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견디는 사람 (37/88)


#37. 견디는 사람
2023.03.07.


북받친 감정을 갈무리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적막하던 침실은 어느덧 벨리아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찼다.


“눈을 떠 보니 제가 정원에서 잠들어 있더라고요.”

벨리아는 누워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간절히 털어놓고 싶었던 비밀이었으니까.

하소연하고 싶었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혼자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벨리아도 회귀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조차 혼란스러운 이 상황을 누군가가 온전히 믿어줄까, 하는 의심이 쌓이고 쌓여 결국 혼자서 감내했었다.


“그 곁에는 라울이 있었고?”

칼리드가 벨리아의 곁에 누워 아이를 어르듯이 다정하게 물었다.

벨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놀라서 그를 뿌리치고 성으로 마구 뛰어 들어갔는데……. 가족들이 전부 살아 있고, 성도 무사하고…….”

벨리아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말을 띄엄띄엄 이어갔다.

칼리드는 벨리아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까 이번엔 제가 미래를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대가 내게 편지를 보냈을 때겠군.”

벨리아는 당시를 회상해보았다.

만약 클로제가 제국의 2황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아마 벨리아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애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클로제가 이 엄청난 일의 시작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클로제가 당신 얘길 꺼내지 않았다면, 저흰 아마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였는데 칼리드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우리가 우연히 스치기라도 했다면, 난 절대 그대를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치. 하여튼 말은 잘하지.

벨리아가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그때 문득 궁금해졌다는 듯 칼리드가 물었다.


“혹시 그곳에서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들은 게 있나?”

벨리아가 겪었던 시간을 칼리드는 ‘그곳’이라 칭했다.

그게 마치 정말 과거로 회귀했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 그 시간을 실존했던 것처럼 칭하는 말이었으니까.


“……라울이 황제가 되고, 당신은 대공이 되었어요. 혹시 모를 위험을 없애기 위해 몇 번이고 라울이 당신을 죽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죠.”

그 말에 칼리드가 비소를 흘렸다.


“쪼잔하기 짝이 없군.”

그 말에 벨리아가 낮게 웃어버렸다.

쪼잔하다니. 어쩜 이렇게 딱 맞는 표현일 수가.


“후후. 결국 당신은 하사받은 영지에 가서 제가 죽는 날까지 수도에는 오지 않았어요.”

“그런가? 이상하군.”

칼리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벨리아도 그 의견에 동조하며 말을 이어갔다.


“전 당신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는 상황이었고, 라울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쯧. 멍청한 놈.”

칼리드는 라울이 한심했는지 진심으로 혀를 차며 비웃었다.


“맞아요. 멍청했죠. 그래서 절 죽였겠지만.”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대의 마지막 순간에도 라울에게 마음이 있었나? 그렇다면 그건 조금 마음이 아플 것 같은데.”

벨리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아주 오래전에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은 모두 사라졌어요. 그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라울에 대한 마음?

그가 황제가 된 후 서서히 깎이고 부서지고 닳아서 모두 없어져 버린 그 비참한 심정으로…….


“……그렇게 8년을, 버텼죠.”

그녀의 말에 칼리드는 대견하다는 듯 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벨리아가 그만하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더 오래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자꾸만 머리를 쓰다듬으니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자꾸 만지지 말아요……. 졸린단 말이에요.”

벨리아는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줘 보았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는다.


“칼리……드…….”

그런 벨리아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며 칼리드가 속삭였다.


“괜찮아. 푹 자. 좋은 꿈 꿔.”

그 따뜻한 말을 마지막으로 벨리아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하…….”

벨리아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칼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8년이라.’

칼리드는 그녀가 겪었을 그 아득한 시간을 셈해보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그토록 벽을 세웠던 걸까.

늘 우리는 계약 관계라며 자신을 밀어내던 원인이 이것이었을까.


‘라울 녀석이 배신했으니까.’

그녀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게 라울 때문이라 생각하니까 자꾸만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래도 이걸 그냥 넘어가긴 좀 화가 나는군…….’

칼리드는 라울에게 작게나마 선물이라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벨리아의 등을 가볍게 토닥토닥 두드렸다.


 

* * *

황후가 머무는 궁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적막했다. 시녀나 시종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궁을 지키는 기사도 몇 없었다.


“같이 들어갈까?”

황후궁의 입구에서 칼리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 만남은 황후와 자신, 이렇게 단둘의 시간이어야 했다.

게다가 황후를 만나고 싶지 않음을 온몸으로 피력하는 그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미소 짓는 벨리아의 표정에도 칼리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풀리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벨리아는 칼리드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아주곤 굳게 닫혀 있는 황후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복도를 걸어 도착한 황후의 방은 희미한 연기로 가득했고, 묘한 향기가 온 공간을 휘감고 있었다.

