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요.
(31/88)
31. 그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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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요.
2023.02.14.
“앞으로 자주 만나겠군요. 잘 부탁해요, 레인.”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클로제의 모습은 평소의 어린아이 같은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척 우아했다. 벨리아는 그런 제 동생을 보고 있자니 왠지 뿌듯하고 기꺼웠다.
“클로제. 내가 제국으로 떠난 후 그는 여러모로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알아볼 게 있다면 그에게 요청하면 돼.”
그리고 빠르게 클로제와 데릭이 따로 연락할 방법을 정했다. 아직 어린 클로제가 성 밖으로 나가 데릭을 만나기는 어려울 테니, 대부분 서신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땐 데릭이 성을 방문하기로 했다.
“클로제의 요청에 대한 비용은 제가 달아둔 선금으로 지불해 주세요.”
최근 벨리아는 데릭에게 많은 정보를 전해주었다. 그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천차만별로 나뉠 이야기들이었다.
그것을 떠올렸는지 데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순순히 동의하는 것을 확인하고 벨리아가 클로제에게 말했다.
“그러니 알아볼 게 있다면 주저 없이 물어봐도 좋아. 알겠지?”
“고마워, 언니.”
클로제는 벨리아와 데릭 사이에 오간 무언의 거래를 알아차린 듯했다. 똑똑한 아이였기에 단번에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도 깨달은 눈치였다.
클로제와 데릭의 인사를 마무리 짓고 난 후, 벨리아는 제 동생을 내보내고 데릭과 따로 대화할 시간을 마련했다. 무척 중요한 부탁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네. 정말 중요한 이야기예요.”
데릭이 벨리아의 말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벨리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잉고트 제국의 2황자 칼리드에 대해서 알아봐 주세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제국에서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귀족들 사이에서의 인지도는 어떤지 같은 것들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표면적으로 알아본 것들 말고, 그가 숨겨둔 것들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확인해야 했다.
‘그에게 직접 물었을 때는 알려주지 않았어.’
제 편이라고 믿었던 칼리드가 제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칼리드는 벨리아가 자신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기를 원했다. 그러니 이렇게 정보 길드를 통해 알아보는 건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칼리드 황자 전하 말씀입니까?”
하지만 데릭은 벨리아의 예상치 못한 의뢰에 놀랐는지 되물었다.
“알아 봐 달라는 게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제국에서 비공식적으로 하고 있는 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그의 주변 인물, 그들과의 관계……. 그와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요.”
벨리아의 말에 데릭은 잠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공주님. 이건 루네스에서도 무척 높은 등급의 정보입니다. 황족의 뒤를 캐는 건 길드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죠. 이 의뢰를 그대로 받기엔 저희도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게다가 완벽하게 조사할 수 있을지도 솔직히 말하면 자신 없습니다.”
정보 길드의 수장으로서 쉽게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황족의 뒷조사는 버거운 의뢰였다.
그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벨리아는 모른 척하며 그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때 알려주었던 약에 대해선 조사가 끝났나요? 당신이라면 분명 성분조사를 했을 텐데요.”
벨리아는 데릭이 당연히 제가 준 약의 재료들을 조사해 성분을 확인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신중한 그가 제가 한 말만 믿고 그대로 그걸 제 어미에게 먹였을 리는 없었다.
“……약재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제 제 말이 좀 믿어지나요?”
미래에 검증이 진행된 약이었다. 그러니 약재에 문제가 있을 리가.
“게다가 저희 길드 소속 약제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약재의 조합이 무척 획기적이며 이대로 약을 만든다면 제 어머니의 병이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벨리아가 역시나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데릭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제 어머니에게 사용할 약이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그대의 말이 맞아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하는 게 좋다는 건 그대도 알고 있을 거예요. 더 늦으면 정말로 손쓰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벨리아는 진심으로 걱정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데릭에게는 그 말이 협박하는 것처럼 들렸는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 제 어머니의 병을 고치는 일이 제게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위험이 큰 만큼 더욱 신중하게 생각해야겠지요.”
“어머.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그저 제가 가진 정보력을 그대에게 한 번 더 확인시켜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벨리아가 사르르 웃음 지었다.
“데릭은 아직도 저를 의심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제가 그대에게 알려줄 정보도 그대가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러면서 툭, 한 단어를 내뱉었다.
“신국의 성물.”
벨리아는 이전 삶에서 신국의 성물이 나타난 일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 성물을 발견한 곳은 루네스가 아닌 다른 정보 길드였다. 자존심이 상했었는지 제게 그 이야기를 하며 분해하던 데릭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꺼낼 수 있는 건 많아.’
미래에서 가져와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벨리아는 그걸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었다.
“성물의 위치를 알려주면 위험을 치르는 대가로 부족함이 없겠죠?”
벨리아의 말에 데릭이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비밀리에 성물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벨리아가 알고 있다는 것에 무척 놀랐으리라. 데릭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달콤한 제안이군요. 알겠습니다. 성물의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확인 후 정보가 사실임이 판명 나면 곧바로 저희도 2황자 전하를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시일이 오래 걸릴 수 있으며 공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의 완벽한 정보를 드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요. 최선만 다해주세요.”
