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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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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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2023.03.04.
뜬금없는 이야기에 벨리아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지 칼리드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벨리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음, 그대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라도 할 셈인가?”
질문을 꺼내는 이 순간에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슬쩍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아니면 동화책이라도 본 건가?”
이 이야기가 진실일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벨리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벨리아.”
“네.”
칼리드가 벨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곤 그녀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이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지금도 마도구가 활발히 연구되고 있고,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마저 개발하고 있지.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거, 어쩌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몰라.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해.”
그는 애써 이해해보려는 듯 말을 길게 이어갔다.
하지만 벨리아는 그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미래에도 공간을 뛰어넘거나 시간을 뛰어넘는 건 불가능했어요.”
칼리드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로 그녀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몇 번이고 곱씹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마주친 벨리아의 진지한 눈빛에 칼리드가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솔직히, 온전히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야.”
“알아요. 그래서 저도 고민 많이 하고 꺼낸 이야기예요.”
칼리드의 말에 안색이 어두워진 벨리아는 애써 굳어버린 입술을 달싹여 말을 이었다.
“칼리드. 저는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어요. 이건 꿈도 아니고, 동화도 아니에요. 회귀는 제가 겪은 현실이었어요.”
“……음.”
칼리드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이내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감아버린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아주 느리게 하나씩 벨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아…….’
벨리아는 밀려오는 허무함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믿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용기를 내서 겨우 꺼낸 말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믿어줄 줄 알았어.’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자신이 우겨대는 것들을 다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부모님도, 오라버니도 확실한 증거 없인 들어줄 수 없다 했던 것들을 칼리드는 믿어줬지 않은가.
‘우스워…….’
서로에게 숨기는 게 있었다. 서로를 믿지 못했다.
처음부터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우리는 시작부터 계약으로 얽매였던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대체 왜…….
“벨리아.”
그가 이름을 부르자, 벨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칼리드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벨리아는 잠시 망설였다.
“벨리아.”
칼리드가 다시 한번 벨리아를 불렀다. 팔은 여전히 벨리아를 향해 뻗어 있는 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러움이 몰려왔다.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믿음이었는지. 벨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라고, 자신이 하는 말은 모두 믿어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바보 같아…….’
그래서 이렇게 서운한가 보다.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믿기 힘든 일임을 알면서도, 왜인지 그만은 아닐 거라고…….
“미안해.”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는 벨리아를 본 칼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앉아 있던 벨리아를 들어 품에 쏙 넣고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졸지에 칼리드의 허벅지에 앉은 게 불편해 몸을 꼼지락거렸지만, 칼리드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좀 전보다 더욱 힘을 꽉 주어 벨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네가 울면 나는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운다고?
벨리아는 눈가를 슬쩍 쓸어보았다. 그러자 물기가 손등에 묻어났다. 당황스러웠다.
서둘러 슥슥, 눈가를 닦아내곤 벨리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믿기 어렵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믿어. 전부 믿어. 하지만, 내게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칼리드가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벨리아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대가 회귀했다는 이야기, 자세하게 듣고 싶어.”
벨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떼어냈다.
“그곳에서 저는 제국의 황후였고,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어요. 제 자의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죠.”
벨리아가 덤덤하게 꺼낸 목숨을 잃었다는 말에 칼리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자세하게, 설명해 봐.”
벨리아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곳에선 라울이 황제였고 자신은 그의 황후가 되었다고.
“라울과 연인이었나?”
벨리아가 라울과 연인이었다는 것.
그 사실이 칼리드에겐 가장 거슬린 부분이었는지 한 번 더 되물어 왔다.
“한때는 그랬었죠.”
악연이었지만.
끔찍한 기억뿐이었다.
벨리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게 그대가 라울을 무너뜨리겠다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나?”
“네.”
“하아…….”
칼리드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계속 모르는 게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가 그를 감쌌다.
‘아니야. 계속 모르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게 더 끔찍해.’
라울에 대한 벨리아의 감정.
칼리드는 언제나 그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궁금했던 답을 막상 듣게 되었는데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도무지 일그러진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궁금증이 명확하게 해결되었음에도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벨리아를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날 선택한 이유는?”
“당신이 유일했으니까.”
벨리아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테라스로 향했다.
그에게 회귀 사실을 털어놓던 내내 자꾸만 속이 답답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사람이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상처에는 한계가 있는 줄 알았는데…….”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며 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한번 입었던 상처를 또 후벼 파면 더 큰 아픔으로 돌아오더라고요.”
