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약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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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약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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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약혼식
2023.01.28.
왕족들의 일반적인 약혼식을 고려하면, 오늘 진행되는 칼리드와 벨리아의 약혼식은 무척이나 작은 규모였다. 물론 규모가 작을 뿐, 일반적인 약혼식과 절차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는 제국에서 약혼식과 결혼식을 모두 진행했었다. 굳이 시기를 따져보자면 라울과 약혼한 건 지금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로니카에서 약식으로 약혼식을 진행하리라는 것도, 셀론 후작이 황제의 대리인으로 올 것이라는 사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벨리아는 자신이 지시를 내린 데릭을 떠올렸다.
‘지금쯤 제국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하겠지?’
결혼 날짜를 내년 봄으로 결정한다는 황제의 친서가 도착하자마자 데릭에게 작전을 실행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공주님. 이제 식장으로 가셔야 해요.”
시녀가 알리는 말에 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결혼식에 입는 드레스보다 간소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하얀색이 아니라 아주 옅은 분홍빛이 돌아서 조금 더 화사했다.
“그래.”
어차피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들도 많지 않을 것이고, 그들 모두 그저 벨리아와 칼리드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임을 증명할 증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대주교가 와서 간단한 축복이나 내려주고 가겠지.
벨리아는 무심한 기분으로 자신의 약혼식을 그려보았다.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다. 조금 피곤하니 부디 빨리 끝나면 좋겠다고,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벨리아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가자.”
벨리아가 천천히 약혼식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혼식이 열릴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두가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쁘군.”
식장의 앞에서 마주한 칼리드가 벨리아를 보며 감탄했다.
“이 옷을 고를 때부터 예쁠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만, 상상이 실제보다 못해,”
부끄러울 법도 한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뻔뻔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벨리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도 멋있어요.”
진심이었다. 애초에 잘생긴 사람이 꾸미기까지 하면 더욱 멋있을 수밖에.
그때 칼리드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주인공들의 입장을 호명하면 앞에 놓인 꽃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약혼식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선언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숨을 크게 내쉰 칼리드가 벨리아에게 물었다.
“긴장되지는 않나?”
“으음. 글쎄요.”
벨리아의 태연한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드는 무어라 말을 하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벨리아가 고개를 돌려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가 잔뜩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요?”
“그대는 가끔 내게 너무할 때가 있어.”
“아……. 제가 대답을 너무 성의 없이 했나요?”
벨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혹시나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야.”
칼리드가 한숨을 작게 내쉬며 말을 아꼈다. 여기서 서운한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건 그에겐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기로 했으니……. 이 서운함도 나 혼자 이겨내도록 하지.”
벨리아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자신은 이미 이전 삶에서 약혼도 결혼도 모두 해봤기에 이런 형식적인 행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목적을 위해 그저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을 텐데.
“칼리드.”
“…….”
“미안해요. 제가 당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벨리아. 지금은 그냥 아무런 말도 않는 게 나아.”
“으음. 미안해요.”
상처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벨리아는 칼리드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귀엽게 굴지도 말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벨리아는 다시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곤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당신과 이 길을 걸어가고 나면 다신 되돌릴 수 없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벨리아가 씩씩하게 웃었다.
“잊지 말아요. 당신을 선택한 건 저라는 사실을.”
그녀의 말에 잔뜩 굳어 있던 칼리드의 얼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스르륵 풀렸다.
그는 스스로도 유치하고 단순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대의 탁월한 선택에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하지.”
이윽고 오늘의 주인공들을 호명하는 대주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악단들의 연주에 맞춰 칼리드와 벨리아가 손을 꼭 붙잡고 하얀 꽃이 예쁘게 뿌려져 있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두 사람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모두가 소문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확신했다. 저리도 행복하게 웃는데 그들의 마음이 거짓일 리 없었다.
‘제길……!’
물론 그래서 더 속이 뒤집힌 사람도 있었다.
라울은 가장 앞자리에서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예쁘게 웃으며 걸어오는 벨리아를 바라보곤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곁에는 자신이 있어야 했다.
‘대체 어째서지? 왜 내가 아니라 칼리드가 벨리아의 옆에 서 있는 거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칼리드를 사랑한다고?
“전하. 웃으십시오. 표정이 굳었습니다.”
“……후작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소.”
라울은 다시 표정을 꾸며내었다. 그러나 박수를 치는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라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이를 악물었다.
‘기분이 더럽군…….’
제 것을 칼리드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벨리아에게 진심이 되었던 걸까.
확실하게 이유를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라울이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칼리드와 벨리아는 어느덧 맹세의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연인이네요.”
“그러니까요.”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자꾸만 거슬렸다.
입을 맞추는 둘의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밤까지 함께 보낸 사이니 당연하겠지.’
바닥이라 생각했던 기분이 계속 더 아래로, 아래로 처박힌다.
라울은 벨리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깔끔하게 물러섰을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서는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전하.”
“……셀론 후작. 아무래도 나는 공주를 가져야 할 것 같아.”
