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 티파티가 아니라 전쟁터지. (55/88)


#55. 티파티가 아니라 전쟁터지.
2023.05.09.


황궁의 철문이 열리고 큰길을 따라서 마차들이 차례로 멈춰 섰다. 황족의 안전과 철저한 보안을 위해 더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으니 모두 여기서 내려야만 했다.

벨리아는 그 길이 곧장 내려다보이는 계단 위에 서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공주님!”

“어서 오세요. 여기서부턴 마차가 더 들어올 수 없기에 직접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초대된 사람들이 모두 모이고 티파티가 열리는 정원까지 벨리아가 직접 그들을 안내했다.

귀족들을 인솔하는 벨리아의 움직임은 고상하고 기품이 넘쳤다. 그녀의 우아함은 화려한 황궁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와아!”

황궁에 처음 와보는 귀족 영애들은 연신 두리번거리기 바빴고, 황궁에 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여유로운 척 벨리아를 따라 걸었다.

물론 모든 이들과 다르게 황궁이 정말 익숙해 무척 여유로운 한 사람도 있었다.


“공녀님. 공녀님은 황궁에 많이 와 보셨죠?”

“그럼요.”

바로 엘린 칸테리프였다.

엘린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양산을 든 채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벨리아에게서 약간 떨어진 채 함께 온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잔뜩 상기되어 즐거운 얼굴이었다.


“이쪽입니다. 오래 걸어야 해서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벨리아가 갈림길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다들 괜찮다며 대답해 주었다.

황궁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깟 조금 걷는 게 대수일 리가.

물론 엘린은 예비 황자비의 자격으로 늘 황자궁까지 마차를 타고 갔었기에 이렇게 걸어 움직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조금, 덥네요.”

엘린이 손에 든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말했다.

그러자 그 곁에 함께 있던 영애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렇네요. 가을인데도 따뜻한 날이군요.”

벨리아는 미소 지으며 일부러 꺼낸 것이 분명한 그녀의 말을 자연스럽게 넘겨버렸다.

그다지 타격도 없는 공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파티가 열릴 정원에 도착했다. 하녀들은 레이디들에게 한 사람씩 다가가 자리 안내를 도왔다. 모두 자리에 앉았을 때가 되자 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것을 내와 주겠니?”

벨리아의 말에 하녀가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을 꺼내와 자리마다 하나씩 놓아주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자 벨리아가 친절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수박을 바질에 절여 달콤하게 만든 디저트입니다.”

제국의 귀족들에겐 무척 생소한 디저트일 터.


“로니카 왕국에서 즐겨 먹던 것입니다. 이것을 차게 먹으면 더위가 가시는 기분이라, 준비해 보았어요.”

초대받은 귀족 영애들은 모두 자신의 앞에 놓인 디저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수박과 바질이라니.

게다가 그 위에는 부드러운 크림과 잘게 부서진 쿠키가 올라가 있었다.


“후후. 속는 셈 치고 드셔보세요.”

벨리아의 말에 모두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것을 한입 떠서 입에 넣었다.

엘린도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보는 디저트였다.


“어머!”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다들 처음 먹어보는 맛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었지만, 실제로 먹어보니 시원하고 부드러워서 속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심심하지 않게 바질의 향이 살짝 올라오는 것도 별미였다.


“맛있죠? 제가 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왕성의 주방장이 저를 위해 만들어준 디저트였답니다.”

벨리아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게 '로니카의 왕족만 먹어볼 수 있었던 디저트'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나자 디저트의 맛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처음과는 다르게 모두 바삐 손을 움직였다.


“티파티가 열리는 곳까지 오기 위해서 오래 걸어야 했지요. 그래서 조금 신경을 써 보았습니다.”

벨리아가 상냥하게 디저트를 준비한 이유를 설명하자 초대된 귀족들은 그녀의 세심한 배려를 깨닫고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기뻐했다.


“정말 맛있어요!”

“어머.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답니다. 원하시면 레시피도 알려드릴게요.”

무려 로니카 왕성 요리사의 레시피였다.

귀족들은 잔뜩 들떠 그녀에게 너도나도 레시피를 달라며 요청을 해 왔다.

벨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하녀에게 손짓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이 있을까 해서 미리 레시피를 작성해 두었습니다.”

하녀가 가져온 쟁반 위에는 벨리아의 친필로 적힌 디저트 레시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오늘의 티파티를 벨리아가 얼마나 섬세하게 준비했는지 드러났다.


“감사해요!”

“제국은 로니카 왕국보다 더위가 길게 유지되어 혹, 이것이 마음에 든다면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티파티에 참가한 귀족 영애들은 오늘이 정말 특별한 하루가 될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황궁에 처음 와보는 어린 귀족 영애부터 조금 나이가 있는 레이디들까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좋아. 주도권은 내가 가져왔어.’

혹시라도 엘린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까 하여 이것저것 안배해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선제압이 된 모양인지 엘린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윽고 벨리아의 신호에 일사불란하게 디저트와 홍차들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지금 티파티가 열리는 이 장소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부디 모두 이곳의 정취를 충분히 느끼실 수 있길 바랍니다.”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가벼운 근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서로 궁금했던 점이나 축하할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담소가 이어졌다.


