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의 약혼식
(48/88)
48. 그의 약혼식
(48/88)
#48. 그의 약혼식
2023.04.15.
제국이 서방의 패자로 서쪽의 다른 국가들과 교류를 맺듯, 로니카 왕국의 영향력 또한 여전히 탄탄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벨리아가 슬쩍 황비를 쳐다보았다.
입가에 애써 미소를 걸고 있었으나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래. 분하겠지.
로니카 왕국의 그 모든 것이 제 아들의 것이 될 뻔했는데 눈앞에서 모두 빼앗겼다고 생각할 테니까.
“폐하. 곧 오늘의 주인공들이 입장할 시간입니다.”
“아아. 그렇지.”
황비의 말에 황제가 다시 몸을 식장을 향해 돌렸다.
벨리아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여기서 더 심기를 건드렸다가 괜히 관심이 쏠려서 행동에 제약이 가해질 수 있으니까.
칼리드가 벨리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치 잘했다고 얘기하는 듯했다.
‘흥. 칼리드를 무시하는 태도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벨리아가 후련한 표정으로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악단의 연주 소리와 함께 라울과 엘린이 꽃으로 장식된 길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화려하게 꾸민 엘린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함께 걷는 라울이 그런 엘린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더없이 행복하게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벨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전부 가면 쓴 얼굴…….’
언뜻 다정해 보이는 그 태도가 모두 가짜라는 걸 빤히 알고 있는데.
게다가 그런 연기를 하는 중간에도 라울은 상석에 앉아 있는 벨리아를 찾았다. 그건 제 곁에 서 있는 칸테리프 공녀에게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벨리아가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 라울을 선택한 것 또한 공녀 본인이었으니까.
“정말 예쁜 연인이네요.”
벨리아는 오늘의 주인공인 라울과 엘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척 화사하게 웃으며 칼리드의 어깨에 보란 듯이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고는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라울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난 네 연인이 아니야.’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음에도 그의 흔들리는 눈빛이 선명하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손을 붙잡고 함께 꽃길을 걸어가고 있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그는 벨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짜증 나.’
자기가 뭐라고.
마치 자신의 뭐라도 되는 사람이었던 양.
그 꼴이 우스워 벨리아가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렸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라울과 특별한 감정을 나눈 적이 없다. 돌아온 시기도 벨리아가 라울에게 빠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실제로 라울과는 그 어떤 사이도 아니었다.
굳이 어떤 관계라고 정의 내려야 한다면 과거에 청혼했던 사람, 혹은 약혼자의 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
‘고작 그 정도의 관계인데…….’
어째서 자꾸만 옛 연인을 바라보듯이 자신을 보는가.
대체 왜 칼리드에게 자신을 빼앗긴 것처럼 분해하는가.
“……그댈 보고 있어.”
칼리드가 아주 작은 소리로 벨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 풀풀 넘쳤다.
“상관없어요.”
벨리아는 일부러 칼리드에게 다정하게 붙어 라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
라울이 걸음을 멈추고 벨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던 엘린도 그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눈치 채고는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전하.”
엘린의 부름에 라울이 고개를 돌린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라울은 칼리드의 곁에 벨리아가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했던 상대였기에 진심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벨리아가 자신을 밀어내고 칼리드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원래 내 거였어.’
벨리아를 향한 집착 어린 기이한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린 라울의 눈동자에서 고요하게 새어 나왔다.
라울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라울의 곁에서 엘린의 마음은 바닥에 내팽개쳐져 구겨졌다.
이렇게나 떨어져 있는데도, 벨리아는 라울을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어렸을 때부터 늘 바라왔던 그와의 약혼이었으나 이 순간만은 더없이 비참했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의 주인공들에게 축복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들의 표정은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그들의 등 뒤를 보고 있을 하객들은 그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라울과 엘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된 벨리아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들이 지금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벨리아는 라울이 더없이 처참한 기분으로 약혼식을 진행하길 바랐다.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었지.’
벨리아가 진심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불행을 축복하는 박수를 건넸다.
* * *
“이건 너무 티 나지 않아요?”
벨리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칼리드에게 물었다.
누구든 한 번쯤 돌아볼 만한 화려한 차림새가 아닌가.
“아냐. 이 정도는 해야 오히려 의심을 안 하지.”
칼리드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대답했다.
그 곁에서 벨리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살폈다.
“예쁜데 뭘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에 잘 안 띄는 옷으로 갈아입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벨리아와 칼리드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채 카지노 앞에서 실랑이하는 중이었다.
라울이 유일하게 남겨둔 불법 시설이 숨겨진 곳.
바로 이 카지노가 그곳이었다.
“오히려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게 의심을 피할 수 있어, 벨리아.”
“하지만…….”
벨리아가 계속 망설이자 칼리드가 벨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 말고 나만 믿어, 공주님. 어차피 오늘은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그대는 그저 즐기기만 하면 돼.”
그렇게 어어, 하는 사이 벨리아는 칼리드에게 등을 떠밀려 어느새 카지노의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칼리드 전하. 벨리아 공주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설의 관리자가 그들을 따로 마련된 방으로 안내했다. 벨리아는 한숨을 내쉬곤 그를 따라 더 안으로 들어갔다.
