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황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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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황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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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황제가 될 것이다.
2023.01.31.
일반적인 연인 사이라면 서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칼리드는 벨리아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궁금했다. 하지만 벨리아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그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 질문하는 법이 없었다.
라울에 대해서는 온갖 사소한 것까지 알고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조금 짜증이 났다.
그건 그녀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시켜 주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라울을 증오하는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지.’
분명 뭔가 있을 텐데.
‘예언이나 예지는 아닌가…….’
여태껏 벨리아가 말했던 것들은 예언이나 예지가 아니고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그래서 칼리드는 당연히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차기 황제로 선택한 것이라 믿었고.
하지만 그녀와 시간을 보낼수록 깨달은 건, 벨리아는 칼리드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로니카에 온 건 그저 충동적이었는데.’
로니카 왕국과 가까운 테사 공작령에 들른 김에 라울이 주도하는 금광 수색의 진척을 확인하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벨리아를 알게 되었고, 금광을 발견하고 루네스의 마스터와도 접점을 만들었다. 게다가 약혼까지. 한순간의 선택으로 많은 것들을 얻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손익으로 따지면 엄청난 이득이 분명했다.
“벨리아. 말해 봐. 내가 어째야겠어?”
칼리드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벨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뺨을 쓰다듬는 손에서도 따스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네가 내게 솔직하지 않는데 내가 너에게 모두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우선은 상황을 살피면서 적절하게 대응해야겠군.’
칼리드는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벨리아는 자신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무언가 꼭꼭 감춰둔 채 제 계획대로 자신이 움직이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제대로 된 관계일 리 없었다.
칼리드는 벨리아와 좀 더 깊은 감정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쪽이 우세한 일방적인 관계라면 약간의 밀고 당기기는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 공평하잖아. 그렇지? 내 사랑스러운 벨리아.”
뻔한 사람은 재미없다.
칼리드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무엇도 먼저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궁금하다면, 나를 더 많이 알고 싶어 해. 내가 감춘 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나를 파헤쳐 봐.
“으응…….”
“더 자.”
칼리드는 잠꼬대로 웅얼거리는 벨리아를 토닥였다.
그의 입가엔 아주 진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 * *
벨리아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캄캄해진 한밤중이었다.
자신은 칼리드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였다.
‘언제 잠든 거지……?’
벨리아는 곁에 누워 있는 칼리드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어느덧 그의 존재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일어났어?”
칼리드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벨리아가 움직이는 기척에 깬 듯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깼어요?”
“아니……. 괜찮아.”
괜찮다면서 벨리아를 다시 꼭 품에 안으며 눈을 감아버린다.
“저희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누워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한 칼리드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혼자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침대에서 대화하는 건 이제 익숙해지지 않았나?”
우습지도 않은 농담에 벨리아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칼리드.”
“하하. 이대로도 우린 충분히 대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야.”
벨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칼리드는 그런 벨리아의 반응을 보며 즐겁다는 듯 미소 짓다 벨리아를 다시 와락 껴안았다.
“꺅!”
“하하하.”
칼리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딘가 심장을 뛰게 하는 웃음소리였다.
벨리아는 토라진 표정으로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그보다 언제 돌아갈 예정인가요?”
“이런……. 갓 약혼식을 치른 약혼자를 어서 제국으로 보내버리려는 건가?”
한껏 서운한 척하며 얘기해봤지만 벨리아는 냉정했다.
“네. 그러니 언제 갈 건지 미리 알려줘요.”
칼리드가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이제 슬슬 가보긴 해야지. 그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폐하와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다음주 중으로는 떠날 생각이야.”
“그럼 저도 당신이 떠나고 한 달 뒤 바로 제국으로 출발할게요.”
그 말에 칼리드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리 일찍?”
“제국에서 할 일이 많거든요.”
“그럼 나와 같이 출발하지.”
“아뇨. 여기서도 할 일이 많거든요.”
이전 삶에서 있었던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제국으로 떠나기 전 확인해 두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벨리아는 그것들을 마무리 짓고 난 이후 제국으로 떠날 작정이었다.
칼리드는 피식 웃어버리곤 다시 벨리아의 허리를 감쌌다.
“내 사랑스러운 연인께서는 너무 바쁘시군.”
그의 낯간지러운 소리에 벨리아의 뺨이 슬쩍 붉어졌다.
하지만 부끄러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다며 더욱 과장된 몸짓으로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칼리드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리다 벨리아를 품에 꼭 껴안았다.
“그대가 벌써부터 보고 싶어서 어쩌지?”
“금방 갈 텐데요, 뭐.”
“그동안 외로운 밤을 보내야겠군.”
그러면서 벨리아의 정수리에 쪽쪽, 소리가 나게 키스했다.
“뭐 하는 거예요.”
어느덧 벨리아의 목소리에도 웃음이 섞여 있었다.
칼리드는 행동을 멈추지 않은 채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입을 맞췄다.
“그대가 제국에 도착하면 난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대에게 달려갈 거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제가 그랬듯이요?”
“기대해도 좋아.”
칼리드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자신했다.
“하하. 그게 뭐예요.”
이상하게 그녀를 품 안에 안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칼리드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깊게 잠긴 목소리로 벨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반드시 그대를 제국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주지.”
마음이 확실하게 정해졌다.
황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벨리아를 온전히 가질 것이다.
* * *
“뭐라고?”
