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반가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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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반가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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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반가운 소식
2023.05.02.
당사자도 없는데 혼자서 무슨 생각을 이렇게 하고 있는지.
괜히 혼자 민망해져서 서둘러 남은 편지를 개봉해 읽어 내려갔다.
이번엔 클로제가 보낸 편지였다.
[사랑하는 언니에게.
잘 지내고 있어?
언니가 제국으로 떠나고 헤럴드 오라버니가 한 시간에 한 번씩 한숨과 함께 언니 걱정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이 터지는 줄 알았지 뭐야.
나는 요즘 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언니 방에 있는 못생긴 조각상을 만나러 가곤 해.
……중략……
아 맞다!
최근 내게 흥미로운 게 생겼어.
제국에서 만나면 자세하게 이야기할게.
언니가 없는 왕성이 조금 쓸쓸해.
보고 싶다.
곧 만나러 갈게.]
어쩐지 편지에서 클로제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클로제가 직접 읽어주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흥미로운 게 생겼다니. 그게 무엇일지 궁금한데?’
클로제는 여기저기 관심은 많았지만 이렇게 직접 흥미를 드러내는 경우는 잘 없었다. 너무 똑똑해서 그런 건지 무언가에 관심이 생겨도 금방 식어버리곤 했으니까.
“큭큭. 정말 웃기는 애라니까.”
자신의 동생이었지만, 어쩜 이렇게 재밌는 아이인지.
클로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전 삶에서는 늘 도서관에 박혀 책만 읽느라 클로제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살갑고 다정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런데도 클로제는 늘 자신을 좋아해 주었다.
“못생긴 조각상……. 들고 올 걸 그랬나?”
벨리아가 중얼거렸다.
“그게 뭔데?”
방으로 들어오던 칼리드가 벨리아의 혼잣말에 질문을 던졌다.
못생긴 조각상이라니. 어감이 귀여웠다.
“아? 칼리드.”
벨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칼리드를 반겼다.
“못생긴 조각상이 뭔지 설명 안 해줄 건가?”
“아…….”
벨리아는 로니카 왕성에 있는 그 조각상을 떠올렸다.
언뜻 보면 조각상처럼 보였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볼 때는 그저 돌덩어리로만 보이는 그것.
“혹시 제 방 테라스에 있던 석상 기억나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기억나.”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았지만, 대충 기억이 난다고 둘러댄 칼리드가 벨리아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석상이었나?”
“아하하.”
칼리드의 물음에 벨리아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혼자만 웃지 말고 나도 함께 웃을 수 있게 자세한 얘기를 해주겠어?”
“아, 미안해요. 사실 그거 클로제와 헤럴드 오라버니가 제게 준 선물이었거든요.”
“못생긴 조각상이?”
“네. 그 못생긴 조각상이요.”
벨리아가 오래전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벨리아가 딱 클로제의 나이였을 무렵.
갓 성년식을 치른 오라버니가 후계자 수업으로 점점 바빠지고, 막내인 클로제는 드디어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벨리아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의 벨리아는 사춘기였고, 조금 많이, 예민한 소녀였으니까.
“어렸을 때 클로제도 헤럴드 오라버니도 귀찮기만 한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그저 답답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들이 제게 건네는 애정을 귀찮아했고,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날이 서 있는 저를 보면서도 클로제와 헤럴드는 단 한 번도 등을 돌린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클로제가 제게 달려오다 넘어져서 엉엉 울어버리는 모습을 보곤 이유 없이 화가 났어요. 그래서 그대로 그 아이를 놔두고 혼자서 방으로 돌아왔고, 그다음 날부터 클로제가 저를 찾아오지 않기 시작했죠.”
하루, 이틀, 일주일.
아무리 밀어내도 늘 제 곁에 있었던 클로제와 헤럴드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벨리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젠 내게 완전히 질렸겠구나, 생각했어요.”
벨리아는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언니, 하고 부르며 울던 클로제의 모습과 그 모습을 뿌리치고 떠난 이후부터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던 클로제와 헤럴드.
처음엔 편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자신을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자꾸만 그들을 신경 쓰게 되었고, 자신 없이도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땐 마음 한구석에서 씁쓸함과 속상함이 밀려들었다.
그들을 밀어내고 내친 건 자신이었으면서.
“그러다 제 생일날 그 못생긴 조각상을 선물해줬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클로제의 품에서 조각상을 발견한 것이었지만.
그날 상처투성이였던 헤럴드의 손과, 이건 선물이 아니라며 엉엉 울어대던 클로제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절 따돌렸다거나 제가 꼴도 보기 싫어서 피했던 게 아니라 몰래 선물을 준비하려고…….”
손재주가 없는 탓에 어렴풋이 사람의 형상만 띤 못생긴 조각상이 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며칠 동안 준비했던 그 선물은 여전히 너무 소중하고 애틋했다.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진 벨리아를 지긋이 바라보던 칼리드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정한 가족이군.”
“맞아요. 제게는 과분한 가족들이죠.”
