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계략
(42/88)
42. 계략
(42/88)
#42. 계략
2023.03.25.
이전 삶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공녀는 나를 정말 싫어하는구나.’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상황이니 그리 당황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자 파티에 참석한 귀족 영애들 모두가 벨리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미리 말을 맞춘 상황인 것이 순식간에 파악되었다.
벨리아는 짧은 숨을 내뱉고는 최대한 중립적인 대답을 꺼내기 위해 입을 뗐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 죄송해요. 로니카 왕국과 제국은 많은 것이 달라 익숙하지 않으실 텐데……. 제가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
벨리아가 자신이 던진 함정에 걸려들 것 같지 않자, 다른 방법으로 바꾸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눈치도 제법 빠르고.’
그 짧은 망설임 속에서 벨리아가 엘린의 말에 담긴 진의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않은가.
이전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고 엘린 칸테리프에 대해 조금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일을 넘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홍차는 제가 로니카 왕국에 있을 때 자주 마시던 거예요. 그래서 정말 반가웠답니다.”
벨리아가 두 손을 꼭 모으며 정말 감격했다는 듯 말했다.
“남부 연합왕국에서 수입되는 차라서 제국에선 구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티파티를 위해 던컨 백작 영애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엘린 칸테리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을 테니 당연했다.
“게다가 이 홍차와 앞에 놓인 구움 과자들이 무척 잘 어울린답니다. 그 부분도 고려해서 준비한 거죠?”
벨리아가 던컨 백작 영애를 향해 물었다.
던컨 백작 영애는 칸테리프 공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엘린 칸테리프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결국 백작 영애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아, 그게……. 네, 맞아요…….”
분명히 이 모든 일은 칸테리프 공녀가 시켰을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거절하기 어려웠겠지.
‘미안하지만, 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답니다.’
벨리아는 싱긋 웃으며 던컨 백작 영애를 향해 칭찬을 던졌다.
마무리였다.
“역시! 처음 홍차 향을 맡았을 때부터 차를 좋아하는 분이라고 예상했답니다. 같은 취미를 즐기는 분을 만나 무척 기쁘군요.”
그러고는 의연하게 앉아서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구움 과자를 하나 가져와 홍차와 함께 먹었다.
칸테리프 공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걸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선제압에 실패했으니 오늘은 여기서 멈출 것이다.
정원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공주님께서 티파티를 마음에 들어 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던컨 백작 영애도 한시름 놓였을 거예요.”
“칸테리프 공녀는 던컨 백작 영애와 무척 각별한 사이인가 보군요?”
‘이런 말까지 네가 대신해줘야 하는 거니?’라는 속내를 넌지시 던졌다.
그러자 칸테리프 공녀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좋은 마음으로 꺼낸 이야기랍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표정.
약간의 도발로도 파르르 떠는 어설픈 인물은 아니었다. 벨리아는 이 부분을 머릿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칸테리프 공녀는 친절하게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특별한 자리를 함께했으니, 어떻게 보면 우리도 서로 각별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호오?
벨리아는 내심 감탄했다. 슬쩍 비뚤어진 입매까지는 숨기진 못했지만, 미혼의 귀족 영애가 보이는 대처치곤 무척 훌륭한 편이었다.
“그렇군요. 공녀께선 무척 다정하고 마음이 넓으신 것 같아서, 진심으로 감동했답니다.”
“어머. 공주님께서 오히려 더욱더 따뜻하게 말씀해주시는걸요.”
벨리아와 엘린은 서로를 마주 보며 밝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벨리아가 파악할 수 있던 것은 두 가지.
사교계에서 생각보다 칸테리프 공녀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과 의외로 귀족 영애들은 자신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것.
‘앞으로 사교계 분위기를 어떻게 바꾼다…….’
벨리아는 이들 사이에 파고 들어갈 틈이 분명히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은 조금 고심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어느덧 마지막 디저트가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티파티가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당히 상황을 보면서 일어나야겠어.’
그때 정원의 입구에서 하녀가 잔뜩 당황해 이쪽으로 달려왔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고선 티파티의 중간에 끼어드는 경우는 잘 없었기에 그 행동이 무척 눈에 띄었다.
그에 다들 놀란 눈으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세상에……!’
그녀의 등 뒤로 익숙한 인영이 이곳을 향해 느긋하게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여기에 있을 리 없는 얼굴을 발견한 벨리아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드?”
“어머. 2황자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세상에!”
칼리드는 여자들만 모여 있는 장소가 어색하지도 않은지 저벅저벅 걸어 벨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손을 내민다.
“데리러 왔어.”
사람들은 칼리드가 다정하게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는지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게다가 여성들의 티파티에 참석한 연인을 직접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경악했다.
