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제국의 사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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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제국의 사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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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제국의 사교계
2023.03.21.
이번 삶에서도 제국의 사교계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타국에서 온 공주가 주류로 끼어들기 위해서는 중심에 있는 사람을 밀어내는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현재 사교계의 중심이라면 단연코 칸테리프 공녀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내가 공녀를 밀어내는 건 너무 위험 부담이 커.’
가뜩이나 라울의 청혼을 거절하고 칼리드를 선택한 것으로 한동안 귀족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그런 벨리아가 사교계에서 라울의 비가 될 공녀를 밀어낸다면 귀족들의 동정 어린 시선은 모두 칸테리프 공녀에게 향할 것이다.
‘……반대로 나는 온갖 추문에 시달리겠지.’
사교계에서의 첫인상을 그런 식으로 남기는 건 결코 좋지 못하다.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건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보다 몇 배로 힘든 일일 테니까.
‘그러니 완전히 새로운 세력을 만드는 쪽이 낫겠어.’
이전 삶에선 라울을 등에 업고, 황제의 비호를 받으며 무척이나 쉽게 사교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물론 에르제가 나타나면서 영광은 금방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자신의 힘으로 일궈나가야 했다. 거기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모두의 관심이 제게로 향하게 만들어야 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즘 공녀님과 공주님을 비교하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대요.”
머리를 빗겨주던 시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와 칸테리프 공녀를?”
“네. 두 분 모두 예비 황자비인데다 신분도 고귀하시고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여기저기에서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에요.”
“어떤 식으로?”
벨리아의 물음에 시녀들이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공주님은 청초하고 칸테리프 공녀님은 밝고 화사한 분위기라 무척 다른 느낌이잖아요.”
“……솔직하게 말해도 된단다.”
시녀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입술을 달싹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날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아.”
분명 오늘 방문할 티파티에 대해 뭔가 들은 게 있으니 어렵게 운을 뗀 거겠지.
“사실은 오늘 던컨 백작가에서 열리는 티파티에서 조금 곤란하실지도 몰라요.”
“칸테리프 공녀가 오니까?”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으음. 그, 저도 우연히 들은 거긴 한데.”
시녀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 눈을 꼭 감은 채 말했다.
“며칠 전 광장에 갔다가 어떤 레이디들이 공주님에게 살갑게 굴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아무래도 각 가문의 영애들이 공주님과 기 싸움을 할 생각인 모양이라며 시녀가 얘기를 하다 점점 분개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1황자 전하의 비가 될 칸테리프 공녀 쪽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쏠려 있어요. 아시겠지만 2황자 전하께서 그리 좋은 평을 받고 있진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편가르기가 시작되었는데 대부분이 칸테리프 공녀 쪽에 붙었다는 얘기지?
벨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어째 조금 짜증스러운 감정이 치솟았다.
“물론! 황자 전하께선 참 좋은 분이시고 세간에 퍼진 소문처럼 잔혹한 분은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들은 모르니까요.”
이전에는 이렇게 빠르게 편가르기가 시작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벨리아가 이미 차기 황제에 가까운 라울의 비였으니까. 당연히 벨리아에게 잘 보여야 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귀족들의 태도도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고맙구나. 덕분에 마음을 미리 단단하게 먹고 갈 수 있겠어.”
“……공주님께서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벨리아는 사용인들에게도 함부로 하는 법 없이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황궁에 들어와 이런 윗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시녀는 벨리아가 오래오래 이곳에 머물기를 바랐다.
“고마워.”
벨리아는 그런 시녀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나도 만만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벨리아가 눈을 빛냈다.
* * *
사락사락, 드레스가 잔디를 스치는 소리와 함께 벨리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원으로 들어서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벨리아에게 꽂혔다.
그들 중에는 지난번 파티장에서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전 삶에서는 모두 만나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세요. 벨리아 로니카입니다. 제가 조금 늦었나요?”
벨리아가 웃으면서 묻자 티파티를 주최한 던컨 백작 영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왔다.
“아뇨! 사라 던컨이에요.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공주님.”
“저야말로 귀한 자리에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던컨 백작 영애.”
벨리아의 예의 바른 태도에 조금 마음이 놓인다는 듯 던컨 백작 영애의 얼굴이 펴졌다.
곧바로 벨리아에게 자리를 안내하며 던컨 백작 영애가 덧붙였다.
“칸테리프 공녀께선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조금 일이 있어 늦으신다고 하니 이해 부탁드려요.”
그녀가 하는 말의 내용은 분명 양해를 구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미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벨리아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다들 부채로 얼굴을 가리거나 딴청을 피운다.
‘……이것 봐라?’
우선 조금 지켜보기로 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일단 살핀 다음 대응책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건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지 않은가.
“큼큼! 공녀께선 오시지 않았지만, 티파티는 시작하도록 할게요. 오늘의 디저트는 총 세 차례에 걸쳐 나오게 될 거예요.”
던컨 백작 영애가 손짓하자 하녀들이 다가와 테이블마다 미리 준비한 디저트를 올려 둔다.
작은 샌드위치를 비롯해 케이크, 스콘과 구움 과자들까지.
‘아……?’
벨리아는 접시에 놓인 디저트 종류를 살폈다.
첫 접시에서 입맛을 돋워줄 가벼운 디저트가 아닌 일반 디저트라니.
세 번에 걸쳐 나온다고는 했지만, 보아하니 이후의 메뉴들도 구성은 비슷하고 종류만 조금씩 바꿔서 약간의 변화만 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좀 빈약한데?’
준비가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심하게 충분히 준비했다고도 볼 수 없었다.
특히나 제국에서 열리는 티파티인 것을 감안했을 때 더더욱.