그렇게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던 벨리아가 갑자기 칼리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어렸던 시절을 회상하다 문득 스친 생각에 벨리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춘기였던 당시 벨리아가 즐겨 읽던 로맨스 소설에는 다양한 남자 주인공들이 나왔고, 다른 소녀들과 비슷하게 벨리아도 그들을 통해 자신의 이상형을 떠올려 보곤 했다.
‘내 이상형이 칼리드와 무척 비슷했었지, 아마?’
하지만 그런 벨리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칼리드가 다정하게 물어왔다.
“왜 날 보며 웃는 거지?”
“그냥요.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
하지만 그걸 얘기해 줄 수는 없지.
그런 벨리아를 바라보던 칼리드가 턱을 매만지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대가 어렸을 때는 꽤…….”
“꽤, 그다음은요?”
칼리드는 대답 없이 그저 웃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삼켜내었는지 벨리아는 단박에 알아채고 자신의 입으로 그 대답을 대신 말했다.
“알아요. 저 그때 진짜 못됐었어요.”
벨리아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혼자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정말 꼴 보기 싫었을 거예요.”
아마 그때였다면 당신과 저는 아예 만나지도 않았겠죠.
칼리드는 웃음기를 숨기지도 않은 채 물었다.
“그럼 그 조각상 덕분에 지금의 벨리아가 된 건가?”
“뭐. 완전히 그렇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느 정도 계기가 되기는 했죠.”
생각보다 소중한 조각상이었군.
칼리드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조각상을 떠올려 보았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니까 어쩐지 더 보고 싶네…….’
벨리아는 책상에 차곡히 놓인 편지들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가족들에게 쓸 답장에는 어쩐지 말이 많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게 무척 기분이 좋아서 벨리아는 눈을 접으며 아주 밝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가족들에게 답장을 쓸 시간인가?”
내가 방해한 것 같아 조금 눈치 보이는데?
칼리드가 벨리아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벨리아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얼른 답장을 쓰라고요?”
하지만 칼리드는 벨리아를 침대로 끌고 가서는 끌어안고 누웠다.
“하하. 뭐예요. 답장 쓰라고 일으킨 거 아니에요?”
“아니야. 만약 답장을 쓸 거라면 그만두고 나와 놀자는 이야기였지.”
칼리드가 벨리아의 허리를 꼭 껴안고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베고 누웠다.
마치 벨리아에게 칼리드가 안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안 그래도 저 당신과 상의할 게 있었는데.”
“뭔데?”
“우리 결혼식에 예하께서 진짜 오실 건가 봐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제국에 오신다고 했다고?”
“네. 어머니께서 편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칼리드도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물론 좋은 일이었다. 신국의 대신관이 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국까지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벨리아의 위상은 달라질 테니까.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방문이기에 그에 맞춰 모든 준비 과정을 새로 수정해야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벨리아가 해맑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게다가 어마마마께서도 방문하실 생각인가 봐요.”
“로니카의 왕비께서도…….”
칼리드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보며 벨리아가 칼리드의 손을 슬쩍 붙잡았다.
“전 솔직히 너무 혼란스러워요. 당신도 그래요?”
“그대가 혼란스럽다는 건 전에 이야기했던 것과 달라졌기 때문인가?”
역시 칼리드는 벨리아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전 삶과 달라진 현실에 벨리아가 잔뜩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동안 우리가 해 왔던 일들이 조금씩 미래를 변화시켰겠지.”
“제가 아는 정보들이 이제 전혀 소용없어지는 게 아닐까요?”
미래를 알고 있기에 라울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했었다. 그런데 점점 미래가 변화해 간다.
말만 앞서고 칼리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될까 봐 무서워졌다.
이러다 복수마저 실패한다면……?
그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칼리드는 벨리아가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뒤집어 마주 잡아주었다. 다 괜찮다는 듯이.
“그런 걱정도 하지 말고. 내가 그대의 곁에 있는 건 이럴 때를 위한 거겠지.”
벨리아는 자신이 어째서 회귀하게 된 걸까, 늘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돌아온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마음이 벅차오를 수가 있는 걸까.
“그러니 그대는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
칼리드가 누워 있는 벨리아의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주며 눈웃음을 지었다.
“앞서가는 것도, 뒤처리하는 것도 모두 내가 하도록 하지.”
한없이 다정한 그 말에 벨리아가 안심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칼리드의 손이 동그스름한 이마에서 천천히 내려와 뺨을 쓰다듬었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는지.
엄지를 살짝 움직여 보드라운 피부를 쓸었다.
“벨리아.”
벨리아가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어느새 칼리드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지금 답장을 쓸 건가?”
칼리드의 눈이 요사스럽게 휘었다.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했다.
벨리아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가, 답장을 써야 한다고 하면요?”
“글자가 많이 흔들릴 텐데 괜찮겠어?”
그 말의 속뜻을 눈치챈 벨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지금…….
“난 내가 할 일을 할 테니까, 그대는 그대가 할 일을 하면 되겠지.”
칼리드가 뻔뻔하게 말하며 다시 손을 옮겨 벨리아의 목 뒤를 지분거렸다.
“아…….”
벨리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 이후는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