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네가 꾸민 일이지? (51/88)


#51. 네가 꾸민 일이지?
2023.04.25.


결연하게 내뱉은 그 말에 칼리드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그대 못지않게 무척 즐거운 것 같아.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라울이 내심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던 2황자에게 손도 못 쓰고 당하다니.

그건 너무나도 우스운 그림이었다.


“오늘 그대는 놀라는 표정만 잘 지어주면 돼.”

“그거야 자신 있죠.”

벨리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라울 녀석이 그곳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움직인 거니 분명 그쪽에서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그동안 자신들의 방문 시간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비정기적으로 카지노를 방문했었다.

그러고는 라울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둘만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다 돌아왔다.

그가 방심할 단 하루를 위해서.


“……녀석은 점점 경계가 흩어졌고, 오늘 그곳으로 향했어. 우리가 덫을 놓은 줄도 모르고.”

라울은 오늘 자신들이 수도 외곽에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는 보고까지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안심했겠지.

칼리드가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여기저기에 소문을 낼 놈들도 몇 넣어두었으니 죄다 입막음하긴 어려울 거야.”

벨리아는 자꾸만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차는 빠르게 달리다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럼 축제의 현장으로 가볼까?”

칼리드가 마차 밖으로 나가며 벨리아에게 멋있게 손을 내밀었다.

벨리아는 그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평소와 다름없는 밝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화려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짓인가!”

“잠깐! 이것 좀 놓고……!”

예상했던 대로 내부는 온통 난장판이 벌어진 상태였다.

몇몇 사람들이 경비대에게 연행되어 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그때 관리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안으로 들어서려는 칼리드와 벨리아를 막아섰다.


“오늘은, 오늘은 입장이 안 됩니다.”

“음? 무슨 일이 있나요?”

벨리아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관리자는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칼리드는 관리자를 밀치곤 안으로 들어섰다. 벨리아도 빠르게 그를 뒤따랐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곳을 지나쳐 미리 조사했던 내부 깊숙한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경비대와 술에 취한 라울이 마주 보고 있었다.


“전하. 어서 자리를…….”

경비대는 불법 시설 단속을 관리하는 최종 관리자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라울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다 놀란 표정의 벨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벨리아는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최대한 놀란 것처럼, 어머, 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라울이 그런 벨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칼리드를 발견하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을 누가 만들어 냈는지 직감으로 깨달은 것처럼.


“너였구나……. 그래, 너였어…….”

라울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칼리드를 향해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쿡, 찌르며 물었다.


“네가 꾸민 일이지? 그렇지?”

“의심은 적당히 하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얘기나 해.”

칼리드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라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라울이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네가……!”

하지만 이내 소리를 삼켜내곤 고개를 떨궜다.

……이번에도 졌다. 또다시 칼리드가 만들어둔 덫에 걸려든 거다.

라울이 쥐고 있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라울 황자 전하. 대체 이게 무슨…….”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묻는 벨리아의 목소리가 가련하게 떨렸다.

라울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깊은숨을 뱉어내곤 침착하게 물었다.


“벨리아. 정말 그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까?”

“저흰 지금 막 도착했어요. 내부가 어수선하길래 와 본 건데……. 대체 왜 여기에…….”

라울은 벨리아의 대답에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와 무슨 반응을 보이겠나.

어찌 되었건 이건 변명할 나위 없는 자신의 실수였다.


“……그렇습니까.”

라울이 씁쓸하게 대답하고는 곁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경비대를 향해 말했다.


“마무리하고 오도록. 나는 경비대에 가 있겠네.”

“……전하.”

“어쨌든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나머진 가서 이야기하지.”

이미 여러 귀족들을 포함해 칼리드와 벨리아까지 자신을 목격해버렸다.

그러니 이 상황을 아예 없던 일로 무마하기엔 늦었다.


‘다른 방법으로 수습해야 해.’

라울이 저벅저벅 방을 걸어 나갔다.

카지노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걸음에 맞춰 길을 열어주었다.

벨리아와 칼리드는 라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끝까지 떼지 않았다.

라울이 건물을 빠져나가고 경비대가 불법 시설을 정리할 때까지 그들은 안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라울에 대한 이야기가 작게 흘러들어왔다.


“칼리드.”

“그래.”

“이만 나가요.”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고 카지노 건물의 출입이 통제될 무렵,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에 섞여 벨리아와 칼리드도 마차에 올라탔다.


“정말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큰일 날 뻔했어요. 이번 일은 너무 위험했어요.”

거의 운에 맡긴 수준이었다.

사전 준비를 미리 하기는 했지만, 타이밍이 안 맞았다면 허탕만 칠 뻔하지 않았나.


“아슬아슬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라울을 몰아넣을 수 없었을 거야.”

그 말에는 벨리아도 동의했다.

지금도 라울은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오로지 그의 심증만으로는 자신들을 몰아세울 수 없으리라.