황후는 소파에 꼿꼿하게 앉아 생기 없는 표정으로 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도 비슷했었지.’

이전 삶에서 황후에게 처음 인사를 왔던 날, 어두운 표정의 그녀와 무거운 황후궁의 분위기에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벨리아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황후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국의 달에게 영광을 바칩니다. 로니카 왕국의 첫 번째 공주, 벨리아입니다.”

제국의 예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인사를 건넨 벨리아가 살짝 무릎을 접었다가 반듯하게 섰다.

그 모습에 황후의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감돌았다.


“제 무례한 부탁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앉거라.”

황후는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딱딱한 표정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곤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벨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황후가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황제가 어쩐 일로 너 같은 아이를 칼리드에게 허락했는지 모르겠구나.”

갑작스러운 황후의 말에 벨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뜻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네가 칼리드를 선택했다지. 로니카의 공주가 제국의 황자들을 양손에 두고 재어보고 있다는 이야기는 황후궁까지 닿더구나.”

“그건…….”

“되었다. 나무라는 뜻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벨리아의 말을 끊어내며 황후가 뒤쪽에 서 있던 시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시녀가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 찻잔과 디저트를 느릿느릿 정리해 올려두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런 시녀의 행동이 못내 거슬린 벨리아가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고, 온전히 닫혀 있지 않은 문을 발견하고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시녀의 태도에서 황족에 대한 예우나 정중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저건 오히려 이 대화를 염탐하려는 행동에 더 가깝지 않은가.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황후는 시녀의 태도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손을 뻗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혔다.


‘감시인가…….’

이 대화를 듣고 누구에게 전하려 했던 걸까?

벨리아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방 안을 살폈다.

그때 황후가 입을 열었다.


“네가 칼리드를 선택한 건 의외였어. 그저 곱게만 자라 세상 물정 모르고 마냥 행복한 미래만을 꿈꾸는 철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지.”

그녀가 벨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무엇을 원해서 칼리드를 골랐느냐.”

벨리아는 무어라 대답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황후는 칼리드에게 제대로 된 어미인 적이 없다고 들었다.

게다가 칼리드가 황제에게 냉대를 받는 동안에도, 황비가 황궁의 주인인 양 활개 치는 동안에도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세상 돌아가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조용했었다.

그런 그녀가 칼리드에 대해 질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가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그래서 벨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시간을 벌어볼 요령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왔다.


‘……어?’

 

 
그리고 차에서 나는 미약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순간, 벨리아의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찻잔 받침과 찻잔이 잘게 부딪치며 덜그럭 소리가 났다.


“왜 그러느냐?”

벨리아는 차를 차마 입에 대지 못한 채 겨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그 향이 어째서…….’

라울이 벨리아에게 억지로 들이부었던 독이 든 차.

그 차와 같은 향이었다.

진한 바닐라 향과 약초의 씁쓸한 향이 뒤섞여 도저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 냄새가 어째서 여기에서 느껴진단 말인가.

벨리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니야.’

자신이 맡았던 향보다는 훨씬 약했다.

그러니 어쩌면 비슷한 향을 내는 일반적인 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차를 좋아하는 벨리아가 평생 처음 맡아본 향이었기에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그때 황후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역시나 어째서 황제가 너를 칼리드에게 허락했는지 알 수가 없구나.”

태연한 황후의 목소리에 벨리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선 이게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래.”

대답은 평이했다.

마치 날씨가 참 좋네요. 에 대한 답인 것처럼.


“언제부터…….”

이전 삶에서도 황후는 독을 꾸준히 마시고 있었다는 건가.

벨리아가 차마 떨어지지 않은 물음을 던지기 위해 겨우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언제부터 이것을 마셨습니까.”

“글쎄. 몇 달은 족히 넘은 것 같구나.”

황후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했다.


“……이젠 슬슬 나를 죽이고 싶은 모양이지.”

……황제였나.

벨리아가 아득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싸늘하게 죽어가던 제 환영이 황후의 뒤로 펼쳐졌다.

잔잔하던 마음에 마치 폭풍이 인 것처럼 거세게 감정이 흔들렸다.


“이만 죽어줬으면 해, 벨리아.”

독이 든 차를 건네며 말하던 라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모두 알면서도……!”

울컥, 올라온 감정에 벨리아가 무어라 한마디를 하려는 찰나, 황후가 딱딱한 표정을 풀고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버티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벨리아는 깨달았다.

황후는 미치지 않았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차마 말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고 미소 짓는 황후의 모습에서 그녀가 버티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것을 물을 처지는 아닌 것 같구나. 칼리드의 비가 될 아이라기에 한번 얼굴만 보려 했거늘. 참견이 과해.”

“……황후 폐하. 차는 줄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건…….”

그때 황후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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