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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그러니 적당히 무시해. (47/88)


#47. 그러니 적당히 무시해.
2023.04.11.



“왜 울지?”

“…….”

“벨리아.”

자리에서 일어나 벨리아를 바라본 칼리드가 눈물을 닦아주며 더없이 다정하게 물었다.

벨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뻗어 칼리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흠. 내가 불쌍한가?”

칼리드가 미소를 지으며 벨리아를 일으켜 마주 안았다.


“벨리아.”

벨리아가 칼리드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내쉬었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감정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 벨리아를 전혀 모르는 칼리드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키스해도 돼?”

벨리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엉엉 운 건 아니었지만, 눈물범벅이라 지금은 못났을 텐데. 갑자기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 무척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안 돼?”

벨리아는 여전히 목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드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벨리아를 아이를 안듯 품에 안고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칼리드.”

“응.”

“황위는 당신 거예요.”

벨리아는 진심이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칼리드가 벨리아의 머리에 쪽쪽,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여기서 자고 갈까?”

은근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벨리아는 슥슥,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닦아내곤 답했다.


“아뇨.”

자신에게 이토록 애정을 쏟아붓는 그를 위해서도. 그를 사랑하게 된 자신을 위해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우린 행복해 질 거야.’

이번 삶에서는 반드시.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눈동자 속에서 그녀의 결연한 의지가 반짝였다.


“돌아가야죠. 우리의 전쟁터로.”

그가 잃은 것들과 마땅히 그의 것이어야 하는 모든 걸, 벨리아는 하나하나 그의 손에 쥐여 줄 작정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된 자신 또한.

* * *

오늘은 라울과 칸테리프 공녀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벨리아는 어두운 보라 계열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밖으로 나섰다. 약혼식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벨리아.”

칼리드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손을 내밀었다.

벨리아는 싱긋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결국 결혼식은 내년 가을에 하기로 했다더군.”

“그렇겠죠. 황제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진심으로 우리의 결혼을 미루려고 했겠어요?”

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기를 좀 죽이고 싶었나 봐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황비의 닦달이 아니고서도 칼리드가 라울을 제치고 여러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았다.


“그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에요.”

벨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황제가 이쪽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곧 견제가 들어올 것이다.


“몸을 사린다고 사렸는데도 영 거슬리나 보죠?”

“그 늙은이야 그대와 내가 약혼한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겠지.”

한껏 냉소적인 말투였다.

칼리드는 황제에 대해서 더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는지 굳어버린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 그렇지. 지난번 그대가 얘기했던 곳에 상단의 이름으로 투자를 진행했어.”

“남부지방 와이너리 말이죠?”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가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은 두고두고 회자될 명작이 될 거예요.”

올해 생산될 와인은 나중에 없어서 못 파는 고급 와인이 될 것이다.

몇 년 뒤 귀족들이 이 와인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로 권력을 과시할 정도였으니.


‘알고 있는데 지나칠 순 없지.’

벨리아는 눈에 빤히 보이는 이득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긴 너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수를 쓴 게 칼리드의 상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의 상단을 통해 올해 생산할 와인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매입하기로 계약을 성사시켰다.


 


“엄청난 이득이 될 테니 두고 봐요.”

“안 그래도 사전 답사를 다녀온 상단주가 무척 기대된다고 하더군. 올해 포도가 무척 좋다고.”

이런 큼직한 일들은 이전 삶의 기억대로 흘러가 1황자 측을 과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야금야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대의 말이라면 당연히 신뢰할 수밖에.”

확실히 칼리드는 벨리아의 말대로 진행한 일에서 이익을 얻은 게 많았다.

특히 금전적으로 이득을 많이 보았기에 이번 투자 건에 대해 듣자마자 상단에 연락해 곧바로 진행시켰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상단주는 당황했지만, 실제 와이너리에 방문한 그는 굉장히 만족했고 무척 기대된다는 답변을 돌려주었다. 게다가 도대체 누가 이런 소식을 전해주는 거냐고 궁금해하기까지 했다.


“상단주가 그대를 만나고 싶어 해.”

“저는 좋아요.”

벨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라면 전부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테사 공작도 한번 만나봐야 하는데…….’

벨리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칼리드의 팔을 톡톡 치며 물었다.


“우리 결혼식에 테사 공작이 오나요?”

“할아버님? 당연히 오셔서 하나뿐인 손자의 기를 좀 살려주셔야지.”

“나중에 날을 잡아서 공작령에 한번 갔다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긍정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할아버님이라면 그대를 언제든 환영하실 거야.”

“그렇담 다행이고요.”

테사 공작과는 앞으로 계속 여러 일에 엮이게 될 테니, 반드시 만나서 확인해야 했다.

그가 정말로 칼리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혹은.


‘……그 또한 칼리드를 이용하는 자인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약혼식이 진행되는 홀에 도착했다.

벨리아와 칼리드는 미리 지정된 곳에 착석했다.

근처에 앉아 있던 황비가 곁눈질로 칼리드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리며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구나, 칼리드.”

하지만 칼리드는 딱딱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답을 던졌다.


“그렇군요.”

“그 뻣뻣한 태도는 변함이 없구나.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만, 그래도 형의 약혼식인데 조금은 웃으며 대해주지 않겠니?”

황비가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그린 채 말했다.

