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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질투 (43/88)


#43. 질투
2023.03.28.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밝은 목소리로 벨리아가 물었다.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티파티를 잘 마무리한 게 썩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벨리아를 바라보며 칼리드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뭐야, 그게.

벨리아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농담하지 말고요. 정말 어쩐 일이었어요?”

어차피 상황을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었다.

빠져나갈 구실을 이것저것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칼리드 덕분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벨리아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대체 갑자기 왜 나타난 걸까.

벨리아가 그의 대답을 재촉하듯 시선을 맞췄다.


“그때쯤이면 끝나기 직전일 것 같았고…….”

그리고?

칼리드가 즐겁다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서 내가 그대를 빼 오면 공녀가 무척 열이 받을 것 같았지.”

벨리아는 그가 말한 이유가 퍽 마음에 들어 같이 웃어버렸다.

사실은 칸테리프 공녀의 표정이 찌푸려지는 걸 보면서 벨리아도 내심 무척 통쾌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부분에서 참 잘 맞는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벨리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에게 투덜거렸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어요. 정말 놀랐단 말이에요.”

그러자 칼리드가 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으로 와.”

그러면서 칼리드가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쳤다.

벨리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마주 보고 있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하지만 칼리드는 씨익, 웃으면서 벨리아의 팔을 붙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벨리아의 몸이 순식간에 칼리드의 품에 떨어졌다.


“아니. 이렇게 안고 있는 게 더 좋아.”

 

 
칼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당황하는 벨리아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고는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목을 콱, 물었다.


“아!”

미쳤나 봐, 정말!

벨리아가 깜짝 놀라서 큰소리를 내었다가 서둘러 입을 막았다.


“뭐 하는 거예요!”

벨리아가 손을 들어 칼리드의 어깨를 찰싹, 내려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진짜!”

“달아.”

칼리드가 다시 벨리아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체취를 깊게 삼켰다.

벨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달아서 가끔은 그대를 모두 삼키고 싶어져.”

벨리아가 콩콩, 칼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만 떨어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모른 척하며 벨리아를 안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그대, 요즘 내게 소홀해.”

서운함이 듬뿍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벨리아의 목에 얼굴을 떼지 않은 상태라 거의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아이가 칭얼거리듯.


“칼리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최근 들어서 그와 일 얘기를 주로 하긴 했다.


“우리는 할 일이 많아요.”

하지만 여유롭게 걸어가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

“칼리드. 정말 이러기예요?”

벨리아를 안고 있는 힘이 조금 약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벨리아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칼리드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아예 놓아줄 생각은 없었는지 칼리드가 벨리아를 붙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말해 봐요. 뭐가 부족해서 그래요?”

“그대가 부족해.”

벨리아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입매에 힘을 주어 꾹 참아내곤 물었다.


“그건 뭘 어떻게 해야 채워질까요?”

벨리아의 물음에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칼리드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벨리아는 찰싹, 그 손을 내려쳤다.


“이거 말고요.”

칼리드는 다시 대답이 없었다.

낮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그림자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본데.

그 순간 벨리아의 머릿속으로 번뜩,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라울을 만났어요?”

그래서 잔뜩 기분이 상해 이쪽으로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그의 태도가 어쩐지 이해가 되었다.

제 추측이 정답이었는지 칼리드의 얼굴이 점점 시무룩해졌다.


“……그 녀석은 그댈 포기할 마음이 없어. 내게 그대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 것 같냐고 하더군.”

이전이라면 타격도 없이 비웃어주었을 말이었지만, 제가 라울과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라 라울의 도발을 쉽게 넘기지 못했나 보다.

벨리아는 라울의 말을 계속 곱씹으며 스스로 상처를 입혔을 그가 안쓰러웠다.

벨리아가 깊게 한숨을 내쉬곤 손을 뻗어 칼리드의 양 볼을 붙잡았다.


“전 라울이 정말 끔찍하게 싫어요. 그가 내게 마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벨리아가 칼리드의 볼을 두 번 꾹꾹 눌렀다.

그러고는 볼이 눌려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그를 노려보았다.


“더 원해요?”

칼리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벨리아의 입술이 칼리드의 입술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자꾸 이렇게 보채면 혼을 내는 수밖에 없어요, 칼리드.”

칼리드는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이게 혼이 나는 거라면, 매일 말썽을 피워야겠어.”

“농담 아니에요.”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당신이 라울에 대해 신경 쓰는 거.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벨리아가 반쯤 닫혔던 눈꺼풀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느리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긴 속눈썹에 칼리드의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벨리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고 말을 이어갔다.


“내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직접 말하지 않았었나요?”

그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푸른색의 눈동자 속에서 이채가 감돌았다.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하기 마련이라고, 그대가 말했었지.”

“그래서 마음이 변했다는 건가요?”

“그래.”