약혼식이 끝나고 긴 꽃길을 다시 걸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라울이 작게 속삭였다.
셀론 후작은 그런 라울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안 됩니다.”
“계속 생각해 봤네. 하지만 저 여자는 내 사람이 분명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운명이라는 걸 믿어본 적은 없었지만, 짜 맞춘 듯 완벽한 자신의 반려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진 조건부터 세상 물정 모른 채 순진하고 얌전한 것까지. 그 어떤 것도 제 신경을 거스르는 게 없었다. 마치 저를 위해 나타난 사람처럼.
‘하지만 고작 그게 다가 아니었어.’
벨리아가 자신을 거절했던 그 순간, 퍼즐이 잘못 맞춰진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건 아니라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공주보다 더 좋은 상대는 있을 겁니다. 굳이 2황자의 비를 탐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아니었다.
칼리드의 연인이라서가 아니다.
로니카 왕국의 공주라서가 아니다.
그녀가 벨리아이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좋은 혼처를 찾아주실 겁니다. 로니카 왕국의 공주는 분명 좋은 결혼 상대이지만, 그뿐입니다.”
“내가 그녀에게 진심이라면?”
“……전하.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두십시오.”
셀론 후작이 표정을 굳혔다.
처음으로 거절당했다는 게 분해서 이러는 거겠지, 라며 이해를 하려 애썼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황자의 태도에 불안한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든다.
“……내 것이야. 내 사람이야. 분명 그리되어야 했어.”
자꾸만 순리를 거스르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 라울을 지배했다.
“전하. 폐하께선 칸테리프 공녀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셀론 후작은 아주 오래전부터 라울의 비로 내정되어 있던 엘린 칸테리프를 언급했다. 제국의 중앙 권력을 쥐고 있는 칸테리프 공작가라면 로니카 왕국보다도 더 큰 힘이 될 것이다.
황제는 정통성이 부족한 라울에게 중앙의 핵심권력을 쥐게 해 황위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런 황제의 마음을 알고 있는 라울이 셀론 후작에게서 등을 돌렸다.
분했지만 힘을 키워야 할 때였다.
“아무래도 시기를 당겨야 할 것 같군.”
셀론 후작은 그런 라울 황자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걱정할 것 없네. 폐하께 말씀드려 칸테리프 공작가와 약혼을 준비하게.”
지금 당장 가질 수 없다면 자신이 황제가 되어 칼리드를 죽이고 그녀를 빼앗으면 될 테니까.
라울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졌다.
* * *
벨리아는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칼리드가 벨리아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지작거렸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약혼식이 끝났다.
“졸린가?”
“조금요.”
처음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고 방에 들어왔지만, 침대에 누우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분명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약혼식을 하게 되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것이 많았는지 긴장이 풀린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라울과 셀론 후작의 반응을 살피느라 잔뜩 곤두섰던 신경도 사르르 가라앉았다.
“큭큭. 그럼 좀 자.”
졸려서 그런지 순순한 벨리아의 대답에 칼리드가 생글거렸다. 비몽사몽한 벨리아가 너무 귀여웠다.
“피곤할 만도 하지.”
“당신이 계속 머리를 만지니까 졸린 거잖아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하지만 칼리드는 머리를 만지는 걸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머리카락이 참 예뻐.”
“그런가요?”
“응. 은으로 뽑아낸 아주 가는 실 같아.”
“그래요……?”
벨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윽고 벨리아는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칼리드는 새근새근 잠이 든 벨리아의 곁에 옆으로 누워 얼굴을 감상했다. 눈을 꼭 감고 있으니 밝게 자라온 순진한 공주로만 보였다. 강단 있게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했던 모습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벨리아.”
대답은 없었다.
“그댄 이제 어디에도 못 가.”
소유욕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을 하면서도 벨리아의 머리를 정리해주는 손은 다정했다. 얼른 제국으로 돌아가 벨리아를 자신의 곁에 꽁꽁 묶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그대가 무서워하겠지?”
칼리드가 미소 지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쿨쿨 잘 자는 벨리아를 바라보자 어쩐지 저 뽀얀 볼을 한입 베어 물고 싶었다. 벨리아의 다디단 향으로 자꾸만 이성이 흔들렸다.
칼리드는 벨리아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조금 고쳐주었다. 그러자 벨리아가 칭얼거리며 몸을 칼리드에게 붙여온다.
“큭큭. 이러면 곤란해, 공주.”
하지만 벨리아는 칼리드의 가슴에 기대 다시 편한 표정으로 단잠에 빠졌다.
‘이제 앞으로 어쩐다…….’
반드시 황제가 되겠노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라울이 편하게 황제가 되게 놔둘 생각은 없었기에 이것저것 방해물을 준비한 게 꽤 있었을 뿐.
뭐, 그러다 자신이 황제가 되면 더욱더 좋다는,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칼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그러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벨리아의 말간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벨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러나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벨리아가 자신을 궁금해하길 바랐으니까.
“널 어쩌면 좋을까. 응?”
칼리드의 시선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