그녀의 태도는 우아했고, 더없이 다정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한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벨리아 공주도 그때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네. 황비 전하.”

“종종 내 궁에 들러요. 담소라도 나누면 좋겠군요. 다음에 칸테리프 공녀와 함께 자리를 마련해보지요.”

썩 반갑지 않은 초대였다.

하지만 벨리아는 황비와 마찬가지로 싱긋 웃으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초대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언제나 그녀의 자세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황비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 이리 챙기는 게지.”

곁에서 지켜보던 황제까지 한마디 보태었다.

칼리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흠…….’

황제의 못마땅한 시선이 칼리드를 스치는 순간을 목격한 벨리아의 입꼬리가 떨렸다. 심지어 황제는 칼리드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짜증 나는데 깽판을 쳐? 말아?

벨리아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사람 좋은 것처럼 웃으며 칼리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곤 칼리드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던 황제를 가만히 지켜보다 나직이 말했다.


“칼리드. 그러고 보니 우리 약혼했을 때 생각나지 않아요?”

벨리아의 부름에 칼리드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시선을 맞춰왔다.

티를 내고 있진 않지만, 아마 황제와 황비도 이쪽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벨리아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로니카 왕국에서 약혼했을 때, 사제님들이 꽃비를 내려줬었잖아요.”

그녀가 무슨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 단박에 파악했는지 칼리드가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신국에서 온 사제들 말인가?”

“네. 예하께서 직접 선물과 함께 사절단을 보내주셨죠.”

벨리아의 엄마이자, 로니카 왕국의 왕비인 그녀는 신국에서 제사를 주관하던 신녀였다.

그것도 신국에서 가장 귀한 핏줄로, 현 신국을 다스리는 다섯 대신관 중 하나의 딸이었다.

신국과 제국의 체계가 달랐기에 정확히 어떤 위치라고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굳이 따지자면 황녀와 비슷한 지위라고 볼 수 있었다.

벨리아는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그리고 그런 자신이 누구를 선택했는지를.


“예하께서 결혼식에 참석하시겠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정말로 대신관께서 제국에 방문하겠다고 하셨느냐?”

벨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 황제가 다급하게 물었다.

무척 폐쇄적인 신국이었기에, 대신관이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런데 대신관이 제국에서 열릴 결혼식에 직접 방문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으니 황제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벨리아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삼켜내었다.


“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하께서는 일정이 무척 바쁘시니, 상황에 따라 방문하지 못하실 수도 있겠죠. 우선 초대장은 보내볼 생각입니다.”

벨리아의 말에 황제가 반색했다.


“그렇다면 그 초대장은 내 이름으로 보내도록 하마.”

황제의 초대로 신국의 대신관이 제국에 방문했다는 건 제국사에서 무척 큰 업적이 될 것이다. 그것을 놓칠 순 없었는지 황제가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했다.


“폐하께서 그리해주신다면 마음이 놓입니다. 하지만 저도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안부를 묻고자 하니 따로 추가적인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그래. 공주의 편지도 함께 보내면 대신관께서 더욱 좋아하겠지.”

황제가 무척 기쁘다는 듯 껄껄,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곁에서 황비가 잠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보니 약혼식에서 재미있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황제는 아예 몸까지 벨리아 쪽으로 돌려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세울 수 있는 업적에 눈이 멀어 이미 약혼식보다 이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기운 상태였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벨리아가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애초에 자신의 명예가 더욱 중요한 사람이니까.’

아무리 라울을 어여뻐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가장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인 사람.

그러니 황제를 제 입맛에 맞게 움직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벨리아는 잠시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웃, 움직이다 칼리드를 향해 물었다.


“칼리드. 혹시 그때 남국에서 온 사절단이 진귀한 물건들을 많이 선물해줬었는데, 기억나요?”

벨리아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었다. 칼리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받은 선물 중 몇 가지는 챙겨서 제국으로 가져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죠?”

벨리아가 밝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황제와의 대화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분명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칼리드와 황제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겠지.

사람이란 단순한 동물이니까.


“오호? 그래. 남국에서 온 사절단이 제국에도 방문했었지. 허허.”

로니카 왕국을 방문하는 김에 제국까지 한꺼번에 들른 모양이었다.


“퍽 신기한 자들이었단다.”

“폐하의 치세가 남국까지 퍼졌으니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벨리아의 예의상 하는 말에도 황제는 기분이 좋은지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릴 견제하고 싶겠지만,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해.’

벨리아는 그 점을 다시 한번 주지시킨 것이었다.

완전히 그들에게 숙여서는 안 됐다. 몸을 사리되, 위협이 되는 정도를 유지해야 했다.


“너희 결혼식에 국왕께서 오지 못한다니 아쉽구나.”

황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니카 왕국은 너른 평야를 보유하고 있어 풍부한 식량과 다양한 광물이 채굴됐다.

자원과 식량이 충분해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인 것과 동시에 지리적인 위치도 제국에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요충지에 위치했다.

서쪽으로는 잉고트 제국, 북쪽으로는 신국, 동쪽으로는 야쿰 왕국을 맞대고 있었고 남쪽으로 너른 사막을 건너 다양한 부족의 연합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현 로니카 왕국은 그 모든 국가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무시해.’

그렇게 티 나게 깔보면 사람이 열이 받지 않겠어?

벨리아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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