칼리드가 벨리아의 등을 감쌌던 팔을 그대로 올려 그녀의 가녀린 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곤 벨리아의 숨을 모두 삼키려는 듯 깊게 입술을 부딪쳤다.

한참 그녀를 탐하던 칼리드가 입술을 떼어내고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확신을 줘.”

마차가 덜컹, 흔들렸다.


“이미 충분히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해.”

칼리드가 다시 한번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난 늘 그대가 부족해, 벨리아.”

그의 갈망이 짙게 드러났다.

맞닿아 있어도, 더 깊이 닿고 싶다고.


“여기가 마차라서 아쉽군.”

“……동감이에요.”

그를 끌어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욕망이 생겨날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저 계약관계였는데. 그저 서로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았을 뿐이었는데.

자꾸만 그의 입술이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그를 갖고 싶었다.

벨리아는 자신의 이 욕심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

벨리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 * *

벨리아는 오랜만에 후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괜히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황궁 안에서 라울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산책도 칼리드와 함께가 아니라면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도저히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중앙정원에 지금 장미가 한창 만개했다고 하던데…….”

시녀가 아쉽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온 곳이 하필 2황자궁 바로 옆에 있는 작은 후원이라니.

황궁 곳곳에 이보다 더 예쁜 정원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도 충분히 예쁜 꽃들이 피어 있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라울이 머무는 1황자궁과 2황자궁은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여기에선 마주치지 않겠지.

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원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황자 전하께서도 같이 나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요?”

“한동안 여유를 부렸으니 어쩔 수 없지.”

자신도 따라가겠다며 업무를 내팽개치려는 칼리드를 떼어놓느라 무척 힘들었다.

그의 곁에선 아시드가 울먹이는 눈으로 제발 전하를 말려달라고 무언의 부탁을 해왔다.


‘무척 일이 쌓여 있는 것 같았는데…….’

문득 조금 전의 소동이 떠올라 벨리아가 실소를 머금었다.

칼리드가 점점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큰일이었다.


‘정말 본인이 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가능성이 충분한 의심을 해보던 벨리아가 슬쩍 고개를 들어 황자궁을 바라보았다.

이 위치는 그의 집무실에서 잘 보일 것이다.

이건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지만, 그도 분명 저 유리창을 통해 여기를 보고 있을 테니까.


‘못 말린다니까, 정말.’

솔직하게 속마음을 이야기해 보자면.

우연히라도 라울과 마주치고 싶지 않던 것도 있지만, 어깨가 축 처져 실망한 자신의 사냥개를 위해 이곳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벨리아가 흐흥,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발걸음도 가벼웠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정원을 걸으며 칼리드에게 보여주듯 일부러 환하게 웃어보았다.

지금쯤 칼리드가 무지 약 올라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벨리아 공주.”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벨리아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라울이었다.


“우연히 마주치다니. 어째 굉장히 반갑군요.”

벨리아는 티가 나지 않게 눈을 감은 채 작은 숨을 내뱉고는 뒤를 돌았다.

그를 마주하는 게 불편하다고 해도 어쨌든 그는 제국의 1황자였다.


“오랜만입니다. 라울 황자 전하.”

벨리아는 못마땅한 속내를 감추고 평이하게 인사를 건넸다.

라울과는 아주 오랜만에 마주하는 거였다.


‘……짜증 나.’

이전 벨리아를 환영하는 파티에서도 라울은 황제의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의외였다.

라울이라면 파티장에서 오히려 더 살갑게 굴며 벨리아에게 거절당한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길 거라 예상했었는데.

칸테리프 공녀와의 약혼이 거의 확실하게 결정되기도 했고.

그런데 공녀를 놔두고 사라진 그의 행동에 벨리아는 그가 자존심이 상해 자신을 피하는 건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는군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 칼리드 전하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벨리아는 빈말이라도 네 덕분이라는 소리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라울이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제가 불편하십니까?”

“네. 불편해요.”

벨리아는 딱 잘라 대답했다.

라울이 물었다.


“제가 그대에게 청혼했기 때문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벨리아가 아주 티 나게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전하. 저희가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조차 이야깃거리가 될 거예요.”

“벨리아…….”

라울이 아련하게 벨리아의 이름을 읊조렸다.

하지만 벨리아는 단호했다.


“전하께 제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기껏 조금 쉬어볼까 하고 나왔더니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대체 라울이 왜 이곳에 와 있느냔 말이다.


“여전히 매정하시군요.”

“전하께 다정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차디찬 벨리아의 대답에 라울의 미소가 흐려졌다.


“……전부터 계속 궁금했었는데.”

라울이 입을 열었다.


“그때 공주께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의 감정은 변할 수도 있죠. 그것은 칼리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그가 이것을 여러 번 물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에 대해 벨리아가 제대로 대답을 해준 적은 없었다.


“그대에게 저는 정말 아니었습니까?”

라울이 처연한 표정을 짓는 걸 비웃으며 벨리아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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