카지노의 내부는 생각보다 쾌적했다. 뭔가 도박에 찌들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오히려 깔끔하고 산뜻한 분위기였다.
“일반 사교장이랑 별다를 게 없네요?”
“맞아. 그냥 평범한 게임들이 몇 개 추가되었다는 정도지.”
유흥과 관련된 곳은 처음 와보는 벨리아였기에 무척 신기한 기분이었다.
곳곳에 놓인 테이블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편하게 앉아 차나 술을 놓고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쪽에는 다양한 게임들을 즐길 수 있도록 테이블마다 게임을 진행하는 딜러들이 서서 도움을 주고 있었다.
화려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전하와 공주님께서 머무실 방은 이곳입니다.”
관리인이 안내한 방은 휴게실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았다. 이곳도 무척 넓고 쾌적했다. 무도회가 있을 때 중간중간 쉴 수 있도록 휴게실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용도인 듯했다.
이곳도 사교를 위해 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쉬고 싶으면 각자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벨리아는 자연스럽게 주문까지 마치는 칼리드를 보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와 본 적 있어요?”
“뭐……. 몇 번?”
“누구랑요?”
칼리드는 대답을 피하며 하하 웃었다.
보아하니 한두 번 와본 게 아닌 눈치였다.
벨리아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한 번 더 물었다.
“누구랑 왔는데요?”
“하하. 벨리아.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건가?”
벨리아는 아차 싶은 마음에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질투라니! 어쩐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당신이 이곳에 왜 왔을지 궁금해서 그렇죠.”
“할 일 없는 2황자가 뭘 했겠어. 그냥 여기저기 놀러 다녔지.”
칼리드는 평소처럼 자신을 낮추며 대답을 피했다.
그에 벨리아가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제가 알면 안 되는 뭔가가 있었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대충 넘기려던 칼리드가 벨리아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냥 술이나 좀 마시고, 게임 하고, 억지로 치켜세워주는 얘기나 듣고 그랬던 것뿐이야.”
정말 별거 없지? 하며 칼리드가 벨리아를 슬쩍 껴안았다. 하지만 벨리아는 그런 칼리드의 손을 빠르게 쳐냈다.
“정말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 한량 같은 이미지를 유지해야 감시가 덜하니까.”
그의 대답에 빠르게 수긍했지만, 벨리아는 괜히 게슴츠레한 눈으로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난감해하던 칼리드가 갑자기 벨리아의 허리를 와락 껴안으며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꺅! 뭐 하는 거예요!”
“하하하.”
“칼리드!”
“그대는 점점 더 사랑스러워져.”
칼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입맞춤을 계속 이어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 벨리아가 몇 번 부질없는 반항을 해 보다 결국 그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
드르륵.
무언가 바퀴가 끌리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아까 나갔던 관리자가 음료를 가지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예상이 적중했는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벨리아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칼리드!”
콩콩.
벨리아가 칼리드의 팔을 쳤다.
하지만 칼리드는 부끄러움도 없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관리자에게 말했다.
“놓고 나가. 방해하지 말고.”
“예.”
관리자는 정중히 인사하고는 음료들이 놓인 트레이를 테이블 곁에 두곤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럼 하던 걸 마저 하도록 할까?”
“뭘 하던 걸 마저 해요! 정말!”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진짜.
벨리아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날 이리 안달 나게 만들고선 너무하는 거 아닌가?”
뭐래!
“우리 놀러 온 거 아니잖아요.”
“놀러 온 거 맞는데?”
칼리드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벨리아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린 채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또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 일단 나가지.”
벨리아는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라울을 잡으러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벨리아의 손을 붙잡고 칼리드가 방을 나섰다.
“어어?”
“쉿. 그냥 따라와.”
그렇게 얼떨결에 홀에 내려가게 된 벨리아는 주변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오랜만입니다, 칼리드 황자 전하.”
그들이 홀로 내려가자 몇몇 사람들이 아는 척을 하며 인사했다.
벨리아가 찌릿, 칼리드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그러나 칼리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곤 벨리아를 데리고 한 테이블에 앉았다.
카드 게임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거 할 줄 알아요?”
“적당히?”
“흐응? 잘하는 건 아닌가 봐요?”
벨리아가 슬쩍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자 칼리드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아났다.
“보면 알겠지.”
칼리드는 조용히 게임에 참가함을 선언했다.
그러곤 그는 관리자에게 주머니를 건네며 모두 칩으로 바꿔달라 요구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근처로 모여들었다. 2황자와 벨리아 공주의 등장부터 이미 시선이 집중되었었는데, 그들이 게임에 참가한다니 더욱 관심이 쏠렸다.
“카드를 나누겠습니다.”
딜러의 말에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가 섞이는 소리가 멈추고 딜러가 카드를 세 장씩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앞으로 놓아주었다.
‘신기해…….’
처음 보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벨리아는 처음에 걱정했던 모습과는 달리 점점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들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