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보고 싶어 (32/88)


#32. 보고 싶어
2023.02.18.


벨리아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제가 원해요. 제가…….”

가벼이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벨리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칼리드가 황제가 되길 바란다는 말은 입 안에서 점점 무게를 더해가며 그녀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그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요.”

명확한 의지가 깃들어 있는 벨리아의 대답에 헤럴드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왕은 벨리아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왜 라울 황자를 선택하지 않았는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벨리아는 그저 솔직하게 그와 함께하는 미래는 죽음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와 결혼한다면 로니카 왕국은 물론이고 제 주변의 모두가 그의 손에 죽을지도 몰라요. 저 또한 행복한 삶은 살아가지 못하겠죠.”

“어찌 그리 확신하지?”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벨리아는 단호했다.


“라울 황자와 황제를 믿지 말아요, 아바마마.”

그들의 욕심은 제국을 넘어 이곳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제국에 대한 대비를 해야만 했다. 로니카 왕국은 제국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으니까.


“라울 황자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가 괜히 로니카 왕국에 왔을 거라 생각하세요?”

“……흐음.”

그때 가만히 있던 헤럴드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지난번 네가 전해주었던 보고서는 받아 보았다. 아바마마께도 보고드렸지.”

라울 황자가 마물에 대한 보고를 모두 가로채 전공을 독차지하려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도 이상하다 생각했단다.”

헤럴드가 잠시 벨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벨리아. 그걸 어떻게 알아차렸니?”

벨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왕과 헤럴드는 벨리아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벨리아. 어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없니?”

“……죄송해요.”

“네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린 너의 의견을 들어줄 수가 없단다, 벨리아.”

국왕은 벨리아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사실은 이게 맞다.

아무런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는 자신을 그저 믿는다고 말하는 칼리드가 이상한 거였다.


“라울 황자가 처음부터 수상했어요. 제게 진심으로 반했다고 하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벨리아는 사전에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왕국에 온 이유가 정말로 금광의 조사뿐이었을까요? 제게 청혼한 것에 그 어떤 계산도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흠…….”

“저희가 제국의 1황자면 나쁘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도 저를 이런저런 조건을 가지고 재어보지 않았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작정 보자마자 반했다고 하는 게 이상하긴 했으니까.

그 말에 동의하는지 헤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가 하는 행동을 계속 주시했어요. 미리 대비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 그런데 마침 그가 보고서를 빼돌리고 있다는 정황을 발견하게 되었죠.”

벨리아가 말을 마치자 국왕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것은 네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란다. 그가 절대로 들키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에 네게 들킨 거지.”

그러곤 기특하다는 듯 따스하게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네 말을 온전히 믿기에는 증거가 많이 부족하단다.”

“아바마마…….”

“네 의견은 잘 알아들었다. 제국에 네가 가 있다고 약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진 않으마. 그러면 되겠느냐?”

그는 벨리아가 가져온 지도를 살폈다. 금광의 위치와 마물이 나타난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잉고트 제국과 로니카 왕국 사이에 하나의 표시가 더 있었는데 무척 길게 그어진 선이라 단번에 눈에 띄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혹시라도 제국에서 샤네탄 중앙대로의 개방을 요구한다면 반드시 거절해 주세요.”

“호오. 제국에서 그리 요구할 거라 생각한 이유는?”

벨리아가 이번에도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제국에서 최근 타국에 상행이나 투자를 빌미 삼아 도로의 통행권을 요구하고 있어요. 저희도 예외는 아닐 거예요.”

안 그래도 예상하던 일이었는지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통행세를 받아야 해요. 그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대로를 개방하는 것은 절대로 승인해선 안 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제국과의 사이가 틀어졌을 경우 그 길을 그들이 침략을 위해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헤럴드도 벨리아의 말에 동의했다.


“우린 황좌를 두고 싸움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잖아요. 그 불똥이 어떻게 튈지 모르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를 개방할 필요가 없죠.”

벨리아를 바라보는 국왕의 얼굴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소소한 몇 가지 내용을 당부하고 길었던 대화를 마무리했다.


“공주님!”

피곤함을 어깨에 매단 채로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온 벨리아에게 시녀가 다가와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 편지를 받아든 벨리아가 방에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아서 인장을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밝아졌다. 누가 보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대체 편지는 언제 쓴 거야?’

칼리드가 제게 보내온 편지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벨리아의 손길이 조금 부산스러워졌다.

그리고 곱게 접힌 편지를 펼쳐 그것을 황급히 읽어 내려갔다.


“아하하.”

 

 
편지를 다 읽었을 땐, 벨리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눈물까지 흘렸다.

떠난 지 고작 사흘 만에 보낸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에는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 다양한 구절로 보고 싶다는 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어찌나 간지럽게 써두었는지.

