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당신이 졌어요. 그렇죠? (33/88)


#33. 당신이 졌어요. 그렇죠?
2023.02.21.



 
한 달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이전 삶의 기억을 토대로 여러 준비를 마쳤다.

우선 로니카 왕국이 무너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금광 협상 건과 샤네탄 대로 개방 건을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벨리아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샤네탄 대로는 잉고트 제국이 로니카 왕국을 침공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라울은 로니카 왕국의 대로를 이용해 야쿰 왕국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그 병력을 이끌고 로니카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빌어먹을 자식…….’

그렇게 가장 우군이라 믿었던 제국에게 배신당한 채 왕성이 불타고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밀통로를 통해 도망치던 클로제는 라울에게 붙잡혔고…….

벨리아는 과거의 일은 일부러라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생각을 털어냈다.


‘……개자식.’

사랑스러웠던 클로제는 이렇게 치욕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물론 대로를 개방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왕국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샤네탄 대로의 개방은 제국이 야쿰 왕국으로 향하던 군대를 로니카로 돌리는 결정에 큰 힘을 보탰을 것이다. 벨리아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개자식!”

분이 풀리지 않아 일부러 소리 내어 한 번 더 욕을 해보았다.


‘반드시 내 손으로 그의 목숨을 끊어버릴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손으로 라울의 목을 망설임 없이 찌르리라. 그날을 위해서 벨리아는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칼리드가 도와준 덕분에 밑 작업은 그래도 꽤 순조로웠다.

그보다.


“……용병 길드라.”

그걸 앙큼하게 숨기고서 자신의 앞에서 티도 내지 않았단 말이지?


‘황제가 되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이걸 숨겼다는 게 정말이지 괘씸해.’

벨리아는 얼마 전 데릭이 전해 준 보고서를 떠올리며 볼을 부풀렸다. 칼리드가 테사 공작령에서 용병 길드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얼마나 놀랐는지.

과거에도 분명 그는 그렇게 숨죽인 채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 한번 알아내 보라는 식의 태도라니. 기가 막혀서.’

벨리아가 혀를 찼다.

사냥개를 길들이는 게 이렇게나 버겁다.


‘게다가 뭐? 상단 하나를 운영 중이라고? 하!’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던 칼리드의 말투가 떠올라 더없이 얄미워졌다.

데릭은 그에 대해 더 깊게 파헤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전해왔다. 그러니 지금 알아낸 용병 길드도, 그가 대리인을 내세워 운영한다는 상단도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발칙하기 짝이 없어.”

벨리아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그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많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할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오히려 즐거웠다. 그에 대해 파헤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꾸만 들뜬다.


‘그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

그래. 딱 그런 마음이었다.

칼리드에 대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너무 내가 휩쓸리기만 했지.”

칼리드가 갑작스레 자신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면서 벨리아는 요동치는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계속 그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그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벨리아는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이제 반격할 때가 왔다. 애초에 그는 사냥개였고, 주인은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된다.

이제 막 사냥을 시작했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러니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주도권은 자신이 쥐고 있어야 했다.


‘괘씸하기는.’

더는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흔들리는 감정은 막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와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칼리드는 벨리아를 흔들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고 있다. 그걸 빤히 알면서 얌전히 넘어갈 수는 없지.


‘……그때의 칼리드는 성공했을까?’

문득 이전 삶에서의 칼리드가 궁금해진다.

부디 그가 성공했기를 바랐다. 그래야 비참하게 죽임당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니까.

벨리아는 테라스에 서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지금 떠나고 나면 이 따뜻한 로니카의 왕성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언니. 다 준비했어?”

클로제가 눈이 팅팅 부은 채로 나타나 물었다.

새벽 내내 클로제와 방에서 함께 수다를 떨었다.


‘그래도 지금은 좀 괜찮아 보이네…….’

어젠 하루 종일 가지 말라고 울다가, 빨리 가버리라며 화를 내다가, 다시 엉엉 울면서 결혼하지 말라고 떼를 쓰다가, 차분하게 헤럴드는 자신에게 맡기라며 호언장담을 하더니.

클로제의 감정이 수도 없이 바뀌는 통에 벨리아는 예전에도 이랬었나 하고 심각하게 돌아보기도 했었다.


‘그땐 분명히 아무렇지 않게 잘 보내줬었던 것 같은데.’

벨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클로제를 반겼다.


“별로 가져가는 게 없네?”

“응. 어차피 제국에 가면 새로 다 사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저 못생긴 조각상이라도 들고 가!”

클로제가 테라스의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조각상을 가리켰다. 아주 어렸을 때 헤럴드와 클로제가 생일 선물로 만들어준 조각상이었다.


“무거워서 못 들고 가.”

“씨이!”

설마 또 울려나?

벨리아가 걱정스레 바라보자 클로제가 입술을 꾹 깨물고 감정을 참아냈다.


“킁. 얼른 나와. 밖에 출발할 준비 다 끝났어.”

그러곤 쌩하니 방을 나가버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가 쿡쿡, 웃음을 터뜨리다가 클로제를 뒤따라 걸어갔다.

