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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어 (30/88)


#30.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어
2023.02.11.


칼리드는 정원의 넓은 잔디밭에서 이렇게 천 하나를 깔아 하늘을 구경하자고 속삭였다. 곁에는 맛있는 음식들을 놔둔 채, 하늘을 바라보다 심심하면 책도 읽고 배고프면 밥도 먹자고.

그 이야기가 너무나도 따스해서 벨리아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꿈같은 이야기네요.”

칼리드가 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벨리아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에게 맞춰주고 싶었다.

어렸을 때 왕성 뒤편의 숲으로 자주 소풍을 나갔었다고 스치듯 이야기했던 것을 잊지 않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고마웠고, 벨리아도 그와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으니까.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집에선 우린 행복할 거야.”

그가 자신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게 퍽 자상한 칼리드였지만, 사실 그의 기본 성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작 저 하나를 위해 다정해진 그를 보며 벨리아는 문득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보고 싶어요.”

벨리아도 그가 그린 미래가 궁금했다.

제국에서 보낸 시간은 모두 끔찍했는데, 그곳에서는 행복한 일만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싫었던 제국이었지만, 칼리드가 말하고 있는 그 집만은 마치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꼭 데려가 줘요.”

“물론이지.”

칼리드가 그리 대답하며 몸을 슬쩍 일으켜 벨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칼리드가 자연스럽게 벨리아의 위로 올라왔다. 그의 무릎이 벨리아의 무릎과 닿았다.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위에서 칼리드가 내려다보자 벨리아에게 내리쬐던 햇빛이 자연스레 가려졌다.


“전하. 비켜요.”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가 있지?”

칼리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요?”

벨리아가 자신의 사냥개의 목줄을 짤짤 흔들어 대었다. 하지만 그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게 벨리아뿐만이 아니라는 듯 칼리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아주 느리고도 유혹적으로.

그는 벨리아에게 제 마음을 밝힌 이후 이처럼 틈만 나면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다.


“내가 그대에게 키스하려는 상황?”

“그게 무슨……!”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한 그의 모습에 벨리아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몇 번 넘어가 주니까 계속 저러는데 이번엔 절대 안 넘어가야……!


“읍!”

순식간에 덮쳐 온 칼리드의 입술에 벨리아는 숨이 막혀왔다.

또! 이런 식으로!

벨리아가 콩콩, 칼리드의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슨 만나면 뽀뽀할 생각밖에 없나!

속으로 불평을 쏟아내던 벨리아였지만, 칼리드가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 감촉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사라지고 벨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칼리드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벨리아의 뺨을 부드럽게 만지던 손을 떼어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칼리드.”

“쉿.”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였다.

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꼭 쥐었다. 한두 번도 아닌데 늘 그와 입을 맞출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한 게 전부 부질없는 것처럼.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벨리아가 멍하니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난 네가 영원히 내 곁에 묶여있으면 좋겠어.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내 옆에만 있게끔 하고 싶어.”

조금 전 따스한 집에서 함께 살자고 말하던 사람이 할 말인가, 이게?


“그거 범죄예요.”

벨리아가 샐쭉한 표정으로 칼리드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칼리드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괜찮아질 것 같아.”

칼리드가 시선으로 벨리아를 옥죄었다. 그는 벨리아가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벨리아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그 눈빛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칼리드…….”

“기다리고 있어. 무척이나 얌전하게.”

칼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벨리아는 그런 그의 표정에 심장이 조여오듯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빈말로라도 말해버리면 그만인 것을. 혀에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렇게 말한 칼리드가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누워 있는 채로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늦었어. 이만 돌아가지.”

 

* * *

칼리드가 떠나던 날, 그는 아주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벨리아가 제국으로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며 미련 없이 떠나갔다.

성문을 나가는 칼리드가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볼 줄 알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서운해서 벨리아는 칼리드가 떠나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한 달 뒤면 볼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아쉬운지 모르겠다.


“언니. 2황자가 벌써 보고 싶어?”

“……아니야.”

함께 배웅하러 나온 클로제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는다.


“아니래도.”

“흐흥.”

요즘 들어 클로제가 음흉해졌다.

자꾸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바라보질 않나, 이상한 웃음을 흘리질 않나.

벨리아는 그런 클로제의 머리에 손을 턱, 올리며 쓰다듬었다.


“클로제. 언니 놀리면 재밌니?”

“놀리다니! 그냥…….”

벨리아가 다정하게 묻자 클로제도 점점 차분해지더니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언니가 2황자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신기하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마치 연애 처음 하는 사람처럼 설레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보이니까 조금 재밌어서…….”

그게 놀리는 거잖아.

벨리아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


“나쁜 뜻이 있던 건 아니고오! 그냥……!”

클로제가 열심히 변명했다.

하지만 말을 하다 보니 어쩐지 억울해진 모양인지 적반하장으로 소리쳤다.


