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사자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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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자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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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자대면
2023.04.04.
라울은 주먹을 꽉 쥔 채 떨고 있는 엘린을 발견하고도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곤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공녀와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았던 사이라 취향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기에 묻지 않은 것뿐이야.”
그런 라울의 모습에 벨리아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칼리드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도 신경 좀 써주지? 너무 무신경한 거 아니야?”
라울이 흘깃 엘린을 바라보았다.
“공녀는 준비된 것들이 입에 맞는가?”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엘린은 애써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화답했다. 하지만 그 화답은 곧바로 허공에 사라졌다.
라울이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차가운 반응에 엘린이 부들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쯧.’
벨리아가 속으로 혀를 차며 쿠키가 묻은 입가를 닦아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 채 저들이 서로 감정이 상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럼 저 꼴 보기 싫은 둘을 앞에 두고 더 오랫동안 여기 앉아 있어야 했다.
결국 벨리아는 귀찮은 감정을 숨긴 채 입을 열었다.
“두 분 약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두 달 뒤였던가요?”
처음으로 그들을 향해 꺼내는 질문이었다.
“맞아요. 여름이 지나기 전 약혼식이 있지요.”
엘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축하한다는 인사도 못 했었군요. 축하드립니다, 공녀.”
벨리아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
“그때 두 분도 참석해주실 거지요?”
“물론이죠.”
벨리아가 일부러 칼리드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아주 다정한 연인처럼.
그것을 지켜보던 라울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타국에서 제국으로 와서 지내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습니까?”
“네. 칼리드 전하께서 워낙 잘 챙겨주시니 부족함을 느낄 새가 없군요.”
“……그것참 다행이군요.”
구겨진 라울의 표정을 발견한 칼리드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보다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지? 우리와 시기가 겹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하지 않나?”
라울이 벨리아에게 더 말을 걸지 못하도록 칼리드가 화제를 전환했다.
어차피 라울과 엘린이 약혼을 한다면 그들도 결혼 일정을 잡아야 할 테니 형제끼리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 전 황제와의 식사 자리였다.
식사를 하던 도중 조금 지친 표정의 황제가 황자들이 모두 약혼을 했다면 첫째가 먼저 결혼을 하는 게 대외적으로 더 보기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슬쩍 꺼내왔다.
‘황비가 어지간히 난리를 피운 모양이지.’
곁에 앉아 있는 황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을 보니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칼리드와 벨리아의 결혼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체결한 혼인 동맹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황제도 그걸 알기에 말을 꺼내면서도 조금은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황제는 내년 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양국이 잘 조율한다면 시기를 조금 미루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며 은근하게 자신들을 떠봤다.
‘괘씸해.’
황비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자신들에게 전하는 황제의 모습이 너무 얄미웠다. 분명 결혼식이 미뤄져도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라는 심정이었으리라.
벨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폐하와 일정을 논의 중이다.”
그런 라울의 말에 칼리드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폐하께선 사랑하는 아들을 더 챙겨주고 싶은 모양이시던데, 우린 무조건 내년 봄에 결혼식을 진행할 거니까 괜히 헛된 꿈은 꾸지 마시라고 전해.”
“칼리드.”
“우리더러 일정을 미루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이미 양국에서 합의가 끝난 사안인데 로니카 왕국에 이제 와서 뭐라고 양해를 구할 거지? 안 그래?”
양국의 약속을 깨면서까지 제 사랑하는 아들의 결혼을 먼저 시키겠다는 건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었다.
벨리아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울 황자 전하. 이 결혼식은 제 한 번뿐인 결혼식입니다.”
그러곤 찻잔을 들어 홍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제국에서 로니카 왕국의 위치가 고작 이 정도라니. 실망스럽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
애초에 황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 전, 라울이 황비가 황제를 닦달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
이전 삶의 기억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황비는 황제와 의견을 나누기 이전 라울과 먼저 상의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황제에게 독단적으로 부탁했을 리는 없다. 심지어 이건 라울의 일이 아닌가.
‘그도 암묵적으로 동의했을 게 분명해.’
그러니 벨리아는 더 기가 막혔다.
황제가 정신 못 차리고 그런 헛소리를 할 수는 있다 치자. 하지만 라울은 그러면 안 됐다.
과거에 자신이 곁에 머물렀던 사람이 고작 이 정도였다고?
그때의 자신이 더욱더 바보 같아 보여서. 더없이 하찮고 비참해서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죄송하지만 저도 결혼식 일정을 미루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벨리아가 달칵,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주께는 정말 유감입니다.”
라울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땐 폐하께서 워낙 강경하시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의사를 여쭤보는 것뿐이었으니 너무 언짢아하진 마십시오.”
“계속 제 걱정을 해주시는 전하의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이번 일은 전하께서 폐하께 잘 말씀드릴 거라고 믿겠습니다.”
벨리아는 가식적으로 꾸며진 미소를 지으며 라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는 내년 가을이 전하와 공녀의 결혼식으로 참 좋아 보이는군요.”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라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눈빛만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미 티타임은 끝났다.
“아무튼 우린 그대로 진행할 거니까, 마음 넓으신 형님이 일정을 조정해봐. 아,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칼리드가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홍차가 좀 떫더군. 좋은 찻잎을 쓰도록 해. 뭐, 필요하면 선물이라도 해줄 테니까.”
