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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탐하다 (35/88)


#35. 탐하다
2023.02.28.


욕망이 넘실거리는 그의 음성에 벨리아의 시선이 잘게 떨렸다.


“당신의 욕심은 어느 정도인데요?”

“말했잖아. 그댈 가둬버리고 싶다고. 나 말고는 다른 누구도 생각할 수 없게끔.”

그 말에 벨리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조금 힘을 주어 그를 밀어내며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꼈는지 칼리드가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

벨리아가 칼리드의 가슴에 손을 대고 그를 천천히, 천천히 뒤로 밀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그러니 조급해하는 거겠죠.”

벨리아는 계속해서 칼리드를 밀며 한 발짝씩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뒤로 물러선 칼리드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고, 그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침대 위였다.


“그래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르죠. 각자 감추는 게 있고, 서로를 속이고 있어요.”

칼리드가 침대에 누운 채 고개만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벨리아는 긴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옆으로 넘기고는 아주 느릿하게 칼리드의 위로 올라탔다.


“지금…….”

칼리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러니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죠? 하고 벨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그 모습이 쓸데없이 야했다.

지금 자신의 위에 앉아 있는 벨리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칼리드의 이성이 위태로웠다. 가느다란 실처럼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뒷일은 장담 못 해, 벨리아.”

칼리드의 목소리가 정욕에 물들어 탁하게 갈라졌다.

벨리아는 농염하게 웃었고, 칼리드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미치겠군.’

……아니지.

이미 방까지 들어왔는데 더 참아야 하나?


“칼리드…….”

벨리아가 그의 이름의 끝을 조금 늘어뜨리며 보채듯 불렀다. 그게 결정타였다.


“그대가 알고 이러는 거라면 더 나빠. 알아?”

칼리드는 벨리아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아까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그대는 자꾸만 나를 한계까지 밀어붙여.”

그의 눈동자에 정염이 깃들었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벨리아를 감쌌다. 벨리아는 손을 뻗어 칼리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

칼리드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 뜨거운 숨은 순식간에 맞부딪힌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떨어져 있던 시간을 메우려는 것처럼 집요하고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키스였다.

끈적이는 입맞춤을 이어가며 칼리드가 벨리아의 등으로 손을 뻗어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벨리아의 드레스가 어깨까지 흘러내리자 칼리드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벨리아.”

허락을 구하듯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제 이름에 등을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자신도 그를 원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벨리아는 그를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을 기대하고 있겠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칼리드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벨리아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오늘은 무척 긴 하루가 될 것이다.

아직도 밤은 오지 않았다.

* * *

언제 잠들었던 걸까.

벨리아가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이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렴풋이 시간이 많이 흘렀으리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날이 밝지는 않았다.

벨리아는 고개를 돌려 곁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조금 가렸지만, 날카로운 콧대와 턱선은 가리지 못했다.

슬쩍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치우자 그의 얼굴이 훨씬 잘 보여 만족스러웠다.
 

 


‘자고 있으니 순해 보이네.’

벨리아는 한참 칼리드의 얼굴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무척 잘생긴 얼굴이라 보고 있기만 해도 즐거워져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이후여서 그런지 이전보다도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그때 앙다문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

자는 줄 알았는데.

벨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칼리드가 팔을 뻗어 벨리아를 꼭 껴안으며 물었다.


“잘 잤어?”

벨리아는 자신이 그를 관찰하던 것을 들킨 게 괜히 부끄러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과 맞닿은 몸에서 그가 작게 웃고 있음이 진동으로 느껴졌다.


“더 자. 아직 이른 시각이야.”

칼리드가 다정히 말하며 그녀를 더 깊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잠긴 낮고 탁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쉬이…….”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벨리아의 움직임이 느껴졌는지 칼리드가 벨리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오늘 피곤한 하루가 될 테니까 더 자두는 게 좋아, 벨리아.”

“……잠이 안 와요.”

“그래도 누워 있어. 내 옆에 그대가 있는 게 오랜만이라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좋겠는데.”

투정을 부리듯 칼리드가 벨리아의 쇄골에 얼굴을 기대었다. 이런 사소한 행위들이 정말로 연인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왠지 텅 비어 있던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칼리드. 졸려요?”

