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바뀐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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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바뀐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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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바뀐 미래
2023.03.18.
“벨리아 로니카예요. 반가워요, 칸테리프 공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는데도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살아났다.
엘린 칸테리프.
모든 권력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제국 의회의 수장인 칸테리프 공작의 고명딸.
하지만 유독 벨리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무척 밝고 예의 바른 태도였지만, 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칸테리프 공녀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못마땅한 눈초리를 흘렸다는 것을.
‘……이번에도 사이좋게 지내긴 글렀네.’
굳이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피곤하게 일일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공주님께선 제국이 처음이시죠? 모르는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세요.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어머. 공녀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를 표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벨리아와 칸테리프 공녀는 상냥한 얼굴의 가면을 쓰곤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서로를 무척 탐탁지 않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벨리아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물어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둘 다 태연한 척 인사를 나눴다.
“벨리아.”
“아, 칼리드.”
어느새 돌아온 칼리드가 벨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칸테리프 공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런가.”
칼리드는 한쪽 손으로 벨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반대쪽 손으로는 벨리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목마르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 이따 마실게요.”
칸테리프 공녀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오로지 벨리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2황자 전하. 오랜만입니다.”
엘린 칸테리프가 치마를 슬쩍 붙잡고 칼리드를 향해 인사를 건네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선 말했다.
“아아. 공녀도 건강해 보이는군.”
대화할 의지가 전혀 없는 태도였다.
“전하를 파티에서 뵙는 건 처음이군요.”
“……형님은 어디 갔나? 공녀는 왜 혼자 있지? 곧 약혼한다고 들었는데.”
귀찮게 하지 말고 네 약혼자인 라울에게 가라는 얘기였다.
엘린이 분한 감정을 삼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음에는 차갑고 자기밖에 모르는 오만한 황자가 누군가에게 절절매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재밌었는데, 지금은 마냥 속이 뒤집혔다.
‘……어울리지도 않게!’
저 공주가 뭐라고!
라울은 또 어디에 가 있는지!
자신이 왜 이들 앞에서 초라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
엘린 칸테리프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영애였다.
황녀가 없기에 미혼의 여성 중에선 칸테리프 공녀의 영향력을 능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벨리아 로니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엘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라울 전하께서는 잠시 폐하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렇군.”
본인이 물어놓고선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 칼리드가 무심하게 답했다.
점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걸 느낀 벨리아가 칼리드의 손을 떼어내었다.
“왜?”
“그만해요. 공녀께 실례예요.”
무척 작은 소리로 나눈 대화였지만, 근처에 있던 엘린에게도 들렸는지 그녀가 잔뜩 힘이 들어간 입꼬리를 애써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제가 두 분에게 방해가 되었나 보군요. 그럼 벨리아 공주님. 나중에 다시 뵙지요.”
“미안해요, 공녀. 대신 사과할게요. 다음에 티타임이라도 함께해요.”
“네. 그럼.”
엘린이 쌩하니 몸을 돌려 사라졌다.
“공녀에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요.”
“원래 난 아무나하고 말 안 섞어.”
벨리아가 그의 오만한 말투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한없이 차갑고 냉담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죄다 잊어버린 채, 이렇게 자꾸 놀라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를 조금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사방에 적을 만들 이유는 없으니까.
“……칼리드.”
벨리아가 조용히 입을 떼어내려던 찰나.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가 음료를 쏟은 모양이었다. 벨리아는 슬쩍 그곳에 눈길을 주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어……?”
이상했다.
그때는 칸테리프 공녀가 어느 백작 영애에게 음료를 쏟았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디.”
이번엔 한 청년이 백작 영애에게 와인을 쏟았다.
“벨리아. 왜 그러지?”
사람이 바뀌었다.
사건은 그대로인데, 주역이 달라졌다.
‘……미래가 변하고 있는 걸까?’
벨리아는 그 사실이 기꺼우면서도 조금은 불안해졌다.
* * *
벨리아는 칼리드에게서 받은 서류를 살펴보며 물었다.
“진행이 생각보다 더디네요?”
지금 벨리아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라울이 조사를 진행 중인 불법 도박 시설에 대한 보고서였다.
“한창 행동에 나서야 할 시기에 갑자기 로니카 왕국으로 떠났으니 그럴 수밖에.”
칼리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라울은 제국으로 돌아온 이후 지금껏 보류해 두었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벨리아가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진행되는 속도가 더뎠다.
아무래도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제 방법은 보류해야겠어요.”
시기상 아직은 라울이 도박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잘못 건드렸다가 도리어 이쪽이 당할 수도 있다.
로니카 왕국에서 라울이 칼리드에게 완패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무능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파티에서도 느꼈지만,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섣불리 건드리기엔 위험이 컸다.
이미 많은 것들이 비틀렸다.
그러니 자신이 말하는 미래의 상황이 전부 들어맞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우선 그를 내버려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는 것이 좋겠어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턴 상황에 맞게 판단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칼리드가 잘하는 분야다.
