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그를 사랑하나 봐 (46/88)


#46. 그를 사랑하나 봐
2023.04.08.


한참 이동하던 마차가 멈추고, 벨리아와 칼리드가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진료소의 건설 현장이었다.

현재 이곳을 포함해 제국 곳곳에 총 여덟 군데의 진료소를 짓는 건설작업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건물을 짓는 것도 마법으로 뚝딱뚝딱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하. 오랫동안 머물 곳이니 더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참을 만해.”

마법은 편리했지만, 대부분 무언갈 파괴하거나 기존 능력을 높여주는 정도에 그쳤다.

조금 더 고위 마법으로는 마정석을 이용해 무기에 특별한 힘을 불어넣을 수도 있었지만, 마정석이 워낙 비싸서 흔치는 않았다.


“가을은 되어야 완성되겠네요.”

“그것도 빠른 편이야, 벨리아.”

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빨리 자리를 잡고 싶었다. 아직도 라울이 가진 것들을 따라가려면 멀게만 느껴졌다.

칼리드가 그런 벨리아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슬슬 쓸었다.


“자꾸 물지 마. 그러다 상처 나면 어떡하려고.”

괜히 벨리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 어때요. 괜찮아요.”

“난 전혀 안 괜찮아.”

칼리드가 벨리아를 달래듯 슬쩍 안았다 놓아주었다.


“조급해하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잖아, 우리.”

벨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건설 중인 진료소는 기초 공사가 마무리되어 벽이 세워지고 있었다.

기술자들 여럿이 작업에 한창이었다.


‘성실하니 걱정할 건 없겠어.’

그들의 작업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벨리아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칼리드를 통해 기술자들을 수소문한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진료소의 건설 현장을 둘러본 후 몇 가지 지시를 내린 칼리드와 벨리아가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뭐 하는 거예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칼리드는 자연스럽게 벨리아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나 오늘 너무 피곤했어.”

벨리아는 헛웃음을 짓다가 결국 자신의 무릎 위에서 눈을 감는 칼리드를 향해 슬쩍 부채를 부쳐주었다.


“고생했어요.”

“그대 덕분에 내가 팔자에도 없는 일을 이렇게나 많이 하는 거 알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원래 일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잖아요.”

“그거야말로 금시초문이군.”

칼리드가 뻔뻔하게 말하며 더욱더 편한 자세로 고쳐 누웠다.

못 말려, 정말.

칼리드는 벨리아 자신보다도 바쁜 사람이면서 늘 한량인 척하려 했다.

그렇게 한참 둘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진작 황궁에 도착해야 했을 마차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벨리아가 마차 창문에 달린 작은 커튼을 걷으려 하자 칼리드가 손을 뻗어 그것을 저지했다.


“응?”

“가만히 있어, 벨리아.”

또 뭔가 일을 꾸미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쉿. 일단 기다려 봐.”

칼리드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 남자가 이렇게나 신이 났는지 벨리아는 무척 궁금해졌다.

최근에 칼리드가 영 풀이 죽어 있어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표정이 좋아지더니 오늘은 이렇게 안 하던 짓을 한다.


“저를 납치하시는 건가요, 2황자 전하?”

“그래. 그러니 공주는 얌전히 납치를 당해주길 바라.”

범죄를 저지르는 주제에 얌전히 당해달라고 부탁하는 저 말이 어쩐지 우습다.

그의 뻔뻔함에 벨리아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납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칼리드가 벨리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흠……. 혹시 그런 걸 좋아하나?”

어쩐지 웃음을 꾹 참는 기색이다.


“그런 거라뇨?”

대체 이번엔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칼리드가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벨리아의 양손을 한 손으로 붙잡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다른 한 손으로 벨리아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꺅!”

졸지에 의자에 반은 눕다시피 한 자세가 된 벨리아가 자신에 위로 올라탄 칼리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강압적인 거? 내가 그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그 말에 벨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잇!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정말!”

벨리아가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 서둘러 말을 끊었다. 그러곤 칼리드의 아래에서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애를 썼다.


“하하하.”

칼리드는 벨리아의 위에 그대로 엎드린 채 다정하게 다시 그녀를 폭, 껴안았다.

결국 벨리아도 버둥거림을 멈추고 가만히 칼리드에게 안긴 채 그가 주는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난 벨리아가 서둘러 옷과 머리를 정리했다.

흐트러진 옷과 머리라니. 누군가 보면 오해할 법한 모습이었다.


“도착했나 봐요.”

여기가 어딘지 궁금했던 벨리아는 슬쩍 창문의 커튼을 열어 밖을 살폈다.

하지만 나무들로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내리지.”

칼리드가 마차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가 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리아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여긴 어디…….”

그에게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

벨리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뜩 스쳐 갔다.


“설마?!”

놀라서 동그래진 벨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칼리드가 아주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벨리아에게 이 저택을 보여주는 날을 무척 고대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래. 그때 말했던 우리 집이야.”

