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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놀러 온 거 아니잖아요. (49/88)


#49. 놀러 온 거 아니잖아요.
2023.04.18.


칼리드가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카드를 확인했다. 그러곤 한 장의 카드를 오픈했다. 이후 추가로 나눠준 카드까지 확인하고는 배팅을 걸었다.

게임에 참가한 모두가 지기 싫다는 듯 칼리드를 따라 배팅했다.


“호오?”

“전하께선 오랜만에 오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직 감을 못 찾으셨을 텐데요.”

한 참가자가 칼리드를 향해 도발했다. 그 어쭙잖은 도발에 칼리드가 비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콜.”

누군가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모두 한마디씩 꺼냈다.


“콜.”

“폴드.”

칩이 테이블에 계속 쌓여갔다.

잠시 후 딜러가 그들의 대화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카드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흠.”

곳곳에서 침음이 들려왔다.

또다시 처음 듣는 용어들이 쏟아지고 테이블 위에는 칩이 계속해서 쌓였다.

벨리아는 눈을 끔벅이며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몇 번의 같은 과정이 반복되고 게임이 마무리되며 엄청난 양의 칩이 수북이 쌓였을 때 즈음, 남아 있는 자들이 각자의 패를 공개했다.


“투 페어.”

“패가 좋지 않군요. 스트레이트.”

“풀하우스. 하하하.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봅니다, 전하?”

한 남자가 웃으며 칩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칼리드가 자신의 패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군……. 오늘은 운이 좋지 않은 날이야. 고작 포카드라니.”

칼리드가 씨익 웃으며 관리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가 테이블 위의 칩을 쓸어 담았다.

벨리아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대충 칼리드가 이긴 것 같았다. 그래서 어색하게 함께 박수를 치고 있는데, 그런 그녀를 본 칼리드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른 데도 구경해볼래?”

“네!”

벨리아는 룰이 어떤지, 게임이 무엇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어쩐지 조금 재밌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상기된 벨리아의 표정에 칼리드가 칩을 챙기곤 근처에 있는 다른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여긴 뭐예요?”

“이번엔 직접 참여해 봐.”

그 말에 벨리아가 깜짝 놀라 당황한 것을 숨기지도 않은 채 말했다.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어렵지 않아.”

칼리드가 다정하게 설명했다.


“그대는 룰을 모르니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딜러가 주사위 세 개를 돌릴 거야. 그 주사위의 합이 11보다 큰 쪽 혹은 작은 쪽에 걸어볼 수 있어. 그리고 숫자의 합이 짝수일지 홀수일지 걸어볼 수도 있지. 이건 쉽지?”

“으음. 그냥 숫자를 찍어서 걸어보는 거네요?”

“맞아. 그러니 그대도 할 수 있어.”

곧이어 칼리드가 벨리아가 참가함을 선언했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벨리아는 고민하다 짝수와 11보다 큰 쪽에 걸어보았다.

결과는 홀수, 11보다 큰 쪽이었다.


“아…….”

벨리아의 입에서 아쉬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큭큭. 절반을 잃고 절반을 얻어왔으니 결국 원점이지?”

칼리드가 웃으며 벨리아에게 칩을 더 건네주었다.

벨리아는 의지를 다지며 다시 주사위에 집중했다.

주사위가 데굴데굴 굴러갈 때마다 벨리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거렸다.
 

 
칼리드는 그런 벨리아가 귀여워서 웃음이 자꾸만 실실 새어 나왔다.

벨리아는 어떨 때는 이득을 봤다가 어떨 때는 모두 잃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수중에 남은 칩이 하나도 없었다.


“……아?”

정신없이 집중하다 텅 비어버린 손을 깨달은 벨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칼리드가 곁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그런 그녀를 구경하고 있었다.


“재밌었지?”

벨리아는 차마 아니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정말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이래서 도박에 중독되는 거구나…….’

직접 경험해보니 새로운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여기까지 온 목적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다른 곳에 이렇게 정신이 팔리다니!

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 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칼리드의 손을 붙잡고 그곳을 벗어났다.


“하하하.”

벨리아가 왜 그러는지 눈치 챈 칼리드가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처음에 안내받았던 휴게실에 들어가 잠시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킨 벨리아가 말했다.


“이제 뭘 하면 되죠?”

곧바로 숨겨진 방으로 쳐들어가나요? 경비대는요?

내용이 내용인지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칼리드는 전부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방을 나섰다.


“어어?!”

카지노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 반대쪽 출입구로.


“잠시만……!”

“그대가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이게 무슨?!

벨리아는 한껏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칼리드가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그렇게 얼떨결에 카지노를 나와 미리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탄 벨리아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럼.”

마차는 미련 없이 황궁으로 향했다.

벨리아는 이게 무슨 일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놀기만 하다가 돌아가다니.


“지금 라울이 안에 있어요! 그런데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그냥 간다고요? 분명 이제부터 우리를 경계할 거예요.”