“그대가 겪었던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면, 확실한 시기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지겠군.”
“맞아요. 그건 저 혼자선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칼리드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 그대가 알아보았듯 내가 가진 게 좀 많잖아?”
칼리드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벨리아는 믿고 있다는 눈빛과 함께 칼리드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그러자 칼리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참 잘 맞는 것 같지 않아? 그대가 하지 못하는 일은 내가 잘하는 일이야.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걸 그대는 모두 알고 있지. 이만하면 완벽한 조합 아닌가?”
진지하게 말하는 칼리드를 보곤 벨리아가 샐쭉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자꾸 세뇌하지 말아요.”
“알면 좀 당해주지?”
칼리드가 벨리아의 머리에 턱, 손을 올려놓으며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것참 안타깝군.”
칼리드가 벨리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칼리드!”
벨리아가 버럭 화를 내려 했지만, 칼리드가 재빨리 손을 떼어내곤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지금쯤 라울 녀석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겠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벨리아를 바라보며 칼리드가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때 말했던 선물. 오늘 도착했을 테니까.”
“아…….”
라울이 심어둔 첩자를 말하는 거겠지.
벨리아가 그에게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재촉했다.
“기사부터, 시종, 요리사……. 곳곳에도 잘 숨겨두었더군.”
설마…….
“죽였나요?”
“아니. 그대가 내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걸 아는데 무작정 죽일 순 없지.”
칼리드가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펴고 말했다.
“처음엔 그들을 모두 죽인 다음 라울 녀석에게 선물할까 했는데 그대 생각을 하며 꾹 참았어.”
어서 칭찬해 달라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벨리아가 맞장구를 쳐 주었다.
“잘했어요. 첩자들은 어떻게 처리했어요?”
“죄다 하루아침에 잘랐지. 죄목은 황족 모욕죄로. 재판에 넘어갈 일이니,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잘했어요. 라울이 짜증이 좀 나겠네요.”
그 꼴을 구경하러 가면 참 재밌을 것 같은데.
“어쨌든 내 동향을 파악하려던 건 이제 불가능해졌으니 이쪽이 꽤 신경 쓰일 거야.”
“당분간 2황자궁에 들어올 사람은 제가 직접 뽑을게요. 혹시라도 제가 아는 얼굴이면 걸러낼 수 있을 테니까.”
라울의 사람이라면 벨리아가 몰라볼 리가 없다.
‘굳이 위험을 안고 있을 필요는 없어.’
내부의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로니카 왕국에서 벌인 일들이 워낙 이목을 끌었으니 지금은 잠시 몸을 사릴 때다.
그러니 일단은.
“제가 사교계에 자리를 잡는 걸 우선시해야겠어요.”
분명 방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니카 왕국에서부터 생각했던 대로 일을 진행한다면 그들이 끼어들 틈은 생기지 않으리라.
자신 있다는 벨리아의 표정에 칼리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생각해 둔 것들이 있나?”
“자선사업을 해보려고요.”
“어떤 종류로?”
벨리아는 이전부터 제국의 밑바닥에서부터 인식을 바꾸겠다고 이야기를 해 왔었다.
자선사업은 그것의 또 다른 방법이었다.
‘칸테리프 공녀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니 더욱 효과가 좋을 거야.’
무엇보다도 2황자비가 다수의 제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상징성이 있다.
“우선 보육원을 후원하는 것부터 시작할 거예요. 그 이후엔 어려운 예술가들을 후원할 생각이고요.”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라 말하는 것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최후엔 의약 사업 쪽으로 방향을 틀겠지만, 어쨌든 제국민들이 저렴하게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고 싶어요.”
과거에도 그랬듯이 의약 사업은 꼭 진행하고 싶었다.
“결국은 삶과 죽음이 제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요.”
게다가.
“지금 시작해야 나중에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내년 겨울에는 유례없는 한파가 찾아온다.
“그때 말했던 그 폭설인가?”
역시 척하면 척이다.
칼리드는 벨리아가 회귀를 고백하던 날 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네. 분명 많은 눈이 내려서 이동조차 어렵겠죠. 당연히 추위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이 많이 생길 거예요.”
“……흐음.”
“저흰 그걸 미리 알고 있잖아요. 자연재해를 저희가 막아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대비는 할 수 있죠.”
벨리아가 씨익 웃었다.
“제가 자선사업으로 지어둔 많은 시설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칼리드의 인지도가 올라갈 것이고, 제국민 사이에서 2황자의 능력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요.”
벨리아가 바닥에서 바구니 하나를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뭐지?”
“제게 도착한 초대장이요.”
무슨 초대장이 이렇게나 쌓일 정도로 도착한단 말인가.
칼리드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몇 군데를 추릴 거예요. 혹시라도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게 있다면 얘기해줘요.”
벨리아가 모르는 또 다른 사실이 있을 수 있으니 철저한 조사 후 확실하게 결정하고 싶었다.
“뭐든 물어 봐, 벨리아.”
그녀의 부탁에 칼리드가 즐겁다는 듯 기꺼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