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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해 (44/88)


#44.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해
2023.04.01.


그는 벨리아가 겪었던 그 시간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니 지금처럼 이렇게 애처로운 표정으로 매달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벨리아는 거세게 요동치는 마음을 붙잡아야 했다.


‘지금의 그는 황제가 아니야. 그는 황제가 아니야…….’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었지만 끔찍했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그걸 왜 알고 싶으신 거죠?”

당장이라도 라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어째서 네가 아니냐고……?’

꽉 쥐고 있는 주먹 안으로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그대에게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간 눈을 한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라울의 모습에 벨리아가 잇새로 새어 나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가 벨리아의 등 뒤에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풍겨오는 서늘한 향기에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칼리드였다.

그가 가볍게 등을 도닥이는 손길에 날이 섰던 감정이 조금씩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벨리아는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고 반복해서 심호흡했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이만 가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라울을 노려보았다.
 

 
벨리아의 예상대로 창문을 통해 계속 지켜보다 벨리아에게 수작을 부리는 라울을 발견하자마자 서둘러 후원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누가 보면 형님이 내 약혼녀에게 추근대는 거라고 오해하겠어?”

잔뜩 빈정거리는 칼리드의 말에 라울이 표정을 굳혔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형님이 벨리아에게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설마 우연히 마주쳤다는 헛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칼리드가 벨리아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그녀를 진정시키면서 이를 갈았다.

평생 한 번도 와본 적 없었을 2황자궁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어떤 이유도 그저 변명에 불과할 라울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보고 있지 않았다면 저 감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알 만했다. 칼리드는 코웃음을 쳤다.


“굳이 형님이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겠어. 너무 뻔하잖아.”

그러곤 품 안에 안고 있는 벨리아의 얼굴이 라울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며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왜? 아직 미련이 남으셨나?”

칼리드의 목소리가 위험했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는지 라울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난 그저 너흴 티타임에 초대하려던 것뿐이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길에 직접 찾아와서 물어보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라울이 그렇게 변명했다.


“아까 공주께 했던 질문은 그저 궁금했던 거였고.”

단지 궁금해서 자신을 왜 거절했는지 묻는다고?

개소리가 따로 없었다.

그때, 분노가 조금 사그라든 벨리아가 칼리드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빼꼼 꺼내 들었다.

라울이 그런 벨리아의 모습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잠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저도 곧 칸테리프 공녀와 약혼을 합니다. 그래서 공녀를 소개하려던 것뿐이니 부디 오해는 마시길.”

벨리아에게 이야기하는 라울의 태도는 무척 정중했다.


“우린 이제 가족이지 않습니까.”

그의 미소에 악의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지금 라울이 마음에 없는 소리를 뱉어내고 있다는 것을.

굉장히 찝찝했지만, 저렇게 말하는 라울의 초대를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이쪽을 향해 관심을 두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칼리드 덕분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벨리아가 그를 슬쩍 밀어내곤 라울을 향해 허락의 말을 건넸다.


“가족끼리 화합의 목적으로 만나는 것인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차후 자세한 일정을 알려주면 시간을 맞춰보겠습니다.”

“제 뜻을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벨리아 공주.”

다정한 미소를 짓던 라울이 이만 돌아가 보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을 떼어내던 라울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칼리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라울은 그에게만 들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약혼까지 했으면서 안심하지 못하고 절절대는 꼴이라니, 우습구나.”

그러고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쐐기를 박았다.


“뭐가 그리 불안한 거지? 승리자의 여유가 보이지 않잖아, 칼리드?”

라울이 칼리드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 한번 힘을 준 후 그를 놓아주었다.


“그럼 날짜와 시간은 시종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라울이 예법에 알맞은 인사를 벨리아에게 전하곤 칼리드를 바라보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그때 다시 보자.”

 

* * *

적막한 복도에 쿵쿵,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만, 칼리드! 아파요!”

벨리아가 붙잡힌 손목을 뿌리쳐보려고 힘을 줬지만, 도저히 그의 완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칼리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벨리아를 붙잡고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갈 뿐.

쾅!

문이 큰 소리를 내며 거세게 닫혔다.


“후우…….”

방 한복판에 멈춰 선 칼리드가 뭔가를 참아내듯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놔줘요.”

벨리아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제야 칼리드가 벨리아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꽉 잡혀 있던 손목에 피가 통하지 않았는지, 하얗게 질렸던 피부가 점점 붉게 물들었다.

그 자국을 본 칼리드가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벨리아의 여린 피부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보자 죄책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스스로가 더없이 한심했다.


“미안해.”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는 칼리드를 노려보며 벨리아가 조용히 손목을 주물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칼리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거 봐요. 빨갛게 자국 남았잖아.”

벨리아가 손목을 들어 칼리드의 눈앞에 가져가 보여주었다.

그러자 칼리드가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며 딴 곳을 바라봤다.


“어어? 어딜 보는 거예요? 이거 보라니까?”

“……미안.”

“미안한 짓을 했단 건 아나 보죠?”

벨리아가 볼을 부풀렸다.