일부러 몇 번이고 이곳을 방문해 의심을 없애는 작업을 했던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귀찮을 만도 했지만, 아직 벨리아와 칼리드는 라울에 비해 힘이 없었다.

그러니 차근차근 함정을 만들어나가는 수밖에.

벨리아는 자꾸만 둥글게 변해버리는 자신의 의지를 뾰족하게 갈아내었다.


“내일이면 수도 전체에 소문이 퍼지겠지. 아무리 라울이라도 빠져나가긴 어려워.”

“하지만 다음은 더 안전하게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벨리아가 칼리드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그래도 오늘 수고했어요.”

그런 벨리아를 잠시 바라보던 칼리드가 피식 웃어버리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 *

황제 직속 친위대 소속의 기사가 직접 찾아와 황제의 명을 읊었다.

그에 라울이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기사는 조금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다시 한번 황제의 명을 말했다.


“……폐하께서 근신을 명하셨습니다.”

“하!”

라울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넘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를 뵈러 가겠다.”

“전하.”

방을 나서려는 라울의 앞을 기사가 막아섰다.

라울이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참아내며 말했다.


“비켜. 폐하께 설명해야 할 게 있으니.”

라울은 기사의 어깨를 밀치고 방을 나섰다.

기사는 라울을 완벽하게 막아서진 못했다. 황제가 1황자에게 근신을 명하긴 했으나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던진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울이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며 이를 빠득 갈았다.


‘칼리드!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칼리드가 이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를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못내 분했던 라울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는 적막했다.

오로지 라울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워 울렸다.

이윽고 황제의 집무실 앞.

라울은 문을 마주 보고 그 곁에 서 있는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폐하. 1황자 전하가 알현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커다란 문 너머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간 그렇게 서 있었을까.


“들어오라 하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장이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라울이 직접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는 라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짜증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네게 근신을 명했거늘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아바마마.”

“이번 일은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내 그리 널 칭찬했건만……!”

라울이 불법 시설의 수색을 아주 완벽하게 수행해내었다고 여기저기 그렇게 자랑해 대었는데, 정작 이놈이 거기서 놀고 있었을 줄이야.

황제는 창피해서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끄응. 되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다. 넌 네 궁으로 돌아가 근신토록 하라.”

황제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라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리 말씀드리면 제 꼴이 더 우스워질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 칼리드가 꾸민 일입니다.”

“그 녀석이 무슨 수로? 네놈이 그곳에 가도록 칼리드가 유인이라도 했느냐?”

황제가 물었다.


“상황에 대한 보고는 받으셨을 줄로 압니다.”

라울은 그날의 상황을 설명했다.

경비대가 카지노를 수색하던 그 순간, 칼리드와 벨리아가 그곳에 방문하였노라고.

하필 그날, 그 순간 그곳에 온 것이 수상하다고.


“그래서 증거는 있느냐?”

“…….”

“모자란 놈! 증거도 없이 몰아가서 뭘 어쩌겠다는 게냐!”

라울은 그게 더없이 짜증이 났다.

대체 증거가 왜 나오지 않느냔 말이다!


“……신고한 자는 확인해 봤느냐?”

황제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딸아이가 하나 있고, 카지노에 들어와 일한 것은 몇 달 되었다고 합니다.”

“칼리드와 그가 만난 적이 있다 하더냐?”

“……그것이 이상합니다.”

칼리드가 카지노에 등장했을 때, 분명 누군가와 만났다거나 일을 지시한 정황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칼리드는 카지노에 와서 정말로 벨리아와 놀기만 했다.

따로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개방적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그대로 돌아가곤 했다. 종업원은 고사하고 귀족들과도 딱히 어울리지 않았다.

칼리드를 감시하고 있는 자들에게 받은 보고서에도 특별한 움직임은 드러나지 않았었다.

라울은 칼리드가 도대체 언제 일을 꾸몄는지 짐작되지도 않았다.


“이상하긴 뭘 이상해!”

황제가 답답했는지 다시 호통쳤다.


“네가 수사를 시작한 시점에 이미 그는 종업원으로 취업한 상황이었다.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다시 데려오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장이었지.”

황제도 이미 신고자에 대해 조사를 마친 후였기에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쯧쯧. 그렇다면 칼리드가 그 사람을 조종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상황이 교묘하지 않습니까!”

라울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하지만 황제는 더없이 차가웠다.


“네 심증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가져오거라. 지금 네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고자는 카지노 건물에서 숙식까지 해결하며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 자였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했을 때, 그는 딸을 다시 데려올 돈을 모으겠다고 정말 악착같이 일했다고 한다.

가끔 다른 사람에게 딸의 근황을 듣긴 했지만, 카지노 안에서는 누군가를 만날 틈도 없이 열심히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경비대는 라울이 데리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도 신고를 받고 달려왔을 뿐, 그곳에서 자신의 상관을 발견하곤 무척이나 당황하는 눈치였다.


‘신고자도 아니고 경비대도 아니라면 대체……!’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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