“그럼 마음껏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던컨 백작 영애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종을 한번 흔들었다.
청명한 종소리가 퍼지고, 각 자리에 놓여 있는 찻잔에 하녀들이 다가와 차를 따라주었다.
우습게도 차는 고급 찻잎을 사용했는지 향이 무척 좋았다. 게다가 자신이 로니카 왕국에서 즐겨 마시던 차였다.
벨리아가 그 향을 잠시 음미했다. 그러고는 한 모금 마셔보았다. 역시 고급품이었다.
“입에는 좀 맞으세요?”
던컨 백작 영애가 벨리아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물었다.
“네. 차가 아주 좋네요.”
“아버지께서 선물 받은 차인데, 오늘 티파티를 위해서 기꺼이 허락해주셨답니다.”
백작 영애는 뿌듯하다는 듯 어깨를 펴고 말했다.
그런 던컨 백작 영애가 귀여웠던 벨리아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귀엽네.’
회귀해서 과거로 돌아온 벨리아에겐 지금 여기 있는 귀족 영애들 모두가 한참 어린 동생들처럼 느껴졌다.
이런 이들과 기 싸움이라니. 갑자기 활활 타오르던 의지가 파스스 식어버린다.
한순간에 꺾여버린 의욕에 벨리아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을 편하게 풀고 그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이때만을 기다린 것처럼 벨리아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로니카 왕국에서는 어떤 차를 주로 마시나요?”
“얼마 전 파티에서 칼리드 황자 전하와 함께 춤추시는 모습 보았어요.”
“드레스도 전부 2황자 전하께서 선물하신 건가요?”
어린 소녀들은 벨리아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질문은 벨리아에 대한 것보다 칼리드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
‘뭐야. 의외로 인기가 많잖아?’
소문이 무척이나 무성한 것에 비해 의외로 칼리드는 보기 힘든 사람이었기에 모두가 은연중에 그에 대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2황자 전하께서 공주님께 무척 다정하셨다고 들었는데…… 평소에도 잘 대해주시나요?”
이번엔 조금 걱정이 어려 있는 질문이었다.
마치 칼리드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벨리아는 웃음을 삼켜내며 답을 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칼리드 전하께선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랍니다. 다들 오해를 많이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어머.”
연애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니 다들 관심이 이쪽으로 쏠리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2황자 전하와 함께 공석에 자주 나오시겠죠?”
“물론이죠. 미래의 황자비로서 업무는 모두 제대로 수행할 예정이랍니다. 당연히 칼리드도 함께겠죠.”
벨리아가 칼리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몇몇 영애들이 입을 가리며 꺄르르 웃었다.
확실히 여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처음에 비하면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그렇게 한창 재미있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하녀가 던컨 백작 영애에게 작게 말을 전했다.
백작 영애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칸테리프 공녀께서 도착한 모양입니다. 잠시 마중을 나갔다 돌아올게요.”
그녀의 말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좌중이 조용해졌다.
총총 사라지는 던컨 백작 영애를 뒤로하고 벨리아가 고개를 돌려 방금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던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영애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흐음.’
미리 작당 모의가 되어 있는 모양이지.
벨리아가 태연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제게 궁금하다고 했던 게 뭐였지요?”
“아뇨…….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벨리아와 친밀한 모습이라도 보였다간 마치 무슨 사단이라도 날 것처럼 말을 끊어낸다.
정원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던컨 백작 영애와 함께 엘린 칸테리프가 정원으로 들어섰다.
“늦어서 미안해요. 갑자기 가문에 일이 생겨서.”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마치 주인인 양, 티파티에 참석한 귀족 영애들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꽤나 오만한 태도였다.
“벨리아 공주님께도 사과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늦어선 안 되는데…….”
엘린은 익숙하다는 듯 자리를 안내받기도 전 가장 중앙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니 어쩔 수 없지요.”
기선제압을 하고 싶은 걸까?
타국에서 왔다고는 해도 벨리아는 일국의 공주였다. 그렇기에 칼리드와 결혼 전인 지금도 공적으로는 제국의 귀족들보다는 서열이 높았다.
그런 벨리아가 참석한 티파티에서 공녀가 지각한 것은 무척이나 큰 무례였다.
하지만 제 편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것을 지적하기란 쉽지 않았다. 분명 칸테리프 공녀도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늦었을 테고.
물론 그렇다고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 우스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뼈가 담긴 말을 건네었다.
“게다가 티파티 주최자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나무랄 수 있나요.”
계속 상냥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벨리아가 냉소적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는지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엘린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던컨 백작 영애가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려는 듯 종을 한 번 더 흔들었다.
“다음 디저트를 준비하겠습니다.”
아주 신속하게 두 번째 디저트가 준비되었다.
“오늘 던컨 백작 영애가 공주님께서 오신다고 신경을 많이 쓴 모양입니다.”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진 과자들과 케이크를 바라보며 엘린 칸테리프가 말했다.
마치 연극배우 같은 과장된 몸짓으로 테이블의 디저트들을 가리키면서.
“그렇지요?”
그러고는 상냥한 얼굴로 벨리아에게 물었다.
벨리아가 여상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제국의 티파티가 어떻게 준비되는지 모르는 타국의 사람들은 이런 말에 걸려들기 쉽다. 그래서 이런 잔꾀를 냈겠지.
여기서 벨리아가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고 대답하면 제국의 사교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 모든 걸 뻔히 알면서 예의상 좋은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준비가 미흡했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예의도 모르는 안하무인이라고 소문이 퍼지겠지.
벨리아는 퇴로를 잘 막아둔 칸테리프 공녀를 향해 속으로 박수를 쳤다.
‘생각보다 훨씬 영리해.’
그녀는 벨리아가 어떤 대답을 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