“라울이 무슨 말 했어요?”

후원으로 달려왔을 때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라울이 그의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인 이후에는 순식간에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벨리아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자신보다 더 우울한 표정을 짓는 칼리드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정하게 물었다.


“그가 뭐라고 했길래 당신이 이렇게 심통이 났을까요?”

그러자 칼리드가 벨리아를 와락 껴안았다.

벨리아가 그런 칼리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라울에게 갈 건가?”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벨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칼리드는 자신이 생각해도 이 상황이 기가 막혔는지 작게 비소를 흘렸다.


“종종 그대가, 라울에게 가버리는 꿈을 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한없이 가라앉아 음울하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벨리아는 드디어 터질 게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과 라울이 이전에 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대놓고 라울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라울과 마주친 덕분에 참아왔던 감정이 완전히 폭발한 모양이었다.


“……알아. 아는데도 그대가 라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데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벨리아를 안고 있던 손을 떼어낸 칼리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젠장.”

그가 낮게 욕을 읊조렸다.

칼리드가 욕설을 내뱉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벨리아는 어쩐지 등을 따라 허리까지 소름이 돋아났다.


“그대에 한해서는 뭐 하나 나다운 게 없어.”

여태 보지 못했던 그의 처연한 모습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가 온전히 감정을 내보이면서 자신에게만 매달리는 게 짜릿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그의 얼굴이 얼핏 드러났을 때, 벨리아는 알 수 없는 힘에 바닥으로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손끝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쾌감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물을 가져올게요.”

방금 자신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나.

판단할 수 없었다.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누군가가 자신으로 인해 이렇게 감정을 쏟아내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오르는 건, 벨리아 자신이 어딘가 이상해진 걸까.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어요.”

벨리아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칼리드가 자신에게서 돌아서는 벨리아의 손을 낚아챘다.

마치 지금 가면 다시는 못 볼 사람을 붙잡는 것처럼 다급한 손길이었다.


“가지 마.”

벨리아는 칼리드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웃었다.


“제가 가긴 어딜 가요.”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말해.”

고작 물을 가져오겠다는 것뿐인데도.


“어서.”

그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한다.

칼리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벨리아를 다시 거세게 붙잡았다.


“그댈 영원히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가둬두고 싶어.”

칼리드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벨리아에게 시선을 맞췄다.


“이런 생각만 하는 내가 미친 걸까?”

벨리아는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성을 느꼈다.

목적만을 생각하자며 힘겹게 그어둔 선을 제멋대로 넘나드는 그를 보며 벨리아는 아득한 심경이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밀어닥치는 파도와도 같은 그의 감정에 그대로 집어 삼켜질 게 뻔했다.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는데.”

속절없이 감정에 휩쓸리는 건 원치 않았던 벨리아가 눈을 살포시 접으며 웃었다. 그러곤 조금은 느리고 끈적한 목소리로 농염하게 속삭였다.


“아까 라울이 제게 말을 걸었을 때 제가 얼마나 이를 악물면서 참았는지 모르죠?”

“…….”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이고 싶었어요.”

만약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그의 목을 틀어쥘 뻔했다고 벨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가 어울리지도 않게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라울의 목을 찌르는 건 저예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얘기하면 된다.

내 손으로 그를 죽일 거라고.

* * *

벨리아는 앞에 놓인 찻잔을 슬쩍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입맛에 맞았다.

둘러보니 앞에 놓인 디저트들도 벨리아의 취향에 꼭 맞는 것들뿐이었다.

로니카 왕국에 있을 때 자신이 이것들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 모양이지?


‘조금 더 이전으로 회귀했으면 얼마나 좋아.’

그랬다면 라울과 아예 접점조차 만들지 않도록 기를 쓰고 피했을 텐데.

뭐, 어쨌든 준비된 쿠키는 맛있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입에 맞습니까?”

오독오독 쿠키를 먹고 있는 벨리아를 향해 라울이 다정하게 물었다.

벨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맛있네요.”

“다행입니다.”

라울이 무척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얼마 전, 그리 반갑지 않았던 라울의 초대로 칼리드와 벨리아는 1황자궁에 방문해 티타임을 함께하는 중이었다.

정말 껄끄럽기 그지없는 네 명이 한자리에 모여 어색하게 담소를 이어가고 있었다. 뭐, 이걸 담소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전에 좋아한다고 했던 것이 떠올라 준비해 보았습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군요.”

벨리아가 무심하게 끄덕였다.

슬쩍 바라보니 라울의 곁에 앉아 있는 엘린 칸테리프의 표정은 무척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가 봐도 라울이 벨리아를 챙기고 있는 게 티가 났다. 자신의 약혼녀가 될 사람을 곁에 두고서 이전에 청혼했었던 사람을 신경 쓰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건 칼리드도 마찬가지였다.


“형님의 예비 약혼녀께서 뭘 좋아하는지는 별로 안 궁금한가?”

칼리드가 다리를 꼰 삐딱한 자세로 모멸감에 부르르 떨고 있는 칸테리프 공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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