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나를 궁금해 하길 바랐어. (34/88)


#34. 나를 궁금해 하길 바랐어.
2023.02.25.


벨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눈썹을 까딱 치켜 올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칼리드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빠르게 끌어당겼다.


“제가 후회할 것 같아요?”

그러면서 벨리아가 자연스럽게 칼리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도발적인 대답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끊어진 것처럼 칼리드는 다급하게 벨리아의 입술을 찾았다.


“히익!”

“아이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얌전히 넘어간다 했다.

로니카 왕국에서 둘이 어땠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봤던 아시드였기에 미리 긴장하고 있었거늘.

이렇게 사람을 안심시켜놓고 뒤늦게 뒤통수치는 게 어디 있냔 말이다!


“벨리아…….”

어딘가 탁한 음색으로 벨리아를 부르는 칼리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거 내버려 뒀다간 진짜 큰일 난다!


“크험!! 큼! 큼큼!!”

아시드가 필사적으로 헛기침을 해대었다.


‘여기선 절대 안 됩니다!’

벨리아 공주와는 입장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여기서 또 무슨 소문을 만들려고!


“푸흡.”

“으응……?”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아시드가 두리번거렸다.


“아하하하.”

맑고 영롱한 소리였다.

웃음소리의 주인은 벨리아 공주였다.


“그만하고 들어가요. 반겨줘서 고마워요, 칼리드.”

칼리드의 가슴에 기댄 채 꺄르르 웃던 벨리아가 그를 슬쩍 밀어냈다.


“제 방은 어디죠?”

태연한 벨리아의 물음에 둘 사이에 어려 있던 묘한 긴장감이 사르르 사라졌다.


“……하아. 안내하지.”

칼리드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후 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벨리아가 가볍게 그 손을 붙들고 2황자의 궁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 * *

지난 생에선 1황자에게 내려진 궁에서 머물렀기에 2황자의 궁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1황자비였을 때는 당연히 이곳에 올 일이 없었고, 황후가 되어서도 아무도 없는 황자궁에 방문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막연히 라울이 머무는 궁과 비슷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깔끔하네요?”

“번잡스러운 건 좋아하지 않아서.”

라울이 머무는 1황자궁이 화려함으로 휘감았다면 칼리드가 머무는 2황자궁은 불필요한 것들이 전혀 없어 깔끔하고 단순했다.

하지만 비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번잡스럽지 않아서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때 칼리드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혹시 그대는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나? 방을 다시 꾸며줄까?”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벨리아가 또 입을 가리고 웃어버렸다.


“왜 웃지?”

“당신 뭔가, 조금 변한 것 같아요.”

“내가?”

더 다정해졌다.

말에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어째서 그가 하는 말이 죄다 달콤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벨리아는 쿡쿡, 웃으며 그에게 답을 해주지 않기로 했다. 더 궁금해하라지.


“제가 머물 방은 이곳인가요?”

벨리아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더 세심하게 꾸며져 있는 모습을 보고 벨리아가 감탄을 내뱉었다.

방에 연결된 작은 옷방에는 새로 제작된 드레스들과 다양한 종류의 장신구들까지 빼곡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 밤 당장 파티를 연다고 해도 완벽하게 꾸며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건 언제 준비했어요?”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옷 치수도 안 쟀는데 어떻게…….”

옷을 맞출 때에는 치수를 재서 입을 사람의 몸에 꼭 맞게 제작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 하나 없이 어떻게 드레스를 만든 거지?

벨리아가 의문을 표하자 칼리드가 당당하게 설명했다.


“미리 옷을 몇 개 빼돌렸지. 그대의 동생이 도와줬거든.”

세상에.

클로제와 짜고 미리 옷을 빼돌렸다니.

벨리아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클로제 공주가 참 성격이 좋은 것 같아. 마음에 들어.”

“……칼리드.”

“덕분에 그대의 수고가 줄어들지 않았나. 어차피 옷은 전부 새로 맞추려고 했을 텐데.”

그러면서 제국에서 입을 옷을 모두 선물해주고 싶었다며 웃는데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벨리아는 결국 작게 웃어버리곤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아, 그리고 폐하께는 나중에 함께 인사하러 가도록 하지.”

“오늘 바로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로니카 왕국이 아무리 제국의 우호국이라고는 하지만 제국에 비교했을 때 약소국이었기에 형식적으로는 벨리아가 황제에게 인사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이미 그렇게 전해두었어.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으시더군. 그리고 오늘은 그대도 힘들 테니 푹 쉬어야지.”

사실 벨리아도 딱히 황제를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괜히 말 나올 행동을 하기보단 빠르게 얼굴 한번 비추고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했던 거였는데.


“며칠 뒤에 그대를 환영하는 파티도 있으니 지금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어. 파티 이후부턴 한동안 여유가 없을 테니까.”

벨리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황후 폐하는요?”

황후궁에 유폐되다시피 틀어박힌 현 황후와도 인사를 해야 했다. 그녀는 칼리드의 어머니이기도 하니 꼭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안 가도 돼.”

하지만 칼리드가 조금 딱딱하게 거절하며 벨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인사드려야죠. 그래도 제가 당신의 아들과 결혼할 사람인데.”

칼리드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벨리아는 짐을 정리하고 있는 시녀들과 하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칼리드의 손을 붙잡아 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동안 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칼리드. 제가 황후 폐하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벨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우리 결혼식에 오실 테니 어차피 만날 수밖에 없는걸요? 게다가 저희가 약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잖아요.”

“……그대가 무서워할까 봐.”