실제 그의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편지 내용이라 더욱더 우스웠다.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었다.


“이게 뭐야.”

말은 황당하다는 듯이 내뱉었지만, 벨리아는 그 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어쩐지 그가 떠나고 허전해진 마음이 조금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감정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괜히 심장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자신이 보고 싶다 적혀 있는 편지의 문장에서 자꾸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아…….”

벨리아가 크게 숨을 내쉬어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꽉 차서 숨이 가쁜 기분이었다.


“칼리드.”

그는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테사 공작령에 도착했을까?

이동하는 길이 고되지는 않았을까?

……그의 마음은 정말 진심일까?

수많은 물음이 벨리아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온통 칼리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도 보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숨겨진 속내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와버렸다. 정말 고작 며칠 만에 그가 그리워졌다.

함께 있던 날이 얼마나 된다고.

그가 곁에 있던 날보다 곁에 없었던 날이 훨씬 길었으니 지금이 더 익숙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이젠 칼리드가 없었던 시간들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유독 피곤한 날인 오늘, 어쩐지 그가 곁에서 자신을 꼭 안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 *

데릭은 특급 정보원이 가지고 온 보고서를 보면서 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이게 사실이라니…….’

그리고 책상에 팔을 걸치고는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어떻게 이 모든 게 사실일 수가 있지?


“그들은 언제 도착한다고 했지?”

“……이틀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추격자는?”

“모두 처리했습니다.”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아 공주가 전해준 성물의 위치는 무척이나 은밀하게 숨겨진 장소였다. 정보원들이 고작 성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부로 들어가기엔 겨우 얻은 기회를 날릴 확률이 너무 높았다.


‘이번엔 말 그대로 도박에 가까웠어…….’

성물이 있다고 전달받은 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곳은 여러 마법 장치가 겹겹이 쌓여 있는 밀실로 침입의 흔적을 숨길 수 없는 구조였다.

벨리아가 전해준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하려다 의뢰 자체를 완전히 실패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성물을 다른 곳으로 옮길 테고.


‘그 이후엔 찾기 더 힘들어져.’

그래서 고민 끝에 자신들에게 의뢰를 요청한 신국의 사제들을 데리고 성물의 회수까지 한꺼번에 진행하기로 했다. 성물은 아무나 함부로 손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의뢰인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얼마 전 그 장소에 보관 중인 성물을 발견하고 회수까지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2황자에 대한 조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

“의심스러운 정황?”

“예. 확실하지 않은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조사 막바지이니 금방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데릭은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특급 정보원이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라.


‘재밌군.’

의뢰인들과 성물만 무사히 도착하면 계약대로 벨리아 공주가 요청한 정보를 전해주어야 했다.

2황자 칼리드에 대해서는 이미 길드 자체적으로 보유한 정보들이 많았지만, 이번에 전체적으로 내용을 수정하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꽤 발견했다.


‘……참 이상한 관계란 말이지.’

물론 칼리드와 벨리아의 이야기였다.

데릭은 이전에 칼리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벨리아가 나에 대해 정보를 요청하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전해도 돼.’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말하던 2황자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그는 정말로 벨리아 공주가 자신에 대해 알아보길 기대한다는 듯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아, 그렇지. 혹시라도 길드가 알아낸 정보로도 부족하다면 날 찾아와. 내가 직접 알려줄 테니까.’

당연하게 너희는 모든 것을 알아내지 못할 거라는 의미를 내포한 그 말에 데릭은 무척 자존심이 상했었다.

정보 길드 루네스의 실력은 대륙 전체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런 자신들에게 정보가 부족하다면 찾아오라니.


‘하…….’

지금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다.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던 데릭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조사를 명했던 일에 대해 물었다.


“벨리아 공주에 대한 조사는 마무리되었나?”

“……죄송합니다.”

데릭이 날카롭게 앞에 서 있는 조사원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가?”

“그때 보고 드렸던 것이 전부입니다. 벨리아 공주에게는 특별한 점이 없었습니다.”

“그럼 성에서 책만 보며 얌전히 지내던 공주가 갑작스레 대륙 전역에서 비밀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알아냈을 거라 생각하지?”

“……죄송합니다.”

데릭은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우선 벨리아 공주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본다. 관찰 등급을 특급으로 올려둬.”

“예.”

어쩐지 이 빌어먹을 호기심이 자꾸만 그들에 대해 더 파고들라고 부추겼다.


“흐음…….”

둘을 마주했을 때 확인했다. 그들은 분명히 진심이었다. 정략결혼이나 억지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서로에 대해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알아 봐. 그리고 칼리드 황자에 대해서는 다시 보고하도록 해. 의뢰인에게는 언제나 신뢰로 보답해야 하지 않겠나.”

곁에서 지켜보다 보면 뭐든 걸리겠지.

데릭은 입꼬리를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