“공녀님은 약혼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셨는데 어떠세요?”

얼마 전 라울과 약혼식을 올렸던 엘린 칸테리프를 향해 관심이 쏠렸다.


“폐하께서도 잘 대해주시고, 황비 전하께서도 종종 불러주셔서 함께 차를 마시곤 합니다. 제겐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지요.”

엘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축하드려요. 라울 전하께서는 다정하시니 무척 잘 대해주시겠죠?”

약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엘린은 무심한 눈동자로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벨리아는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어째 조용히 넘어간다 했다.


‘이럴 줄 알았지.’

엘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벨리아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지금 그들이 벨리아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국의 사교계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귀족들만의 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벨리아는 이걸 알지 못해 제국에 처음 와서 주최했던 사교계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던 기억이 났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책에서도 전혀 나오지 않았던…….


‘그야말로 실생활 속에서만 암묵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지.’

벨리아가 속으로 짙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공녀의 약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그 찻잔을 선물할게요. 티파티가 끝나기 전 예쁘게 포장해 준비해둘 테니 부디 받아주길 바라요.”

벨리아의 말에 엘린은 찻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그저 차를 마시기 위해 잔에 손을 가져다 댄 것처럼 보이는, 특별할 것 없는 저 행동은 바로.

‘내가 선물로 받고 싶은 것은 이 찻잔이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어머,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엘린이 놀란 기색을 감추며 눈을 사르르 접으며 겸양의 말을 꺼내었다.


“제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이런 기쁜 소식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뻔한 말을 주고받으며 벨리아와 엘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임신이나 결혼, 약혼 등의 좋은 소식이 있을 때, 당사자가 가장 먼저 붙잡은 것을 선물하는, 일종의 주최자가 베푸는 친절 같은 거였다.

보통 찻잔이나 커트러리 세트 등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것들로 한정되기는 했지만.


‘별 쓸데없는…….’

벨리아는 속으로 욕을 던지면서도 표정은 그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제국인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대다수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설령 하지 않더라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것.


‘하지만 사소한 일이 말을 만들기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지.’

타국에서 온 벨리아가 처음으로 티파티를 주최했을 때.

이 작은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것을 빌미로 뒤에서 온갖 조롱 섞인 말들이 돌아다녔었다.


“제국 사교계에 대해 잘 아시네요?”

누군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이었다.

사교계 예절에 관해 교육을 받더라도 이런 부분까지 설명하지는 않으니까.


“그런가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차근차근 알아가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벨리아가 말을 마친 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모두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벨리아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미소 짓고는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접시를 내오도록 하지요.”

벨리아가 가볍게 종을 흔들었다.

청명한 종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져나갔다.

테이블 위에 차려졌던 디저트와 찻잔, 접시들은 모두 수거하고 다시 새로운 찻잔과 접시들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하녀들이 돌아가며 각자의 컵에 알맞게 우려진 홍차를 따랐다.

디저트는 첫 번째와는 또 다르게 포만감을 채울 수 있는 종류였다.


“요깃거리가 되었으면 해서 든든하게 준비해 보았습니다.”

각종 샌드위치와 잘 구워진 스콘. 그에 곁들일 잼과 크림까지.

이후 마지막 순서로는 과일이 들어간 푸딩과 달콤한 케이크, 타르트 등이 나올 예정이었다.


“우와…….”

모두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준비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작은 흠도 잡아내기가 어려웠다.


“디저트와 샌드위치는 모두 넉넉히 준비했으니 돌아갈 때 따로 포장해서 나눠드릴게요.”

“어머머.”

“감사해라…….”

벨리아는 싱긋 웃었다.

자신이 이들에게 당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결코 대충 준비할 수는 없었다.

어느 한 군데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신경 썼다.


“역시 일국의 공주님이셔서 준비하신 게 남다르네요.”

“처음 나왔던 수박 디저트도 정말 획기적이었어요. 제가 티파티를 열 때도 그것을 만들어 내어보려고 생각했답니다.”

벨리아가 차를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그러고 보니 공주님께서 이번에 자선 바자회를 준비하고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곧 꺼낼 예정이었는데.

벨리아는 무척 반색하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로니카에서 예술가들을 후원했었는데 제국에 와서도 그 일을 이어가고 있거든요.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 바자회를 열 예정이에요. 수익은 모두 어려운 자들을 후원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고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이 아닌 공익의 목적임을 다시 한번 밝힌 벨리아가 싱긋 웃었다.


‘여기서 누군가가 자신도 참여하고 싶다고 하면 아주 좋을 텐데.’

일을 키워서 대대적으로 바자회를 열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다. 게다가 제국민부터 귀족들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터.

벨리아가 바자회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자신에게 말을 하라며 입을 막 떼려던 찰나.


“혹시 후원을 받는다거나 참여 희망자를 받을 생각도 있으신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중간에 앉아 있던 앳된 얼굴의 한 귀족 영애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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