밖은 어느덧 깜깜한 밤이었다.
벨리아는 밤하늘을 등지고 서서 칼리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울이 저를 죽였어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억지로 제 입에 독약을 들이부었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절절한 고통이 배어 있었다.
“로니카 왕국도, 내 가족들도. 모두 그의 손에서 부서졌어요.”
라울을 향한 증오와 원망, 분노가 글자마다 진득하게 서려 있었다.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겐 그를 무너뜨릴 수 있도록 도와줄 이가 필요했고, 그건 오로지 당신뿐이었어요.”
칼리드는 벨리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바깥보다 방이 더욱 어두워 칼리드의 표정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의 그는 그 어떤 반응도 없었고, 그게 벨리아의 마음에 조바심을 일게 했다.
벨리아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제 손을 잡은 걸 후회하나요, 칼리드?”
사실을 밝히는 지금 이 순간, 매일 감춰왔던 불안감이 짙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직접 그를 끌어들였으면서 그의 의사보다도 언제나 제 감정이 더 중요했었다.
그렇게 이기적으로 군 주제에 그에게서 후회한다는 말이 나올까 봐 벨리아의 내면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든지 벨리아는 망설임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자신은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 이후의 일은 그의 몫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부리는 욕심은 여기까지여야만 했다.
설령 그가 믿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자신을 다독이면서.
“나는…….”
계속 침묵을 지키던 칼리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보다 라울 녀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게 화가 났었어.”
그래서 그는 어울리지도 않게 일부러 벨리아에게 보란 듯이 정보들을 흘렸다.
“그런데 그게 전부 그놈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말하면 더 화가나.”
그런데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때의 난 뭘 어쩌고 있었지?”
칼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벨리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내가 그대를 내버려 뒀을 리가 없어.”
칼리드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마치 상처 입은 벨리아를 어루만지듯.
벨리아가 그의 커다란 손에 뺨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전 삶에서 전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칼리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황궁에서 함께 지내면서도 마주치지 않았다니 이상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막지 않고서야 그러긴 쉽지 않았을 테니까.
“네. 단 한 번도. 우연히 스친 적도 없었어요.”
칼리드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라울의 짓이겠군.”
“그럴지도요.”
그때 만약 당신을 만날 수 있었다면, 조금은 과거가 바뀌었을까.
“여전히 나는 그대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말이 실감이 안 나.”
칼리드가 벨리아를 따스하게 안아 들었다.
“하지만 내게 보여준 그 고통과 상실감, 분노가 거짓은 아니겠지.”
그러곤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벨리아를 눕혀주었다.
“그대가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거겠지?”
“맞아요. 라울이 처절하게 무너졌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을 잃고 처참하게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벨리아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렇게 될 거야. 그대가 원한다면.”
칼리드가 맹세라도 하듯이 벨리아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작은 행동에 벨리아는 복수심으로 잔뜩 뾰족해졌던 감각이 조금씩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며 결국 제 편에 서주는 칼리드의 모습에 벨리아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우리의 계약은 그를 무너뜨릴 때까지 계속될 거예요.”
“그래.”
“그것을 위해서라면 전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러니…….”
벨리아가 손을 뻗어 칼리드의 멱살을 붙잡고 그를 잡아당겼다.
“절 배신하지 말아요, 칼리드.”
칼리드는 코앞까지 다가온 벨리아에게 쪽, 소리가 나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곤 아주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그대가 내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
그 말에 벨리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배신한 사냥개에겐 죽음뿐이에요.”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목줄을 끊고 도망갈 생각은 말아요.
벨리아의 곧은 눈빛에 칼리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대가 이럴 때마다 내가 그대에게 꽁꽁 묶였다는 게 실감이 나.”
말과 달리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벨리아는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칼리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당신이어서 다행이에요.”
벨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칼리드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벨리아를 바라보던 칼리드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벨리아를 꼭 안았다.
그녀가 제 표정을 보지 못하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그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비밀을 털어놓은 벨리아는 결코 자신의 손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사냥개를 길들이려 했지만, 결국 길들여진 건 주인 쪽일지도 모른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벨리아를 서서히 옭아맨 실이 그녀의 온몸을 칭칭 휘감고 있었다.
‘참 어여쁘게도.’
손에 꼭 쥔 목줄로 안심하고 있으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가 그대의 복수를 도와줄게.”
그러니 내 품에서 벗어나지만 마.
그렇게만 있어 준다면 나를 고른 게 그대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칼리드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