지금이라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말해야지 다짐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 이야기들을.


“아니.”

“그러면 잠깐 일어나 봐요.”

그러나 칼리드는 일어날 기미도 없이 벨리아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칼리드가 잠깐 멈칫하더니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벨리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훑어 내리다 이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안 본 사이에 더 말랐어. 내가 곁에 없으니까 외로웠나?”

“아뇨, 저 그동안 잘 지냈어요.”

“아니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분명해. 조금만 힘주면 부러질 것 같아.”

그가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벨리아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 맞죠?”

벨리아가 고개를 휙 들어 올리며 물었다.


“글쎄.”

누가 봐도 일부러 그러는 게 맞는데 칼리드는 뻔뻔하게 아닌 척하며 이번엔 벨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데 어쩐지 그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고심하다 이야기를 꺼내는 줄도 모르고!

벨리아가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칼리드.”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야 말을 꺼내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그제야 칼리드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근처에 놓인 가운을 가져와 벨리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솔직히 이젠 그대가 무슨 얘기를 꺼낼지 조금 무섭기까지 해.”

칼리드가 근처의 소파에 털썩 앉으며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벨리아도 슬금슬금 침대에서 벗어나 그가 걸쳐준 가운을 잘 여미며 칼리드의 근처에 앉았다.


“그래서 어떤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또 진지해지셨을까?”

“……전 당신의 손을 잡기로 했어요. 라울이 아니라요. 그게 저한테 얼마나 큰 선택인지 모르죠?”

웃음기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지금 벨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앞으로 그녀가 꺼낼 이야기의 무게를 실감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제 인생을 모두 걸고 당신을 선택한 거예요.”

벨리아가 쉽사리 열리지 않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지금 여기서 돌아서면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로 결정했어요.”

“……모든 것을?”

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것들.”

예를 들면 여러 상황을 미리 예지하는 거라든가, 왜 라울을 무너뜨리고 싶은지에 대해서라든가.


“듣고 싶어요?”

“……그래.”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궁금증이 풀리길 기대했지만, 정말로 이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때 칼리드가 벨리아의 말을 멈추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내게 잠시만 시간을 줄 수 있나?”

벨리아는 말없이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칼리드도 마찬가지로 잠시 말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았겠지.’

자신의 말을 들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걸.

벨리아 자신도 이 말을 꺼내기까지 많은 결심이 있어야 했기에, 그도 분명히 어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서우면 듣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빼려는 건 기분이 나쁘지 않은가.

그가 망설이는 모습에 괜히 속이 답답했다. 그러나 벨리아는 내색하지 않고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을 던졌다.


“무섭다고? 내가?”

그리고 그는 벨리아가 던지는 도발에 아주 잘 걸려드는 편이었다.

처음 그에게 계약 연애를 제안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으면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받은 제안을 모두 수락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자 벨리아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땐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었는데.’

그를 이용할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토록 진심이 될 줄도 모르고.


“좋아. 그럼 그대가 내게 숨겼던 것들을 들어보도록 할까?”

“후회하지 않겠어요?”

벨리아는 그가 잠시나마 도망치려고 했던 것을 알았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것처럼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그의 본능이 경고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를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의견 정도야 들어줄 수 있었다.


“후회? 내가 후회 따위를 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칼리드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인생에서 뒤를 돌아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지나온 일을 곱씹으며 후회한다는 건 더더욱 흔치 않은 일이었고. 언제나 앞만 보고 걸어가야만 살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으니까.


“한번 얘기해 봐, 벨리아. 그대가 그토록 꽁꽁 감추었던 비밀을.”

아까까지만 해도 혼란스럽던 표정이 단단해졌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지 전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벨리아는 그에게 숨겨왔던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었다.


“제가 왜 라울을 이토록이나 증오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나요?”

그 물음에 칼리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궁금하지 않았을 리가. 난 그대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는 것보다도 그게 더 궁금했었어.”

벨리아는 그다운 대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벨리아에게 엄청난 도박이었다. 어렵게 털어놓을 이야기를 그가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증거도 내보일 수 없었던 수많은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았는가.

벨리아는 조금 떨리는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러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붙잡고 힘겹게 무거운 입술을 떼어냈다.


“……혹시 누군가가 시간을 건너뛰어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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