그러곤 칼리드는 벨리아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라울과 칸테리프 공녀의 약혼식이 며칠 뒤로 다가왔다.
1황자의 약혼식을 위해 황궁 전체가 들썩였다.
황제도 직접 나서서 그의 약혼을 성대하게 준비하라 일렀다.
‘과연 칼리드와 내가 제국에서 약혼했다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벨리아의 의문은 타당했다.
실제로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자신들의 결혼식 준비는 당사자인 벨리아와 칼리드가 직접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따로 챙겨주는 건 전혀 없었고, 오로지 둘이 준비하고 보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가끔 로니카 왕국과 결혼식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아야 할 때나 황제가 나섰다.
‘짜증 나.’
기분만 같아서는 라울의 약혼식에서 난장판이라도 만들어볼까 싶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공주님. 어서 나가셔야 해요.”
그 사이 벨리아는 칼리드와 상의했던 대로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2황자궁으로 배정되는 품위 유지비로 각 보육 시설과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거기에 로니카 왕국에서 가져온 벨리아의 지참금을 제국 곳곳에 진료소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실제로는 칼리드가 사적으로 모아둔 자금을 보태주는 거였지만, 황제와 라울에게 의심을 살 수 있기에 벨리아가 가져온 금액으로 모두 진행하는 것이라 둘러대었다.
“아이참! 공주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알겠어. 금방 나갈게.”
오늘은 칼리드와 함께 수도 외곽에 지어지고 있는 진료소를 살펴보러 가기로 했다.
벨리아는 서둘러 서류들을 챙기면서 밖으로 나갔다.
총총총 계단을 내려가자 칼리드가 멋있게 미소를 지은 채 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나도 금방 왔어.”
칼리드는 오늘 아침부터 상단에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참이었다.
최근 금광의 협상 건도 마무리되어 채굴을 시작하기 전 이것저것 진행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고생했어요. 자꾸 바쁜 사람을 괜히 끌고 다니는 것 같아 미안해요.”
“그대와 함께하는 일이라면 데이트하는 기분이라 괜찮아.”
칼리드가 능글맞게 답했다.
“당신은 대체 어디서 그런 말들을 배워 온 거죠?”
벨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않고선 괜히 투덜거렸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칼리드에게 팔짱을 꼈다.
“상단에 갔던 일은 잘 해결됐나요?”
“아아. 당연하지.”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얼마 전 칼리드가 발견했던 금광에 대한 지분 협상 건으로 로니카 왕국의 사절단이 제국을 방문했었다. 로니카 왕국에서는 벨리아와 상의했던 대로 4할하고도 5푼의 지분을 요구했다.
“채굴을 위해 남부 마탑에 의뢰를 넣었어.”
“잘했어요. 위치는 확실하니까, 길만 잘 뚫어두면 채광까지는 금방일 거예요. 제련은요?”
“테사 공작령에 있는 기술자들을 데리고 광산 근처에 제련소를 지을 거야.”
광물의 이동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는 건가.
벨리아는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테사 공작령은 로니카 왕국에서 가까우니 위치상으로도 좋은 선택지였다.
게다가 칼리드의 힘이 되어주고 있는 가장 큰 지지 세력이 테사 공작가를 중심으로 한 서부 귀족 세력이기도 했으니, 테사 공작령과 협력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마탑의 힘을 빌릴 거라면 실제 금을 받아 보는 건 내년 봄쯤이겠군요. 좋네요. 자금이 여유롭겠어요.”
세금까지 계산해도 충분한 금전이 생길 테니 무척 만족스러웠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충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마친 벨리아가 미소를 짓자 그 모습을 보던 칼리드의 표정도 밝아졌다.
라울의 약혼식으로 황궁이 어지러울 때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최근에 벨리아와 칼리드는 무리해서라도 여러 일을 한꺼번에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금광에 관련한 협상이 마무리되어 다행이에요. 한때는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을 지경이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아가 웃었다.
황제가 지분을 더 달라며 떼를 쓸 때에는 정말 저 얄미운 얼굴을 한 대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둘은 마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에도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불법 시설 단속은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중인 것 같죠?”
“맞아. 황제가 라울 녀석을 칭찬하느라 하루를 꼬박 다 보내고 있다더군.”
그 말에 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라울은 제국 내 불법 시설의 단속을 맡아 요즘 무척 바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시끄러웠던 단속도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였고, 그건 곧 라울에게 선물을 보낼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로 기대되네요.”
과연 라울이 도박에 빠져 몰래 불법 도박 시설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황제가 어떤 반응 보일 것인가.
“증거는 이미 조금씩 모으고 있어. 우린 결정적인 순간을 잡기만 하면 돼.”
이미 라울이 도박에 손을 댄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불법 도박장에 가는 주기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를 함정에 빠뜨릴 준비는 이미 끝났다.
“모든 건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칼리드가 다정하게 벨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들의 약혼식이 끝나고 라울과 칸테리프 공녀에게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을 때, 그때 터뜨리도록 해요.”
벨리아가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칼리드가 씨익, 미소 짓는다.
“그대의 분부대로 거행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