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꼴 보기 싫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 가식적인 선행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타국에서 와 아무런 기반이 없는 사람이 자리를 잡기 위해선 자선 사업만큼 좋은 게 어디 있는가. 당연히 벨리아 공주도 그것을 노리고 시작했을 터.
그런데도 저 카프리에 후작 영애는 멍청하게도 벨리아 공주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저도 마음은 참여하고 싶지만, 따로 후원을 하고 있어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엘린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벨리아는 그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해합니다, 공녀. 약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무척 바쁜 시기가 아닙니까. 오늘 티파티에 참석해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무척 기쁘답니다.”
“다음에 좋은 일을 하실 때 꼭 불러주세요.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엘린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벨리아에게 넘어간 상황이다.
처음 찻잔을 선물하겠다고 이야기하던 그 순간부터 엘린은 벨리아에게 완벽하게 기선제압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아…….’
가뜩이나 라울이 불법 시설에 방문한 것 때문에 엘린도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물론 황제가 직접 나서서 빠르게 수습한 후, 무척 작은 실수였지만 당분간 근신하겠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엘린은 그 작은 흠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울은 완벽한 황자여야 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완벽한 황자로 남아 차기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엘린은 웃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싸늘한 눈빛을 한 채로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벨리아 공주를 잊지 못한 것 같았어.’
라울과 칼리드 모두 벨리아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기가 막혔다.
황자 둘이 같은 여자한테 청혼했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거절당한 이후에도 마음 정리를 하지 못한다는 건 더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칼리드 황자 전하께선 오늘 티파티에는 오지 않으시나요?”
엘린이 물었다.
이전 티파티에 난입했던 칼리드를 비꼬는 것이었다.
“네. 상단을 확인하러 잠시 외출하셨답니다.”
벨리아는 그저 웃으며 질문을 넘겨버렸다.
어느덧 세 번째 음식들이 차려졌고 또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이번엔 라울과 엘린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확실히 아직까지는 다들 칼리드보다 라울에게 관심이 더 많아.’
벨리아도 차분하게 현실을 파악했다.
이들 사이에서 칼리드가 어느 정도의 위치로 인식되어 있는지.
“라울 전하께서는 오늘 마중 나오지 않으세요?”
누군가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이전에 칼리드가 벨리아를 데리러 왔듯 라울도 엘린을 마중 나오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의외로 엘린과는 다르게 다들 칼리드가 티파티에 난입했던 것을 좋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라울 전하께서도 오늘 일이 많으셔서요.”
벨리아는 엘린이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라울은 사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엘린과 형식적으로 시간을 함께 보낼 뿐이었다. 그들이 그리 다정한 사이가 아님을 여러 번 시녀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
“제가 황궁까지 왔으니 저를 보러 꼭 오고 싶다고 하셨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었지요.”
엘린이 떨리는 입꼬리를 감추며 대답했다.
벨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어머, 1황자 전하께서 정말로 다정하시네요.’ 하는 가식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라울이 실은 지금 황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려 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해.’
아직까진 자신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질투에 차 티파티에서 일을 꾸미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벨리아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더 나아가 정도를 지나치는 공격을 해 온다면 벨리아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
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싸늘해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 * *
무사히 티파티를 마무리하고, 벨리아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따뜻한 물에 들어가 피로를 푼 후 곧바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피곤해…….”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기운이 다 빠진다.
그래도 무척 만족스러웠던 시간이라 벨리아의 표정은 밝았다.
티파티에서 바자회에 참가하고 싶다 밝혔던 세 가문의 영애 외에도 여럿이 저택으로 돌아가기 직전 참여 의사를 전해왔다.
‘레이첼 카프리에.’
그녀는 티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벨리아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반짝이는 눈으로 벨리아의 자선 사업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어째서 벨리아가 하는 일에 자신도 참여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꺼내었다.
“……착하고 순수해.”
그야말로 사랑만 받으며 자라 세상의 밝은 면만 보는, 영혼까지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실 이전 삶에서는 레이첼은 벨리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그다지 자신을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는데.
“이상한 일이지.”
어째서 이토록 호감을 표하는 걸까.
“하아…….”
모르겠다.
게다가 레이첼 카프리에가 저런 성격이었던가.
오늘따라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머릿속이 멈춘 채 굳어버린 기분이었다.
뭐, 어찌 되었건 레이첼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벨리아에겐 좋은 일이다.
“쉬고 있었나?”
그때 황궁으로 귀환한 칼리드가 벨리아의 방으로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몇 년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문득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벨리아가 침대에 늘어진 그 모습 그대로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있잖아요, 칼리드.”
“응?”
그가 겉옷을 벗으며 소파에 와서 편한 자세로 앉았다.
“여기 당신 방 아니잖아요.”
벨리아가 아주 당연한 의문을 던졌다.
어째서 돌아오면 매번 당신 방으로 가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바로 옆방인데 굳이 돌아오자마자 이쪽으로 올 이유가 있나?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어차피 옆방인데?”
“어차피 옆방이니까 당신 방으로 갔다가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놀러 오세요. 저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매정하군.”
“전혀요.”
벨리아가 팽, 하고 고개마저 돌려버렸다.
칼리드는 어리광을 피우는 벨리아가 귀여워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돌아오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기로 했잖아.”
이번엔 칼리드가 은근하게 벨리아를 설득했다.
“난 그저 그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야. 응? 벨리아.”
칼리드는 온몸으로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목소리마저 평소보다 훨씬 온화했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늘 섞여 있던 색정적인 기색은 한 톨도 내보이지 않았다. 아주 담백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벨리아는 칼리드가 무어라 말을 하든 미동도 없이 추욱 늘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로 기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 마냥.
“얼른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세요. 타인의 방에 이렇게 멋대로 들어오다니. 제국의 황자 전하께서는 무례하시군요.”
“으음. 많이 피곤해?”
“네에.”
이를 어쩐다.
칼리드가 가벼운 수작을 부려보았다.
“그럼 내가 곁에서 안아줄까?”
“……씻지도 않고 어딜.”
하지만 벨리아의 벽은 단단했다.
칼리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음…….”
그는 난감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럼 씻고 오면 괜찮은가?”
“귀여운 척해도 안 넘어가요.”
하지만 계속해서 귀찮게 치근덕거리는 칼리드를 보며 벨리아가 무거운 몸을 뱅그르르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씻고 와요. 침대에 씻지 않고 올라오는 건 싫어…….”
“하하. 금방 갔다 오지.”
칼리드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방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보던 벨리아가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찌뿌둥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그 어떤 날보다도 피곤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처럼.
‘칼리드가 이제 곧…… 돌아올 텐데…….’
그리고 그녀의 의식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