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오래된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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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오래된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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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오래된 악연
2023.03.14.
칼리드가 옷장을 가득 채워두어서 그런지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와 그에 어울릴 장신구까지 고른 벨리아가 치장을 위해 화장대 앞에 앉았다.
“전하께서 공주님을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벨리아에게 배정된 시녀들이 조잘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모두 제국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2황자의 궁에서 종신 시녀로 일을 하는 자들이었다.
“머리카락이 은빛이라 너무 아름다워요.”
“공주님이 처음 도착했을 때 정말 요정이 나타난 줄 알았어요.”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벨리아에게 아부를 던졌다.
원체 시끄러운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벨리아였기에, 그들의 수다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 사소한 행동 또한 그들의 입을 통해 여기저기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벨리아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보다, 오늘 파티에 칸테리프 공녀님도 참석하신다던데…….”
“칸테리프 공녀?”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벨리아는 모른 척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다시 마주치겠구나 싶어 괜히 한숨부터 나왔다.
늘 자신에게 가시를 잔뜩 세우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던 사람.
처음에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벨리아는 퍽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가 1황자 라울의 비로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거론되던 사람임을 알았다.
자신이 1황자비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을 텐데 갑자기 타국의 공주가 나타나 그 자리를 빼앗고 황자비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칸테리프 공녀가 벨리아를 괴롭히는 방법은 무척이나 교활했었다.
“네. 최근에 1황자 전하와 공녀님이 약혼한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벨리아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자 시녀들이 더 신이 나서 아는 이야기를 모조리 꺼내기 시작했다.
“공주님께서 1황자 전하를 거절하셨잖아요. 그 이후 곧바로 공녀님과 혼담이 오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벨리아가 라울을 거절한 순간부터 이전 삶과는 달라지는 게 당연했다.
언젠가 그도 제국의 황자로서 누군가와 결혼을 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었다. 그게 에르제도 아닌 칸테리프 공녀일 줄은 몰랐지만.
“아아……. 그럼 1황자 전하와 약혼을 앞두고 있으니 나와도 자주 마주치겠구나.”
“맞아요. 하지만 공녀님 성정이 꽤 대단하시거든요. 그러니 괜히 공주님께 시비를 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셔요.”
이번 삶에선 원하는 대로 라울과 이어지게 되었는데도 자신에게 못되게 굴까?
벨리아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겠지. 이번엔 자존심이 상한다고 핑계를 대려나?’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라울인지.
이미 그를 겪었던 벨리아로서는 칸테리프 공녀의 선택을 말리고 싶었지만, 굳이 오지랖을 부리진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가 라울과의 결혼을 그토록 바라왔으니까.
‘겉모습만 멀쩡하다고 괜찮은 사람이 아닌데.’
뭐, 벨리아 자신도 그걸 몰라서 그와 결혼까지 했었으니 공녀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긴 했다.
“그래도 오늘은 공주님을 환영하는 파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맞아요. 오늘의 주인공은 공주님이시니까요!”
하녀들은 벨리아가 칸테리프 공녀를 걱정하는 줄 알았는지 응원의 말을 건넸다.
공녀가 저를 해코지할까 걱정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자신을 위해주는 마음이 고마워 벨리아는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느덧 치장이 다 끝나갔다.
머리와 화장을 마무리하고 드레스까지 입은 벨리아는 마지막으로 장신구를 하나씩 착용해 보고 있었다.
“벨리아.”
그때 칼리드가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벨리아를 불렀다.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짙은 색의 연미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더없이 멋있었다. 평소와 달리 머리도 뒤로 넘기고 옷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벨리아는 그의 색다른 모습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쁘군.”
“당신도 멋있어요.”
그 말을 바랐는지 칼리드가 눈을 접으며 웃음 지었다.
“목걸이는 아까 착용했던 게 더 예뻤어.”
언제 또 그걸 봤는지.
벨리아는 웃음을 꾹 참고 그가 예쁘다고 했던 푸른 사파이어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걸이는 이걸로 할게.”
시녀들이 빠르게 목걸이를 교체해 걸어주는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드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벨리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어디 한번 라울 녀석의 속을 뒤집어 놓으러 가볼까?”
더없이 유쾌한 그의 말에 동조하며 벨리아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 * *
파티장으로 향하는 길은 그가 머무는 궁과는 정반대로 무척이나 화려했다.
벨리아는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무섭나?”
자꾸만 흘낏흘낏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칼리드가 물었다.
벨리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긴, 그대는 이미 겪은 일일 테지.”
그렇게 말하는 칼리드의 표정이 순간 복잡하게 변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대의 곁에 있으니까.”
오늘 자신들을 보고 라울은 분명 배가 아파서 속이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삐죽 솟았던 칼리드의 짜증이 스르륵 사라졌다.
“별거 없을 거예요.”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칼리드.”
벨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칼리드를 빤히 응시했다.