라울은 수하가 전해온 소식에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놈이 금광을 발견했다고?”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이런 개소리가 다 있단 말인가.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맥을 수색했는데!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금광은커녕 작은 금광석 몇 개가 고작이었다.
“제국 전역에 그런 소문이 퍼져 있다고 합니다.”
“……칼리드 그놈이 일부러 소문을 퍼뜨린 거야.”
하지만 발견하지도 않은 금광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다니 제정신인가?
라울은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간 꼴이 되겠군.”
비웃음을 머금고 다시 읽던 책을 마저 보려는 찰나.
“전하!”
아직 왕국에 함께 머물고 있는 셀론 후작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말했다.
“지금 2황자가 로니카 왕에게 금광에 대해 보고 중이라고 합니다.”
“뭐?!”
“제국에는 이미 서신을 보냈다고…….”
라울이 책을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광이 정말 발견됐다고 말하는 건가?”
“…….”
“지금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어!”
“……남부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셀론 후작이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동부 산맥이 아니라, 남부의 산맥이 끝나는 지점에 금광이 있었다고 합니다.”
라울이 분노와 허탈감으로 들끓는 가슴을 억누르며 눈을 꾹 감았다.
어째서 전부 계획이 어그러졌는가. 분명히 모든 것이 순조로웠는데.
공들여 쌓아둔 것들이 모조리 무너졌다.
“전하.”
“조사단은 무어라 하던가.”
라울의 목소리가 침착했다.
“그것이…….”
“괜찮으니 말하라.”
라울이 화를 내지 않자 오히려 셀론 후작은 더욱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전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남부에서 대규모의 금광이 발견되었다면, 동부에는 금광이 존재하더라도 무척 작은 규모일 게 분명하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조사는 무의미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가.”
결국 그렇게 되었나.
라울은 씁쓸하게 웃었다. 금광 건은 어쩔 수 없다. 이미 칼리드가 발견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지 이건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제국에 도는 소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셀론 후작이 한숨을 내쉬면서 또 다른 좋지 못한 소식을 전했다.
“칼리드 황자가 전하를 구하고 마물을 퇴치했다는 이야기까지 부풀려져 함께 퍼지고 있습니다.”
“……큭.”
라울이 눈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런 라울의 반응에 당황한 셀론 후작이 안절부절못하며 황자를 바라보았다.
“전하?”
“하하. 이거 한 방 맞았군.”
그 칼리드에게 말이다.
이제야 발톱을 드러내는 건가.
매사에 초연한 척하던 그 무심한 얼굴도 다 거짓이었군.
“지금 당장 제국으로 돌아간다!”
라울이 제국으로의 귀환을 명했다.
칼리드의 숨겨둔 칼날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제부터 진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칼리드. 네가 가진 것들이 계속해서 그 손에 들어있을 거라 안심하지 마라.’
그것들은 다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물론 벨리아도 포함된 이야기였다.
‘앞으로 더 바빠지겠군.’
라울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로니카 왕국은 너무 평화로웠다.
그래. 빌어먹게도 너무나 평화로운 곳이었다.
* * *
벨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좋아 보이십니다.”
“어머, 그런가요?”
능청스럽게 한쪽 손을 뺨에 가져다 대며 벨리아가 되물었다. 그러자 앞에 앉은 사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과거에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벨리아를 왕성에서 마주하니 정말 공주의 기품이라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느라 수고했어요, 데릭.”
“공주님께서 이리 호출해주셨는데 오지 않을 수 없지요.”
벨리아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데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식을 마치고 왕성에 머무는 손님들이 많아져 밖으로 나가기 어려워졌다. 서신으로 계속 이야기는 오갔지만, 그를 직접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글로 전할 수 있는 내용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대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제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해봤어요.”
벨리아가 가볍게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의 음식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간이 세지 않은 음식들이 많았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할까 했었지만, 식사를 한 번쯤 같이 하고 싶었다.
‘그는 반드시 후작가로 들어가야 하니까.’
벨리아는 앞의 음식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예상보다 맛있었다. 오늘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써달라고 이야기한 보람이 있었다.
“맛있군요.”
데릭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대를 위해서 조금 신경을 썼지요.”
“영광입니다.”
식사를 계속하며 벨리아가 날카롭게 데릭을 살폈다. 그러곤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흡족해져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의외로 흠잡을 데 없는 식사 예절을 보이고 있었다. 저 정도면 귀족들과도 큰 문제없이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데릭. 계속 왕국에 있을 생각인가요?”
벨리아의 질문에 데릭이 웃으며 답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클로제를 소개해줄게요. 똑똑한 아이지만 아직 어려서 걱정이 많습니다.”
정보 길드의 도움을 받는다면 클로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 것이다.
이전 삶에선 제국이 로니카 왕국으로 향하는 정보를 차단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클로제가 루네스와 협력해 대륙 정세를 미리 파악하도록 한다면 그때처럼 무력하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대가 왕국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부탁해요. 클로제에게는 그대가 정보 길드 지부장이라 소개할 테니.”
벨리아는 자신이 떠나고 난 뒤의 로니카 왕국이 걱정되었다.
“클로제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그 아이도 꽤 영리하니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후후. 알겠습니다.”
데릭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고객이 생기는 거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벨리아 공주가 영리하다고 할 정도면 클로제 공주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셀론 후작의 의뢰는 어찌할 생각인가요?”
“고민 중입니다.”
벨리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무언가 고민되는지 습관처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이윽고 벨리아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셀론 후작에게 지병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