“우씨! 이제 얼마 후면 언니도 제국으로 떠난다는데 고작 이 정도 장난도 못 쳐?!”

벨리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런 클로제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왜 그렇게 빨리 가는데?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되잖아. 지금 가면 언니 결혼식에나 볼 수 있을 텐데.”

벨리아가 클로제를 살짝 껴안았다.


“미안. 서운할 거 알아. 그래도 언니는 가야 해.”

“……알겠어.”

클로제가 얌전히 대답했다.

시무룩한 클로제의 얼굴에 벨리아도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동생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더욱 밝은 표정으로 박수를 짝, 치면서 말했다.


“내일 내가 오후 일정 비워두라고 했던 거 기억나?”

“응. 무슨 일인데?”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서.”

이제 슬슬 로니카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끝내야 했다.

* * *

오전 일정을 마친 벨리아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제국으로 떠나기까지 한 달의 기간이 남았다.

그동안 이전처럼 로니카 왕국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밑 작업을 해 두어야 했다.

그 첫 번째가 클로제와 데릭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이전 삶에서도 클로제는 최선을 다했어.’

성년이 된 클로제가 종종 보내오던 편지에는 왕국을 위해 하는 일들이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클로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열심히 뛰어다녔었다.

헤럴드를 도와서 많은 업무를 도맡아 했고, 대외적인 업무들도 책임자로서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클로제 혼자만의 힘으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라울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던 언니의 삶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 제국에서 로니카 왕국을 무너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황후의 모국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침공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벨리아가 주먹을 꼭 쥐었다.

이번에 클로제에게 데릭을 소개해주면, 이번 생에선 분명 더 복합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사 자신과 칼리드가 라울에게 무너지더라도 제국에게서 로니카 왕국을 지킬 방법을 고안할 수 있으리라.


‘그다음은 오라버니야.’

그 약해 빠진 마음을 후벼 파 상처를 주더라도 헤럴드가 단단해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로니카 왕국을 위해서는 벨리아 자신이라 해도 순식간에 끊어낼 수 있는 모진 마음이 필요했다.

자신의 가족들은 정에 너무 약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그냥 두었겠지만, 제국이 혼란스러워지면서 그 여파를 고스란히 맞게 된다면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라버니에게도 몇 가지 정보를 흘려놓고…….’

그러고 나서 금광 지분을 나눠 갖는 협상에서 욕심을 부리라고 전달해야 했다.

칼리드는 금광의 지분을 양국에 나눠 주기로 정하고 그것을 통보했다.

금광의 발견자인 칼리드, 금광이 위치한 로니카 왕국, 칼리드의 모국인 잉고트 제국.

이들은 협상이 끝나면 총 세 개로 지분을 나눠 각자 금광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로니카 왕국은 조금 더 욕심을 부려야 했다.


‘칼리드가 제국의 황자라는 것을 밀고 나가야 해.’

로니카 왕국에 있는 금광이다.

그러니 적어도 45퍼센트의 지분은 요구해야 했다.

그런다고 해도 제국과 칼리드의 지분을 합치면 50퍼센트가 넘으니 그쪽에서도 끝까지 반대하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번 금광 발견 과정에 제국이 도움이 된 게 전혀 없었기에 로니카 왕국의 요구는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뭐, 칼리드의 지분이 제국에 넘어가는 일 따윈 없을 테지만.’

벨리아는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들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그려나갔다.


“……있어. 그건…….”

“언니.”

“……면, 안 될…….”

“언니!”

“응?!”

벨리아는 큰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어?”

세상에. 자신도 모르게 계속 입 밖으로 중얼거리며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벨리아가 당황하며 클로제를 바라보자, 클로제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긴다.


“설마 2황자가 떠나갔다고 우울해서 이러는 건 아니지?”

“뭐? 하하.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복도에 멍하니 서서 혼자 중얼거려?”

클로제가 점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아.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자 얼른 들어가자. 손님이 와 있을 거야.”

벨리아는 클로제의 어깨를 잡고 데릭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도착한 데릭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벨리아가 들어오는 기척에 데릭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벨리아 공주님. 그리고 클로제 공주님. 반갑습니다. 레인입니다.”

그의 정중한 인사에 벨리아가 싱긋 웃었다.


“일단 자리에 앉을까요?”

벨리아의 말에 모두 자리에 앉자 곧바로 하녀들이 다가와 데릭이 마시던 차를 치우곤, 새로운 다과상을 준비해 올려두었다.


“일단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만든 이유는 레인을 클로제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클로제가 어서 정체를 말해보라는 듯 벨리아에게 눈짓했다.


“레인은 정보 길드 루네스의 로니카 왕국 지부장이야.”

“루네스?”

클로제도 들어본 적 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다시 데릭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정보 길드 지부장이란 말이지…….’

좋아하는 타르트를 눈앞에 두고도 클로제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벨리아가 이 자를 자신에게 소개해주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윽고 클로제는 자신의 언니가 제게 무언의 부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곤 무척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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