정말로 그가 이야기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넓은 잔디 정원을 지나 도착한 저택은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별다른 장식 하나 없는 그의 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화사하고, 밝았다.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쨍쨍한 햇빛을 받아 더없이 빛났다.


“와아…….”

그가 그토록 자랑할 만했다.


“어때?”

“정말 예뻐요!”

벨리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커다란 나무로 저택 주변이 모두 둘러싸여 철저하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대가 오기 전에 조금 더 손을 봤어. 이곳에서 우리가 함께 살면 좋겠다 싶어서.”

그의 제안에 벨리아의 마음이 흔들렸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곳에서 그와 함께 삶을 보내도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벨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황제가 곧 죽을 것이다.

궁에 머물며 황제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그리고 라울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칸테리프 공작가를 등에 업은 라울은 쉽지 않을 거예요.”

서부의 테사 공작가와 로니카 왕국.

그리고 중앙의 칸테리프 공작가.

차기 황권을 거머쥘 싸움은 무척 치열할 것이다.


“약점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벨리아는 너른 잔디밭을 천천히 걸었다.


“내 기분을 맞춰 줄 생각이 전혀 없군, 그대는.”

“그러는 당신도 다 알면서 괜히 꺼낸 소리였잖아요.”

“하아. 우리 공주께선 낭만이 없어.”

칼리드가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뱉으면서 벨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긴 종종 놀러 와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을 것 같아.”

“그래. 그러지.”

칼리드는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담요를 바닥에 깔았다.


“그때 말했던 거.”

“어? 아하하하.”

벨리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벨리아가 이렇게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벨리아와 했던 대화는 모두 기억했다.

그 어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신기해.’

정말로 여느 연인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선선한 바람이 벨리아를 휘감고 지나갔다.

여름의 늦은 오후는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아아, 좋다!”

벨리아가 팔을 번쩍 들고 뒤로 벌러덩 누웠다.

파랬던 하늘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오묘한 색상들로 어우러져 있었다.

푸른색과 붉은색, 분홍색, 보라색이 얽혀 더없이 화려한 모습이었다.

칼리드가 벨리아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


“저 하늘은 그대 눈동자와 비슷해.”

그 말에 벨리아가 칼리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예뻐.”

“하하. 뭐예요.”

매번 하는 말이라 웃음으로 넘기고는 벨리아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저기 보라색이 그대 눈동자 같아.”

칼리드가 양팔로 머리를 받치고 즐겁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댈 보자마자 예쁘다고 생각했나 봐. 내가 이 시간의 하늘을 좋아하니까.”

 
쿵, 쿵.

벨리아의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슬쩍 떠오른 기억에 벨리아가 뾰로통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저를 보자마자 예쁘다고 생각했다는 건 과장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땐, 제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는 아무런 반응 없었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벨리아가 그에게 결혼하자고 이야기했을 때, 칼리드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기막힌 얼굴로 바라보지 않았나.


“그때도 예뻤어.”

“거짓말.”

“……내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칼리드가 씁쓸하게 읊조렸다.

그의 말속에서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느껴져 무어라 위로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대가 황궁에서 머문 것도 몇 달이나 지났으니 슬슬 분위기를 파악했겠지?”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벨리아는 더 마음이 아팠다.

황궁에 들어와서 느꼈던, 묘하게 칼리드를 배척하는 그 시선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자라왔을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칼리드가 오만한 황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러한 시선 속에서도 적통 황자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라울과 결혼하려는 여자는 공녀가 아니더라도 많았어.”

칼리드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쪽은 꿈도 못 꾸니 나라도 건드려보려던 자들도 있었지. 하지만 그들도 라울이 손을 내민다면 그쪽으로 당장 달려갈 게 뻔히 보이더군.”

실제로 곁에서 얼쩡거리다가 라울에게 쪼르르 달려간 사람도 있었다며 웃어버리는 칼리드의 모습에 벨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대가 라울의 청혼을 거절하고 싶다며 날 선택했지.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어.”

누군가가 라울이 아닌 자신을 선택해주었다는 것. 그 사실이 칼리드에겐 더없이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처음부터 벨리아가 어여뻤다.

그녀가 라울을 선택했다가 과거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는 더없이 처참한 기분이었지만, 이미 그땐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발을 빼기엔 속절없이 빠져버린 이후였으니까.


“벨리아.”

하늘은 어느새 붉게 타올랐다.

칼리드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겐 그대뿐이야.”

벨리아는 어떤 대답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에게 과거로 돌아왔음을 고백했을 때, 자신의 감정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까.

어떤 기분으로 모두 다 괜찮다며 자신을 토닥여줬던 걸까.

벨리아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움직이면 눈에 차오른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어떡해…….’

심장께가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벨리아는 눈을 꾹 감았다.

가득 고였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다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나, 칼리드를 사랑하나 봐.’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데이고도 또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 그렇게 어렵던 감정이 순식간에 명쾌한 해답을 찾은 듯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사랑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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