라울이 불법 도박장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문한 거였으니 당연히 그를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리드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곳에서 눈도장만 찍고 나오는 것을 선택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마차에 앉아 있는 그의 태도는 평온했다.


“상관없어. 앞으로도 종종 들를 거니까.”

“……모르겠어요.”

대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까 곧바로 붙잡으면 되는 게 아니었나?

칼리드가 웃으며 벨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 라울을 붙잡아도 분명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낼 거야. 가령 우리가 모함을 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

있을 법한 가정을 들며 말하는 칼리드에게 벨리아가 놀라 반문했다.


“그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한 건데도요?”

현장을 잡았는데 왜 우리가 뒤집어쓴단 말인가.

벨리아는 확실한 물증이 있는데 어째서 그리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지노에 처음 방문한 날 우연히 불법 도박 시설을 발견했고, 그곳에 있는 라울과 마주쳤다? 누가 봐도 우리가 의심스럽겠지.”

칼리드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벨리아는 알고 있는 것들이 많고 무척 현명했지만, 이런 뒷공작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속이고 모함할 수 있는지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음모를 꾸밀 때는 벨리아가 아닌 칼리드가 나서야 했다.


“불법 시설을 이용한 건 2황자와 그의 비이며, 자신은 불법 시설을 추가로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던 거였다고 한다면? 불법 시설을 운영하는 자들이나 함께 있던 사람들의 입을 막는 건 어렵지 않을 거고, 다른 사람들은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그의 말을 믿겠지. 애초에 우리가 모습을 드러낸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

게다가 만약 혐의가 반대로 씌워졌을 경우, 라울이 불법 시설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변명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수였으니까.

확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증거도 없었을뿐더러 자신의 죄를 변명한다는 욕만 들을 게 분명하다.

이미 불법 시설을 조사하고 모두 없앤 것으로 큰 공을 세운 라울을 황제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으니 모든 여론은 1황자에게 향할 것이 뻔했다.

벨리아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대놓고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어. 이건 그대가 여러 사건을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해.”

그의 말을 이해한 벨리아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언젠가 마음을 놓고 다시 드나드는 순간이 있을 거야. 우린 그때, 완벽하게 녀석이 빠져나가지 못할 덫을 놓는 거지. 덤으로 데이트도 하고.”

“그렇지만 오늘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분명 라울이 우릴 의심할 거예요.”

벨리아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칼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괜찮아. 그대가 오늘 무척이나 즐겁게 즐겨준 덕분에 걱정은 한시름 놨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벨리아가 처음으로 게임을 접하고 무척이나 재밌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게 라울을 붙잡을 결정적인 순간, ‘우연히 발견했다’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아아…….’

벨리아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칼리드가 어째서 자신에게 게임을 시켰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신나서는…….


“미리 얘기해 주지 그랬어요…….”

그럼 좀 덜 창피했으려나.

벨리아가 팔락팔락 열심히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열이 오른 얼굴을 식혔다.


“그대가 재밌어하는 게 귀여워서.”

“그냥 당신이 해보라고 하니까 열심히 한 것뿐이거든요?”

벨리아가 볼을 부풀렸다.

칼리드는 몸을 의자 등받이로 기대며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 사람을 심어두었어. 그가 계속 상황을 알려줄 거야.”

그리고 이미 신고할 자도 따로 있었다.


“……당신이 갑자기 조금 달라보여요.”

“뭐?”

그야…….

최근에는 자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나.


“흠. 어떤 쪽으로 달라보이지?”

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겨우 식었던 얼굴이 또다시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 멋있나? 아님, 반할 것 같은가?”

칼리드가 벨리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그의 눈이 반달처럼 예쁘게 휘어 있었다.

이건 늘 보여주던 모습이었다.


“저리 가요.”

벨리아가 칼리드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오히려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내가 어떤데? 말해 봐, 벨리아.”

“…….”

“이번엔 정말 내게 반했다고 얘기해 봐. 응?”

벨리아는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얘기하는 건 조금 더 나중에.

아직은 그와 마음을 나누는 것보다 라울에게 복수하는 게 더 우선이었으니까.


“벨리아. 나 좀 봐.”

게다가 지금 이런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다간,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질지 모른다. 벨리아는 자신이 복수도 잊어버리고 그에게 빠져버릴까 봐 무서웠다.


‘……나중에.’

나중에 라울을 무너뜨릴 때, 그때 얘기하자.

벨리아는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심을 잘 잡고 나아가야 할 때였다.


“……봤어요. 왜요.”

벨리아가 샐쭉한 표정으로 말하자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러곤 다시 와락 벨리아를 안았다.


“그대가 내게 흔들리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그게 자꾸 벅차서 이리 재촉하더라도 이해해줘.”

칼리드가 벨리아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벨리아는 결국 한숨을 작게 내쉬곤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이 순간 다른 어떤 말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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