천천히 모든 풍경을 눈에 하나하나 담으며 밖으로 나가자 많은 사람이 벨리아를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벨리아.”

헤럴드가 씨익 웃으면서 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리아가 마주 웃으며 그 손을 붙잡았다.

헤럴드의 에스코트로 마차 앞까지 다가가자, 왕과 왕비가 슬쩍 붉어진 눈으로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조심히 가거라.”

“건강하렴.”

“네. 아바마마. 어마마마.”

벨리아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게 마지막은 아닐 테니 눈물의 이별은 하지 않을 것이다.


“늘 보고 싶을 거란다. 내 아가.”

왕비가 팔을 뻗어 벨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너를 급하게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잘할 거라 믿는다.”

지금 로니카 왕국을 떠나고 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은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바뀌고 있다. 라울이 아닌 칼리드를 선택한 것부터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나도 변했으니까.’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벨리아도 무척이나 많이 변했다. 바보같이 전부 빼앗기고도 울기만 하던 벨리아는 이제 없다. 고통스러운 기억뿐이던 제국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이상하게 벨리아의 마음은 가벼웠다.

아니,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제국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가 보고 싶어.’

칼리드가 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더 없이 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벨리아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그를 아무리 밀어내도 변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라울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련하다고 할지라도 이게 벨리아의 두 번째 선택이었다.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거야.’

한번 겪어보았던 실패의 길로는 걸어갈 생각이 없다. 벨리아는 가족들을 향해 더없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모두 건강하세요.”

마차에 올라타는 벨리아의 표정은 무척이나 산뜻했다.

다가올 미래가 오히려 기대된다는 듯이.

* * *



“……올 때가 되었지 않나?”

아시드는 이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벌써 네 번째 같은 질문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오시겠지.’

하지만 이런 속내를 드러냈다간 호되게 굴려질 게 뻔했기에 겨우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네 번째 같은 대답을 꺼내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

칼리드는 아시드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따라 시간은 왜 이렇게 천천히 흐르는 건지.


“아. 저기 오시네요.”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저 멀리 하얀색의 마차가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칼리드가 계단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벨리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그의 앞에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벨리아.”

칼리드가 환히 웃으며 마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하얗고 작은 손이 칼리드의 손을 타악, 내려쳤다. 칼리드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는 문을 붙잡고 안을 바라보았다.


“응? 벨리아, 장난치지 말고.”

칼리드가 보채듯 말했다.


“이게 아니잖아요, 칼리드.”

벨리아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 칼리드가 피식, 웃으며 마차 안으로 상체만 슬쩍 넣어서 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기야? 응? 얼굴도 제대로 안 보여주고.”

“나가요. 그리고 문 닫아요.”

“벨리아.”

“그리고 다시 맞이하세요.”

차갑고 싸늘한 말투였다.

벨리아가 왜 이러는지 금세 눈치챈 칼리드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뒤에서 아시드를 비롯해 2황자궁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칼리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차에 기댄 팔에 이마를 얹고 한참을 끅끅 웃음을 터뜨리던 칼리드가 숨을 크게 내쉬며 똑바로 섰다. 그러곤 다시 문을 열며 쩌렁쩌렁 과장되게 소리쳤다.


“내 사랑스러운 벨리아!”

 

 
갑작스러운 2황자의 행동에 모두가 벙쪄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가 갑자기 왜 저러시지?

하지만 칼리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벨리아가 칼리드가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자마자 곧바로 힘을 주어 벨리아를 당겼다.

그 반동으로 벨리아의 자세가 무너져 마차에서 튕겨 나오듯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앗?”

그리고 그런 벨리아를 힘껏 끌어안은 칼리드가 작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웃어. 사람들이 보잖아.”

그러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벨리아! 그대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매일 그대 생각뿐이었소!”

이 딱딱하고 어색한 말투는 뭐란 말인가. 연기할 거면 잘해보든가.

벨리아는 뻔뻔한 칼리드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듯 반기겠다더니. 이게 뭐야.


“지금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거 알죠?”

벨리아가 칼리드의 목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자 칼리드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이따가 찐하게 반겨줄 테니까 일단 웃지.”

그 말에 벨리아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 환히 미소 지었다. 칼리드가 그런 벨리아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실망이에요, 진짜.”

“마음 같아서는 입이라도 맞추고 싶지만, 그럼 못 참을 것 같아서.”

그의 말에 벨리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칼리드의 마지막 말에 벨리아가 그의 팔을 철썩 내려쳤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수습하냐고요!

칼리드는 전혀 아프지도 않으면서 팔을 슬쩍 문지르며 웃었다.


“하하. 그러니 이 정도로 봐줘.”

“칼리드, 당신이 졌어요. 인정하시죠?”

벨리아는 그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과감하게 키스를 했었다. 그래서 자신이 제국에 도착했을 때 대단하게 맞이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를 떠올리며 이 순간을 무척 기대했었는데.


“그래. 내가 졌어.”

“그럼 저 다시 안아줘요.”

칼리드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진짜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어서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벨리아가 가볍게 웃으며 양팔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칼리드가 무언가를 꾹 참아내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벨리아에게 한 발짝 다가가 으르렁거리며 낮게 속삭였다.


“……후회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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