“혹시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괜히 속마음을 들킨 듯해 칼리드가 딴청을 피웠다.
“지금은 지켜볼 때예요. 우리가 자리를 잡고 나면 곧바로 끌어내릴 거니까 괜한 짓 하지 말아요.”
벨리아는 칼리드가 라울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에게 경고해야만 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괜히 라울에게 시비 걸지 말아요.”
“그대는 정말 너무해.”
“당신과 약혼도 했고 결혼도 할 거고, 함께 밤도 보내고 매일매일을 함께하고 있는데 대체 뭘 너무한다는 거예요?”
벨리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질투가 많았다. 그리고 그건 회귀 사실을 밝힌 뒤 더 심해졌다.
그의 불안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어떻게 해야 그를 안심시켜줄 수 있을지 벨리아로선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 당신의 곁에 있을 거잖아요.”
그저 곁에 있겠노라 몇 번이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했다.
“이제 곧 들어가야 해요.”
이번엔 이전과는 다르게 칼리드의 약혼녀로 소개될 거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렇게나 가슴이 떨려 오는데, 칼리드가 자꾸 다른 걸 생각하고 있으니 벨리아의 입장에선 속이 탔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라울과 자신이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꽤 충격적이었을 테니까.
‘라울과 함께했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게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회귀 사실을 밝혀서 생기는 일들은 벨리아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대가였다.
그러니 견딜 수 있었다. 아니, 견뎌야만 했다.
“칼리드 2황자 전하와 로니카 왕국의 벨리아 공주님이십니다.”
벨리아는 칼리드의 손을 붙잡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거대한 문을 통과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소문이 무성했던 로니카 왕국의 공주를 보기 위해 집중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과연 얼마나 아름답길래 제국의 황자들이 모두 청혼을 했을까.
“……다들 그댈 바라보고 있어.”
“구경하라죠, 뭐.”
벨리아에겐 익숙한 시선들이었다.
“그대가 너무 예뻐서 그래.”
칼리드는 잔뜩 못마땅한 말투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필 옷도 예쁜 걸 입어선…….”
이 옷도, 장신구도, 구두도.
모두 칼리드가 벨리아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즐겁게 골라놓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홀린 듯한 눈빛에 이제 와 그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양 구는 모습에 벨리아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곳곳에서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는 탄성들이 들려왔다.
“과연 소문대로야.”
“……황자 전하들이 반할 만했네요.”
그리고 승자는 칼리드였다.
“오오. 벨리아 공주. 참으로 아름답군.”
먼저 도착한 황제가 푸근하게 웃으며 벨리아를 맞이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벨리아였기에 황제가 마지막 등장을 양보한 것이다.
이는 제국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대우였다.
‘나를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로니카 왕국이 제국에게 무척 중요한 나라라는 것을 모두에게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속마음이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벨리아는 황제가 엄청난 배려를 해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대우야.’
2황자의 약혼녀이기 이전에 로니카 왕국의 공주로서 만인에게 각인되었다.
무척이나 산뜻한 출발이다.
“모두 잔을 들게.”
황제는 로니카 왕국의 공주를 황자비로 맞이한다는 의미로 축배를 들어 올렸다.
잉고트 제국과 로니카 왕국의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자는 의미의 축배사도 함께였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칼리드는 벨리아의 손을 이끌고 연회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2황자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춤을 추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희귀한 광경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들을 구경했다.
“칼리드. 춤 잘 춰요?”
“못 출 것 같나?”
자신만만한 그의 대답에 벨리아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참고로 저 춤 무지무지 잘 춰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아가 칼리드를 도발했다.
칼리드는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머금은 채 벨리아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둘은 음악에 맞춰 몸을 자연스레 움직였다.
벨리아는 내심 칼리드가 춤을 잘 추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가 이런 파티에서 춤을 즐겼을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어?’
그런데 칼리드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벨리아를 리드했다.
“……파티는 대부분 참석하지 않았다면서요.”
“큭큭.”
칼리드는 벨리아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으며 웃음을 삼켰다.
“설마, 제게 거짓말을 했나요?”
“그럴 리가.”
“그런데 이게 뭐예요?”
“내가 춤을 잘 추면 좋은 게 아닌가?”
벨리아가 뚱하게 볼을 부풀렸다.
그의 손을 누군가가 붙잡고 함께 시간을 나눴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누구랑 췄는데요?”
“하하하.”
누가 들어도 질투하는 게 분명한 억양이었다.
그에 칼리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2황자가 소리 내 웃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됐어요.”
“벨리아. 내겐 뭐든 그대가 다 처음이야.”
요망한 사냥개 같으니.
벨리아는 눈을 흘겼다.
음악이 어느새 끝나고 둘은 홀 중앙에서 빠져나왔다.
“목이 말라요.”
“잠시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뚱한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물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무척 화려하게 치장한 누군가가 벨리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엘린 칸테리프예요. 반가워요.”
칸테리프 공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