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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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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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2023.04.29.
분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라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자의 딸이 벨리아 공주가 후원하는 보육원에 있다고 합니다.”
“겨우 꺼낸 것이 그것이냐?”
황제가 실망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바마마!”
“그의 딸이 보육원에 들어간 것은 공주가 후원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어. 그는 그 이후로 딸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지.”
황제도 라울이 불법 시설에서 발각된 이후 모든 상황에 대해 조사를 명령해 보고를 받아보았다.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정보부에서 조사한 것이니 제 아들인 라울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필 그날, 그 순간에 나타난 것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제국의 그 정보부조차 칼리드나 벨리아가 일을 꾸몄다는 정황을 발견할 수 없었다.
“쯧.”
칼리드와 라울이 서로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드가 라울을 감시하기 위해 붙인 사람은 이번 일과 전혀 상관없었다.
“……그때 무언가 이야기가 오갔을지 모릅니다.”
“그땐 네가 불법 시설을 수사하던 도중이었다. 그때도 네가 도박장에 드나들었느냐?”
황제의 물음에 라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때는 정말로 도박에는 관심도 없었다. 우연히 지켜보게 된 것이 무척 흥미로워 잠깐 경험만 해본다는 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럼 공주가 네가 불법 도박장을 드나들 것을 예언이라도 해서 그자를 그곳에 미리 숨겨두었다고 할 참이냐?”
“…….”
답답했다.
무언가 뿌연 안개가 끼어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뭔가 숨겨진 일들이 있는데 그것이 도무지 드러나질 않았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네 잘못이다. 인정하거라.”
“……알겠습니다.”
“그러니 네 궁에서 당분간 근신하도록 하라.”
라울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한없이 무능력해 보였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살핀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혹시라도 신고했던 자를 죽이길 바라느냐? 그가 네 명성에 흠집을 내었다. 그러니 그 정도는 들어주마.”
황제의 잔혹한 말에 라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에겐 포상을 내려주십시오. 불법 시설을 신고한 자에겐 당연히 상을 주어야 합니다.”
“네가 온 세상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황제는 제 사랑하는 아들이 좋지 않은 일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언짢다는 얼굴로 말하는 황제의 말에도 라울은 차분히 대답했다.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죽였다고 사람들이 더 큰 소문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겐 마땅한 상금을 주십시오.”
라울의 간곡한 부탁에 황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신이 아끼는 아들의 어깨를 툭툭, 살짝 쳤다.
“우선 이 일은 내가 수습하마. 그러니 기다리고 있거라.”
라울은 이 상황이 치욕스러웠지만 알겠노라 대답하곤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벨리아와 칼리드는 궁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카지노에는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목적을 이뤘으니 더는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젠 더는 갈 수 없게 되었기도 하고.
“카지노가 문을 닫았다면서요?”
“그래. 황제부터 귀족 그리고 제국민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으니 더는 운영할 수는 없었겠지.”
“흐응. 아쉽네요.”
벨리아가 차를 홀짝, 마시며 전혀 아쉽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그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라울을 몰아넣는 건 어려울 뻔했어.”
“결국 접점을 찾지 못했나 보죠?”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쑤셔대며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내버려 두었어. 어차피 그 전의 일들을 이제 와 알아내긴 어려울 테니까.”
벨리아가 후원하는 보육원에 그가 아이를 맡기러 왔을 때, 그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정해준 카지노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자신들이 신호를 주면 불법 시설이 있다고 신고를 하라고. 어려운 요청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잘해주어서 다행이었어요.”
라울의 동선은 칼리드가 따로 부리는 사람들이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는 그저 신호를 확인하고 그날 신고만 하면 됐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가 무서워서 몸을 사렸다면 일이 어긋날 뻔했다.
당연히 차선책도 마련해 둔 상태였지만, 이 방법이 제일 깔끔했기에 부디 그가 약속을 지켜주길 바랐었다.
“그는 얼마 전 보육원에서 딸을 데리고 갔어요. 포상금도 넉넉하게 받은 모양이에요. 표정이 무척 좋았다더군요.”
“그런가. 다행이군.”
하지만 그가 용기를 내서 신고하러 경비대로 달려갔던 이유는 오로지 딸을 잘 챙겨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딸을 잘 돌봐주어 고맙다고 꼭 전해달라고 얘기했대요. 보육원에서 딸이 많이 웃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물론 벨리아는 그에게 테사 공작령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집과 금전을 대가로 쥐여 주었다.
하지만 그가 아이를 보살펴 준 것에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는 이야기에 벨리아의 마음이 찡, 울렸었다.
“라울이 늙은이보다 낫더군. 똑똑하게 움직였어.”
칼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잘한 일에는 포상을 준다.
쉬워 보이지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황제와 황자의 명예가 걸려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라도 황제가 그를 죽이려 한다면 칼리드가 그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주려 마음을 먹었었다. 그래서 미리 신고한 자의 주변에 자신의 사람들을 조금 풀어둔 상태였다.