“누구를요? 황후 폐하를?”

“아무래도 성정이 대단하신 분이니 그대에게 함부로 할 수도 있고. 청혼서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도 본인의 목적에 맞는 일이기에 움직이신 거야. 황후 폐하는, 일반적인 어머니의 모습과 많이 다르신 분이니까.”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는 다르게 씁쓸한 어조로 설명하는 칼리드의 모습을 지켜보며 벨리아는 기억을 더듬어 이전 삶에서 황후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라울과 결혼할 사람이라고 인사하러 갔다가 얼마나 호되게 당했던지.


‘그땐 뺨을 맞았었는데. 차도 뒤집어 썼었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의 황후는 소문과는 다르게 아주 냉정하고 차갑게 상황을 판단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이 없을 땐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라울과 1황비가 홀로 황후궁으로 향한 자신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나타났을 때 황후는 과장된 몸짓으로 제게 손찌검을 했었다.

그때 마주친 황후의 싸늘하게 내려앉은 눈빛에 어찌나 놀랐는지. 그건 결코 미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이후 황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했을 때, 갑작스레 그녀가 죽었다.


“황후 폐하는 저 혼자 뵈러 갈게요.”

황후에게 마음의 병이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그때의 일을 미루어 봤을 때 황후가 황후궁에 죽은 듯이 머무는 건 스스로 선택한 것이 확실했다.

벨리아는 어째서 그녀가 미쳤다는 오명까지 쓰며 그렇게 숨죽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 숨겨진 이유가 더 있을 것이다.


“오늘 찾아뵙기는 어려울 듯하니, 당신이 조만간 자리만 만들어 줘요.”

대화를 마친 벨리아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조금 특이하게 생긴 문 하나를 발견하곤 손잡이를 잡고 돌려 보았다. 하지만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긴 무슨 공간인가요?”

그 질문에 칼리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으응?’

벨리아가 열리지 않는 문의 손잡이를 몇 번 더 철컥철컥 움직여보았다.


“궁금해?”

“네. 궁금해요.”

“잠시만.”

칼리드가 대답은 해주지 않고 방을 쌩하니 나가버렸다.

그렇게 혼자 방에 남은 벨리아가 황당해하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던 찰나, 잡고 있던 문손잡이가 스르륵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 반대편에서 칼리드가 짓궂게 미소 지으며 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예요?”

“뭐긴 뭐야. 문이지.”

벨리아는 그의 뒤로 슬쩍 보이는 풍경에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방이에요?”

칼리드는 말없이 문에서 비켜섰다. 마치 어서 오라는 듯.


“그럼 실례할게요.”

벨리아는 민망해하지도 않고 칼리드의 침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와 소파, 책상이 놓여 있는 단출한 방이었다.


“별거 없네요?”

자연스럽게 침대에 앉은 벨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칼리드는 책상에 기대어 그런 벨리아를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대는 나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어쩐지 기운이 빠진 듯 힘없는 목소리에 벨리아가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지금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지?”

칼리드가 정말 모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알아요.”

“아는데 그렇게 군다고? 잔인하긴.”

그가 진심이 담뿍 담긴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까 키스할 때도 밀어내더니. 지금 한 달 만에 만난 건 인지하고 있는 건가?”

원망스럽다는 듯 축 가라앉은 그의 모습에 벨리아가 고개를 휙 돌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예쁘게 눈을 휘며 웃는 벨리아를 보며 괜히 심술이 샘솟는지 칼리드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동안 나에 대해서는 많이 알아보았나?”

나에 대해 알아보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지?

라울 녀석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나?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숨겨져 있는 질문들이 선명하게 읽혔다.


“깜찍하게도…….”

벨리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칼리드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칼리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아주 가까이 몸을 밀착했다.


“많은 것들을 숨기셨더군요?”

벨리아는 입가에 은은하게 미소마저 띠운 채 그에게 물었다.


“굉장히 재미있으셨겠어요?”

말투는 무척 산뜻했다.

하지만 내용은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저희 할 얘기가 참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칼리드?”

슬쩍 어깨에서 가슴까지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을 따라 칼리드의 시선이 움직였다.

이마를 지나 슬쩍 눈을 가린 긴 속눈썹, 오뚝한 코, 붉은 입술에까지 다다른 그의 시선이 조금씩 열기를 더했다.


“……그대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길 바랐어.”

“맞아요. 당신에 대해 무척 궁금해지더군요.”

칼리드가 벨리아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벨리아를 안아 책상 위로 올려 앉혔다.


 


“어때?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내게 새로운 조건이라도 제안할 생각인가?”

칼리드가 도발하듯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보다 당신이 제게 원하는 바가 뭘까 조금 생각을 해 봤어요.”

왜 계속 관심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구는지.


“정말로 내 마음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원하는 척을 하는 걸까.”

“벨리아.”

칼리드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클로제의 말마따나 첫 연애를 하는 치기 어린 소녀가 된 것 마냥.


“당신이 의심스러워요. 믿을 수가 없어요.”

사람은 언젠가 변하기 마련이잖아.

당신도. 나도.


“하지만…….”

벨리아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칼리드의 얼굴을 붙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떨어졌다.


“그저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고 관심을 쏟기를 바랐다면.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어.”

칼리드는 자신의 뺨을 붙잡고 있던 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그는 아주 짙게 미소 지었다.


“벨리아.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는 벨리아의 입술에 거의 닿을 정도로 다가가 칼리드가 속삭였다.


“아직 내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대는 짐작도 못 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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