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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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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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덫
2023.02.04.
벨리아가 꺼낸 말에 데릭은 그게 뭐 어쨌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얼마 살지 못할 거예요. 지금 상태면 아마도 1년 정도?”
“공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한 근거가 있습니까?”
사실 이건 셀론 후작이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확인까지 마쳤다. 운이 좋게도 셀론 후작이 직접 왕국까지 와 주었으니까.
“그의 손톱에 작은 검은 반점이 있어요. 며칠 전 만찬에서 한 번 더 확실하게 확인했고요. 지병이 있는 셀론 후작에겐 치명적이겠지요.”
아직은 반점이 옅어서 별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흔적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벨리아의 말에 데릭이 턱을 쓰다듬었다.
검은 반점이 손톱에 나타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중독이군요.”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뻔한 이야기겠지만 배후는 셀론 후작 부인이었다.
원인은 데릭의 존재였고. 아들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작 부인이 후작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탄 것이다.
무척이나 극소량이었던 탓에 같은 음식을 먹어도 다른 이들은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지병이 있던 셀론 후작에겐 곧 증상이 나타날 거야.’
더군다나 이 이후에도 후작 부인이 몇 번이나 더 독을 먹일 테니까.
벨리아는 이 사실을 데릭에게 알려줄까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여기서 더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말을 아꼈다.
“데릭. 후작가로 들어가요.”
“공주님.”
“후작위를 이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가서 후작가를 말아 먹건 권력을 쥐고 흔들건 상관 안 해요. 그저, 나중에 황위 계승을 위해 칼리드에게 한 손만 거들어줘요.”
벨리아는 정말로 그가 후작가의 재산을 탕진하든 권력을 탐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셀론 후작가의 이름이 칼리드에게 필요한 때였고, 그걸 아주 손쉽게 쥐여줄 수 있는 자가 눈앞에 있다.
당연히 그를 회유해야 하는 게 맞다.
“말씀하신 내용은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후작이 죽기 직전, 셀론 후작가의 후계자가 되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벨리아가 데릭과 알게 된 것은 그 이후였다. 그렇기에 이토록 후작가를 꺼리던 그가 순순히 그곳으로 들어가 후계자가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심 가는 정황이 있었다. 벨리아는 그보다 훨씬 미래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데릭. 제가 당신 어머니의 병을 고칠 약을 알아요.”
후작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면서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던 그를 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 그 병을 고칠 약이 만들어졌다.
벨리아가 황후로서 주도했던 의약 사업에서 큰 성과를 낸 것이 바로 그 약이었다. 약이 개발되었을 때, 씁쓸하게 웃으며 안타까워하던 데릭의 표정이 생생했다.
벨리아가 미소 지었다.
“그걸 알려주는 값으로 후작가에 들어가길 요청합니다. 그리고 제 편이 되어 주세요.”
데릭 셀론은 절대로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벨리아를 바라보던 데릭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 어머니가 아프단 건 어떻게 아셨지요?”
“비밀이에요.”
벨리아는 당당한 태도였다.
“그 약이 효과 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없어요.”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더 당당했다.
데릭이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걸 제게 값으로 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효과는 확실할 테니까.”
“제가 그걸 믿을 거라 보십니까?”
“이미 대륙 전역을 뒤졌잖아요? 하지만 찾을 수 없었겠죠. 그런데 그 병을 고칠 약을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한 유일한 사람이 나타났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은 제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을 텐데요?”
벨리아는 내세울 게 없었다. 그가 의심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의심이 많은 그는 역으로 이런 뻔뻔한 모습으로 거래를 요구하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울 것이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증거를 만들어 두는 법이니까. 그러니 오히려 이렇게 단순하게 나가는 게 그에겐 통할 거라 생각했다.
벨리아는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거절하진 않겠지? 아주 작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신뢰가 필요한 일입니다.”
벨리아는 그의 말에 그가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지긋이 미소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어머니를 먼저 치료하고 난 이후에 결정하세요.”
“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시려고요.”
“신의로 먹고사는 정보 길드의 마스터께서 신뢰를 저버릴 리가 없죠.”
데릭은 정보 길드를 운영하면서 막무가내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 누구도 벨리아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 원래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틀어막으며 일을 하는 스타일입니까?”
벨리아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머니의 병을 고칠 약을 알려주십시오. 정말로 병이 깨끗하게 다 낫는다면 후작가로 들어가겠습니다.”
“좋아요.”
벨리아가 미리 적어둔 종이를 넘겼다.
“여기 적힌 재료를 말린 후 갈아서 물에 개어 드세요. 하루 한 번 한 스푼. 그 이상 먹으면 위험하니 양은 꼭 지켜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데릭이 약재가 적혀 있는 종이를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가 한마디 던졌다.
“아, 그리고 그거 제가 나중에 팔아먹을 거니까 어디에다가 소문내진 말고요.”