이후 벨리아는 목소리를 죽인 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데릭에게 전했다.
지금 성물을 가진 자가 누군지, 그자가 성물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보관하고 있는 장소에 가는 방법까지 아주 상세하게.
“정말 예지의 능력이 없으신 겁니까?”
데릭은 벨리아가 예지나 예언을 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벨리아는 그런 그에게 정확한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글쎄요. 뭐, 전부 꿈에서 봤다고 해 두죠.”
벨리아가 농담처럼 대꾸하자 데릭은 그녀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확인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 * *
사각사각.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이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
기사단의 체계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손대긴 어려웠다. 그러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적이 침공했을 때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공주님. 곧 폐하와 약속하신 시각입니다.”
“아, 그래. 고마워.”
벨리아는 서둘러 작성한 종이를 둘둘 말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을 앞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오라버니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선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벨리아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선 도저히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들.
부디 이런 내용을 꼬투리 잡히지 않아야 할 텐데.
벨리아는 걱정을 가득 안은 채 왕과 헤럴드를 만나러 방을 나섰다.
왕의 집무실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바마마.”
“오오! 벨리아. 어서 오너라.”
환하게 웃으며 벨리아를 반기던 왕이 빈자리로 손짓했다. 그 자리의 맞은편에는 이미 헤럴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제가 늦었네요.”
“아니다. 내가 아바마마와 할 이야기가 있어 미리 와 있던 것뿐이니.”
다정한 헤럴드의 대답에 벨리아가 밝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오늘의 약속은 벨리아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우리를 소집하였느냐?”
“소집이라뇨. 그냥 제가 알게 된 왕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어서 잠시 시간을 부탁드린 것뿐입니다.”
벨리아가 소집이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하지만 왕은 계속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벨리아를 놀려대었다.
“그럼 우리를 혼내는 시간인 게로구나?”
“아바마마…….”
난감하다는 듯 벨리아가 어색하게 웃자 왕이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가 준비해 온 이야기를 들어보자꾸나.”
왕이 책상에 손을 올렸다.
벨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신이 준비해온 종이를 앞에 펼쳤다. 그리고 곁에는 커다란 대륙 지도도 함께 펼쳐 두었다.
“오호?”
벨리아는 미리 표시해 둔 부분을 가리켰다.
“우선 광산 협상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안 그래도 오늘 아바마마와 광산 협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단다.”
“생각하시는 지분의 비율은 얼마나 되나요?”
“4할 정도 요구하려고 한다. 어쨌든 로니카의 영토 안에 있는 광산이니, 차후 세금까지 계산했을 때 4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서 협상에 끼어들 빌미가 적기에 조금 더 높은 비율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과거에는 제국과 공동으로 금광을 발견했을 때 세금을 조건으로 3할의 지분만 얻어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끓어올랐다. 이번에는 그때처럼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조금 더 부르세요.”
“벨리아. 하지만 칼리드 황자는 제국과 왕국에 일정 지분을 나누겠다 했다. 우리가 무작정 요구할 수는 없어.”
왕이 그런 상황에 어찌할 테냐, 하고 벨리아에게 물었다.
“저희도 우겨야지요. 칼리드가 제국의 황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이미 황자에게 소유권이 있는데,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국이 추가로 지분을 가져가는 것도 웃기죠.”
둘이 관련된 회의를 거듭하면서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벨리아가 제국의 황자와 약혼을 했고, 곧 황자비가 될 예정이었다. 고작 지분을 좀 더 얻겠다고 벨리아의 미래를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나온 타협안이 4할, 즉 40퍼센트의 지분이었다.
“5푼 더 내놓으라고 하세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포기하긴 아까운 액수예요.”
“칼리드 황자가 4할을 가지고 왕국이 4할, 나머지 2할을 제국이 갖는 게 보기 좋지 않겠느냐?”
“멀쩡히 우리 땅에서 나는 금을 왜 제국이 2할이나 가져가야 하죠? 솔직히 말해서 아주 작은 금 알갱이 하나도 아깝지만, 칼리드의 입장이 있으니 이 정도로 타협한 거예요.”
단호한 벨리아의 말에 왕이 지긋이 미소 지었다.
“곧 제국에서 황자비로 지내야 할 너는 괜찮겠니? 나는 네가 걱정이다.”
헤럴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벨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앞으로도요.”
가족들의 걱정을 안다. 하지만 이전 삶에서 모두 어떻게 되었나. 고작 자신을 신경 쓰느라 제국에 모두 빼앗기고 무너지지 않았나.
이번엔 결코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아바마마.”
벨리아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제국으로 떠난 뒤, 그곳에선 황위를 놓고 싸움이 일어날 거예요. 그때를 대비하셔야 해요.”
그 말에 왕이 눈을 감고 침묵했다.
벨리아는 그 침묵 속에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어렵지만 해야 하는 말들이었다.
이전 삶에선 제국의 모든 정보가 의도적으로 차단되어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가족들이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벨리아는 만약의 상황을 최대한 대비하고 싶었다.
오랜 침묵이 끝에 왕이 물었다.
“칼리드 황자가 황위를 원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