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거기서 같이 살자. (29/88)


#29. 거기서 같이 살자.
2023.02.07.


칼리드의 가장 큰 아군은 테사 공작가였다.

마지막까지 칼리드가 무언가 준비하던 것을 떠올려보면 분명 공작가에도 뭔가 숨겨진 힘이 있을 것이다.


“할아버님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기사도를 따르는 분이시지.”

그러고 보니 라울을 황제로 만들었을 때 너무 자연스럽게 칼리드가 물러났고, 테사 공작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의 벨리아는 테사 공작에 대해서 약간의 경계만 했을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라울이 원체 칼리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기도 했고, 황제도 대놓고 라울을 밀어주었기에 벨리아는 그저 귀족과 제국민들의 여론만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을 신경 썼던 기억이 난다. 라울은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테사 공작령에서 무얼 할 생각이에요?”

“기사단도 둘러보고, 오랜만에 할아버님을 좀 만나 뵈려고 해.”

벨리아가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왜 하필 지금 테사 공작을 만나려고 하는 걸까. 이미 그는 공작령을 거쳐 로니카 왕국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그곳에서 머물 예정이라니.


‘따로 준비하는 게 있는 걸까?’

칼리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새삼스레 그 사실에 놀란 벨리아가 칼리드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황궁에선 보통 무얼 하며 지냈어요?”

“뭐. 그냥 빈둥거리며 시간이나 보냈지. 2황자에겐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까.”

벨리아는 칼리드의 대답에서 거리감을 느꼈다. 마치 그가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늘 제게 다 줄 것처럼 말하던 칼리드가 이렇게 제게 무언가를 감추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래도요. 맡은 일도 많은데 놀기만 하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글쎄.”

“……대답하고 싶지 않나요?”

칼리드는 조금 굳어버린 벨리아의 표정을 즐겁다는 듯이 시선으로 더듬었다.


“그대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게 기뻐.”

“……칼리드.”

“그래. 그렇게 내 이름만 부르고.”

제가 묻는 질문엔 대답하지 않은 채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칼리드의 모습에 벨리아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당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벨리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이번엔 칼리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제국으로 떠나면 제가 믿을 수 있는 건 칼리드, 당신뿐인데 이렇게 제게 무언가를 숨기면 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벨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운했다. 그냥, 감정이 한없이 서럽게 물들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너를.’

칼리드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벨리아.”

“저도 당신에게 감추는 게 있으면서 이런 말 하는 게 우습겠지만…….”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칼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벨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벨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제국에 도착하면, 그때 전부 얘기할게요. 정말이에요. 그러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줘요.”

“그래.”

그의 마음을 가지고 거래를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함께 준비하는 게 맞다.

그게 옳은 길이다.

벨리아는 팔을 뻗어 칼리드의 목을 껴안았다.

* * *

칼리드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엔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라울이 로니카 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가서 아바마마께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부디 조심히 돌아가시게.”

왕과 친밀하게 대화하던 라울이 칼리드를 발견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왕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럼 형제끼리 대화를 나누도록 하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로니카 왕이 다른 귀족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칼리드가 라울의 근처로 다가왔다.


“둘만 남았구나, 칼리드.”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은데.”

 

 
둘은 전혀 반갑지 않은 듯 인사를 나눴다.

제국에선 우연히 마주칠 일조차 최대한 만들지 않았던 사이였으니까.

어차피 황제는 칼리드를 따로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고, 라울은 황제의 집무실에 얼굴도장을 찍으러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그게 오히려 칼리드의 행동을 자유롭게 만들었기에 더 좋은 일이었지만.


“이번엔 꽤 머리를 썼더구나?”

한참 만에 입을 뗀 라울의 말에 칼리드가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하게 올렸다.


“뭐 그다지? 이걸로 머리를 썼다고 하면 달린 머리가 서운하지 않겠어?”

라울은 칼리드의 말투부터 표정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체면을 위해 애써 미소 지었다.


“이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참나. 별걱정을 다 해준다.

칼리드는 그와 비슷하게 아주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라울의 표정이 굳는다.


“……고작 금광 하나로 뭔가 바뀔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황제가 되는 것은 나일 것이다.’

칼리드와 라울은 같은 생각을 마음에 품은 채, 아주 날카롭게 벼린 칼을 가슴에 숨기고 미소 지었다.

언젠가 이 칼을 눈앞에 있는 저놈의 등에 꽂아버릴 그날을 위해.


“벨리아 공주와 금광, 마물 토벌까지……. 그래. 이번엔 네가 운이 좋았어. 인정하지.”

칼리드는 본인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아주 오랜만에 라울의 말을 긍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하 호호 즐겁다, 하며 웃을 사이는 아니었기에 조금 삐딱하게 물었다.


“인정하는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하하. 무슨 소리를.”

라울이 호탕하게 웃었다.

마치 너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그 꼴이 보기 싫었던 칼리드가 아주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억울하면 가서 폐하께 울며불며 매달려 보든가.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무슨 일만 있으면 쪼르르 폐하에게 달려가 일러바치는 거.


“칼리드.”

“사랑받는 황자라는 거. 참 편하고 좋아?”

“말이 심하군.”

“형님만 할까. 다 보고 배운 게 있어서 이런 거지.”