그에 데릭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효과만 확실하다면 전 공주님의 편이 될 겁니다.”
“그럼 곧 제 편이 되시겠군요.”
“하하하.”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즐겁게 웃고 있는데 어디선가 싸늘한 기운이 들이닥쳤다.
“무척 즐거워 보이는군?”
어쩐지 어깨에 한기가 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칼리드가 고요하게 내려앉은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드?”
갑자기 나타난 칼리드를 발견한 벨리아가 깜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칼리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걸어와 벨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있지? 나도 궁금하군.”
아주 적대적인 태도였다.
벨리아는 그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대가 외간 남자와 단둘이 식사를 하고 있다길래 급히 달려왔지.”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그 말을 실제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듣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벨리아는 잔뜩 당황하며 칼리드를 말려보려 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하. 역시 사이가 좋으시군요.”
데릭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칼리드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약혼식에서 두 분이 아주 다정한 모습을 보이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칼리드가 못마땅한 눈으로 데릭의 표정을 살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더 잘 어울리십니다.”
“크흠!”
대단한 말도 아니었지만 꽤 마음에 들었는지 칼리드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데릭은 역시 사람 대하는 것에 타고난 자질이 있었다. 벨리아는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분명 사교계에 들어갔을 때 어느 정도 밀어준다면 금세 적응하고 자리를 잡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 의미로 이번 제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데릭에게 클로제를 소개해주기로 했어요. 제가 없는 동안 그가 로니카 왕국을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흐음. 그런가.”
칼리드는 가끔 클로제를 마주칠 때마다 눈빛이 굉장히 예리했었던 것을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데릭은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된 것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만날 때는 좋은 소식이 있길 바라요.”
데릭이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섰다.
그러곤 그는 종이가 들어 있는 가슴팍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크게 쉬어보았다.
‘우선 약의 성분을 분석해야겠군.’
데릭은 벨리아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말로 자신의 어머니를 낫게 한다면, 그땐 그녀의 편에 서리라. 그리 생각하면서.
어머니만 나을 수 있다면 후작가에 들어가는 것 따위,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게다가 벨리아 공주는 후작가를 망하게 해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다.
이건 그에겐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 * *
데릭이 떠나고 칼리드와 벨리아는 늦은 오후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라 최근 날씨가 계속 좋았다. 바람에 함께 실려 오는 꽃향기가 향기로웠다.
“벨리아.”
벨리아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칼리드가 벨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신비로웠다. 저렇게나 가냘프고 유약해 보이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강단 있게 움직일 수가 있나.
타는 듯한 노을빛이 붉게 그녀를 물들였지만, 여전히 벨리아는 사라질 것만 같이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네가 사라질 것 같아서.
나를 떠날 것 같아서.
나 따위는 손쉽게 놓아버릴 것 같아서.
“칼리드?”
어떻게 해야 이 불안함이 사라질 수 있을까.
칼리드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냥. 예뻐서.”
“매번 할 말 없으면 예쁘다고 하죠?”
“정말이야.”
벨리아가 입술울 뿌우, 내밀었다.
칼리드는 그런 벨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를 평생을 곁에 묶어두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
집착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칼리드의 사랑 방식이었다.
‘네가 내 목줄을 쥐고 흔든다고 생각하게 놔둘 거야.’
그 목줄을 쥔 여린 손목에 잔뜩 엉킨 실타래가 함께 묶여간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게 해야지.
오랜 기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얌전한 사냥개의 본분을 다하면서.
그러다 그녀가 자신이 쥐고 있는 목줄을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 자신이 그 손을 채가면 된다.
“그대는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리도 말라서는.
손목을 잡아보니 한 손에 쥐고도 남는다.
“쯧. 더 많이 챙겨 먹어야겠어. 이러니 늘 체력이 부족한 게 아닌가.”
칼리드가 하는 말에 벨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흠. 그러고 보니 제국의 음식이 조금 간이 센 편인데 적응하기 괜찮겠나?”
“그럼요.”
그래도 나름 황후로 지낸 기간이 길었다. 그건 벨리아가 제국의 음식에도 충분히 익숙해질 만한 기간이었다.
그때 칼리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주제를 바꿨다.
“……난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 황궁으로 가기 전 테사 공작령에서 잠시 머물 생각이야.”
테사 공작령이라면 제국의 서부에 있는 곳이었다. 로니카 왕국과 바로 맞닿은 곳이라 무언가 일을 도모하기엔 최적의 위치였다.
벨리아도 테사 공작이 서부의 수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황후가 되었을 때 테사 공작가의 힘은 상당히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한 가문의 영향력이 갑작스레 줄어들진 않았을 테니 지금도 그다지 큰 힘은 없을 텐데…….’
공작가가 가진 것이라곤 오래된 기사단과 명예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공작가에 머물 예정이라는 칼리드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문득 궁금해진 벨리아가 칼리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테사 공작은 어떤 사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