“끝날 시간 맞춰서 왔는데. 혹시 내가 너무 이르게 도착한 건가?”
칼리드가 주최자인 던컨 백작 영애를 향해 물었다.
“아닙니다, 전하. 이제 마무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벨리아를 데려가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칼리드는 주최자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앉아 있는 벨리아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벨리아. 이제 마무리하려는 참이라는데?”
평소에 칼리드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 모든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여성들의 티파티에 불쑥 나타난 지금의 행동은 어쩐지 그답지 않았다.
그런데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맞춘 그 순간, 칼리드가 어디선가 보았던 무척 익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못 살아!’
그 표정은 벨리아가 제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 칼리드가 우스꽝스러운 연극톤으로 자신을 맞이하던 얼굴이었다.
벨리아는 장난기가 가득 담긴 그의 눈빛에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의 연기에 장단을 맞추었다.
“미안하군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아니에요! 정말로 곧 마무리하려고 했었답니다.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공주님.”
던컨 백작 영애는 아까 벨리아가 티파티 준비가 미흡한 것을 꼬집지 않고 넘어간 것을 고맙게 여기는 것 같았다.
벨리아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친근해졌다.
‘칸테리프 공녀에게 조금 마음이 상했나 보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공녀와의 관계를 딱 자르거나 하진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서운한 감정이 슬쩍 드러났다.
“던컨 백작 영애의 넓은 마음에 감사를 표해요.”
벨리아가 당황스러워하는 다른 귀족 영애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음에 여기 계신 레이디들 모두 2황자궁으로 초대할게요. 그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과하게 미안해하지도, 그렇다고 무례하지도 않았다.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정리였다.
“정말 초대해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황궁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영애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어서 빨리 집에 돌아가 이 소식을 가족에게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럼 부디 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드려요.”
어차피 조만간 황자궁에서 티파티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초대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벨리아는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는 칼리드의 손을 잡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이게 아니었는데…….’
다정한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린 칸테리프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말아쥔 주먹에 덜덜 힘이 들어갔다.
모두 2황자가 얼마나 벨리아 공주를 사랑하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처음 계획대로라면 벨리아 공주를 난감한 상황으로 몰아넣어 그녀를 고립시켰어야 했다.
엘린은 이를 악물었다.
“공녀님.”
“……던컨 백작 영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엘린은 애써 웃음을 내보이며 던컨 백작 영애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요.”
던컨 백작 영애는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속상하다는 듯 말하는 엘린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제가 쓸데없는 짓을 부탁했네요.”
“아닙니다, 공녀님.”
엘린이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여기 계신 모두에게도 정말 면목 없군요.”
엘린의 모습은 진실되어 보였다.
“라울 전하께서 공주님에게 청혼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속상한 나머지 제가 속이 좁은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모습에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귀족 영애들의 마음이 찡, 하게 울렸다.
자신이었어도 약혼자가 청혼했던 사람과 마주친다면 무지 신경 쓰였을 게 뻔하니까.
그래서 그녀들은 엘린 칸테리프의 감정에 동조했다.
벨리아 공주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칸테리프 공녀의 상황이 더 안쓰러웠다.
“오늘 혼란스러우셨을 레이디들을 위해 조만간 사과의 뜻으로 집으로 초대할게요.”
엘린은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이곳에 더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 도저히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럼, 저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희미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사라지는 칸테리프 공녀를 바라보며 귀족 영애들 모두가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감히 내가 이런 취급을 받게 만들어?’
벨리아 로니카……!
엘린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정원을 빠져나갔다.
조금 전 귀족 영애들을 대하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아주 표독스러운 눈빛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요.”
“네.”
마차에 올라탄 엘린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꾸만 2황자가 벨리아 공주의 손을 붙잡고 사라지는 모습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고고한 2황자 전하께서 누군가에게 그리 저자세로 나오는 건 처음 봤다.
고작해야 여자 하나를 위해서.
‘하, 티파티까지 데리러 와?’
웃기지도 않았다. 분명 보여주기식의 행동일 게 뻔하다.
하지만…….
라울은 억지로 꾸며진 행동에서조차 엘린에게 그리 대한 적은 없었다.
‘……그와 약혼할 사람은 나인데.’
얼마 전 파티에서 라울이 벨리아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독점욕으로 가득 찬 라울의 시선 끝에는 벨리아 공주가 2황자와 함께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얼마간 바라보던 라울은 미간을 구기며 갑자기 자리를 피해버렸다.
‘벨리아 공주가 아니라 내가 라울의 약혼녀인데……!’
분한 마음을 참아내던 엘린이 또다시 손톱을 물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