라울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 입을 열었다.


“벨리아 공주는…….”

“그만. 내 여자에 대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칼리드는 라울이 저렇게 미련이 철철 남은 얼굴로 벨리아를 입에 올리는 게 굉장히 짜증났다.


“이봐, 형님은 원래 뭐든 금방 질리잖아. 괜히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고 집착하는 거 보기 안 좋아.”

칼리드가 라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비꼬았다.

그러니 이젠 벨리아에게서 관심 꺼.


“……먼저 제국에 가 있으마.”

라울이 분한지 입술을 깨물었다.

칼리드는 마지막까지 그의 속을 긁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심히 가도록 해. 기껏 구해준 목숨 함부로 놀리지 말고.”

“…….”

라울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몸을 홱, 하고 돌렸다. 그러곤 뚜벅뚜벅 기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섰다. 그 모습을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칼리드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얼굴엔 선명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 * *

왕성 근처에 있는 숲으로 소풍을 나온 건 오랜만이라 벨리아는 무척 들뜬 상태였다. 회귀한 이후 이곳에 온 건 처음이었다. 벨리아의 입장에선 이 숲에 온 게 무려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러다 넘어져.”

칼리드가 벨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벨리아는 꺄르르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이 정도도 못 넘어가면 안 되죠!”

그러고는 힘껏 발을 내디뎌 다음 바위를 밟고 넘어갔다. 칼리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벨리아. 오랜만에 나오니 어때?”

“정말 너무 행복해요.”

“내가 곁에 있으니 더 행복하지?”

칼리드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벨리아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총총총 앞으로 뛰어갔다.

평소라면 그저 웃어넘겼을 말이었지만 이내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네. 함께 와 줘서 고마워요.”

칼리드는 벨리아가 이렇게나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감정에만 충실해 웃어버리는 저 표정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 잔상처럼 남았다.

벨리아의 웃는 얼굴을 보고 나니 그녀가 여태 진정으로 행복해서 웃은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당신이 제국으로 떠나기 전,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칼리드는 성큼성큼 걸어 벨리아의 곁에 멈췄다.

그러곤 팔을 스윽 내밀자, 벨리아가 소리 내 웃으며 그 팔을 붙잡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 자주 나와볼 것을 그랬어.”

“그러게요. 성 밖으로 함께 나올 생각은 못 해봤네요.”

“제국에 돌아가면 함께 놀러 다니면 되겠군. 여기저기 좋은 곳을 많이 알아두지.”

벨리아는 그의 입에서 놀러 다닌다는 말이 나온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는 그러지 못할 걸 알기에 더더욱 유쾌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좋아요. 여기저기 놀러 다녀요. 여유롭게.”

칼리드와 벨리아는 한참 동안 손을 잡은 채 숲속을 걸었다. 햇살이 나무 사이로 내려와 빛기둥을 만들어내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듣기도 했다.

그러다 야트막한 언덕에 조금 도톰한 천을 깔아두고 그 위에 편하게 앉았다.


“으아아.”

벨리아가 팔을 쭉 뻗으며 뒤로 드러누웠다.

왕비인 제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면 공주가 보일 모습이 아니라며 잔소리를 할 게 뻔했지만, 지금은 그저 편하게 있고 싶었다.

벨리아가 벌러덩 뒤로 눕는 것을 본 칼리드가 피식 웃고는 그 곁에 같이 누웠다.


“하늘이 예쁘죠?”

“그래.”

“이렇게 하늘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어쩐지 여유로워 보였다. 그저 바람에 맡기고 그대로 흘러가는 그 모습이.


“늘 하늘은 이렇게나 파랗고 맑았는데…….”

왜 자신은 그렇게나 깜깜한 암흑 속을 걷고 있었는지.


“벨리아?”

“아. 그냥……. 갑자기 구름처럼 천천히 떠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벨리아가 실없이 헤헤 웃어버렸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얘기했지만, 그때까지 차근차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더욱더 다잡을 수 있는 준비.

누군가에게 내 처참한 고통을 꺼내어 이야기할 준비.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붙잡을 준비.

그랬다. 벨리아는 준비가 필요했다.


“제국에 내 집이 있어.”

그때 뜬금없이 칼리드가 꺼내는 말에 벨리아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가 직접 마련한 내 집이야. 황실에게 받은 게 아닌, 정말 온전한 내 집.”

“어떻게 마련했어요?”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 대표적으론 상단을 하나 운영하고 있어. 처음엔 쫄딱 말아먹는 줄 알았는데 어찌어찌 자리를 잘 잡아서 꽤 돈을 많이 벌었지.”

“그 돈으로 집을 샀나요?”

칼리드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래. 내가 처음으로 가진 내 거였어, 그게.”

잉고트 제국의 수도 외곽에 지어진 저택.

아주 오래전 몰락한 대귀족이 지었던 별장이라 무척 호화롭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집보다도 정원이 훨씬 더 넓어서 한없이 마음이 트인다고. 수도 외곽이라 조용히 머물기에 아주 좋다며 칼리드가 열심히 설명했다.

한참을 그 집에 대해 말하던 그는 갑자기 진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멈추었다. 그러곤 벨리아를 향해 몸을 돌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기서 살자, 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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