“별일 없이 넘어갔으니 다행이죠.”
벨리아가 미소 지었다.
“이번 일은 황제가 나서서 수습할 모양이야.”
칼리드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기껏 그의 이름에 흠집을 내 볼까 했더니 황제가 나서서 무마하려 한다. 분명 무척 사소한 사건인 것처럼 넘어가게 될 것이다.
칼리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생한 것에 비해 성과가 작았다.
하지만 벨리아는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이전 삶에서도 황제가 수습했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예상했다.
물론 그땐 벨리아까지 나서서 완벽하게 은폐했지만, 이번엔 사건이 드러나 버렸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알려졌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요.”
그동안의 라울은 너무나도 미화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완전무결한 황자라니.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벨리아가 피식, 작게 실소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1황자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무조건 그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끼어들 작은 틈이 되어줄 거예요.”
벨리아가 좋아하는 구움 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더 고소하고 맛있었다.
“주방장이 바뀐 건 아니죠?”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칼리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왜? 맛이 없나?”
“아뇨. 오늘따라 더 맛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아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으응. 정말 맛있네.”
그리고 그런 벨리아를 다정히 바라보며 칼리드가 마주 웃음 지었다.
* * *
“공주님. 로니카 왕국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벨리아는 시녀가 알려준 소식에 서둘러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책상 위에는 가지런히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이건 클로제. 이건 오라버니……. 어마마마께 온 편지도 있네.’
하나하나 발신인을 확인하며 미소 짓던 벨리아가 마지막 편지를 들고 멈칫, 굳었다.
본인의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보내온 편지였지만 단번에 누군지 알아챘다.
‘……데릭.’
대체 뭘 하다가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건지.
그것도 로니카 왕국에서 보내는 편지에 껴서!
“후우…….”
벨리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빠른 손놀림으로 데릭의 편지를 가장 먼저 개봉했다.
[벨리아 공주님께.
……중략……
어머님의 병세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때 제게 제안해주셨던 것은 어머님이 완치된 이후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략……
그동안은 로니카 왕국에 계속 머물 예정입니다. 최근에 클로제 공주님께서 많이 챙겨주십니다. 모두 공주님이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부디 먼 타국에서도 건강하시길.
조만간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전해야 할 내용은 모두 전하면서도 혹시 누군가가 이 편지를 몰래 확인하더라도 의심스러울 수 있는 내용은 죄다 숨겼다.
게다가 표면적으로는 벨리아에게 후원받던 예술가인 척까지. 정보 길드장다운 철저함이었다.
벨리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편지에는 벨리아가 건네준 약이 효과가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실은 이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제국으로 오기 전 그와 약조한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완치된 이후에 셀론 후작가로 들어가겠다는 말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시간을 끌다 올 생각인 건지.
벨리아는 편지를 고이 접었다.
“흐음…….”
예상보다 그가 로니카 왕국에 오래 머물 것 같았다.
어째서 후작이 곧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느긋하게 움직이는 걸까.
“일단…….”
당장 후작가에 사생아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넣으라고 답장에 적어야겠다.
그리고 언제 가문으로 들어가 후계자 교육을 받을지 합의를 해두라고 해야지.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정말로 후작이 다 죽고 난 이후에도 제국에 오지 않을까 싶어 조금 불안해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데릭이라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 없었지만, 더욱 확실하게 해두면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머지 편지들도 하나씩 열어 확인하였다.
“아하하.”
역시나 헤럴드의 편지에는 엄청난 걱정과 안부가 들어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쓴 오라버니의 모습이 그려져 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여튼 오라버니도 참.”
밥을 잘 먹는지 궁금해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음식의 간이 제대로 돼 있는지, 채소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등 별 사소한 것을 다 적어두었다. 그게 너무나도 헤럴드다워 벨리아는 웃으며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는 간결했지만, 그 안에 묻어 있는 걱정과 애정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놓칠 수 없었던 정보가 짧게 적혀 있었다.
‘예하께서 정말로 제국에 방문할 거라고……?’
황제와 황비를 도발하기 위해 꺼냈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다니.
신국의 대신관이 벨리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보고선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빈말로 그저 꺼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이전 삶에서 라울과 결혼했을 때엔 초대장을 보냈지만 끝내 오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마마마께서도 오시겠다니…….”
딸의 결혼식도 볼 겸, 아버지도 만날 겸 제국으로 오겠다니.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뀌어버린 거지?
벨리아는 혼란스러웠다.
알고 있던 미래와 달라진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뭐부터 바뀌었다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칼리드와 상의해 봐야겠다.’
이젠 무슨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를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 칼리드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벨리아가 내심 깜짝 놀랐다.
정말로 그가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물론 아직 결혼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곧 할 건데 뭐.’
그렇게 생각하며 벨리아는 피식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