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부끄러움은 내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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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끄러움은 내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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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끄러움은 내 몫
2023.01.24.
왕성으로 돌아오는 칼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황한 데릭의 표정을 봤다는 게 괜히 그를 이긴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유치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솔직한 그의 마음이었으니까.
‘셀론 후작가라…….’
그는 황위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후작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없었고 후계자가 된다면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황위 다툼에도 필연적으로 낄 수밖에 없으니 데릭의 입장에선 후작가에 들어간다는 선택지는 생각하기도 싫을 것이다.
칼리드도 굳이 싫다는 사람을 붙잡아 회유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이건 신뢰가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루네스의 마스터와 연을 이어둔 건 큰 수확이야.’
데릭은 벨리아의 핑계를 대며 돕겠다는 말을 해왔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1황자와 2황자를 저울질했을 때 이쪽으로 무게추가 조금 더 기울었다는 뜻이라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물론 벨리아의 이름을 거론하며 대답한 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후우…….”
칼리드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이름을 떠올렸을 뿐인데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중증이군.’
어째 증상이 점점 심해지지 않은가.
하지만 칼리드는 입가에 미소를 띠곤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왕성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벨리아를 만나러 가야겠다, 생각하면서.
* * *
도서관은 고요해서 벨리아가 무척 좋아하는 곳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란스러운 것보다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다.
오늘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피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제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식으로 봐요?”
“내가 어떻게 그댈 바라봤는데?”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느냐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벨리아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러곤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갔다 온 일은 어떻게 됐어요?”
그녀가 일부러 말을 돌린 걸 빤히 알아차린 칼리드였지만, 그는 벨리아에게 장단을 맞춰 대답을 꺼내었다.
“뭐. 예상대로.”
“그래요? 만나보니까 어떻던가요?”
궁금하다는 듯 벨리아의 몸이 그에게 조금 기울어졌다. 아까 자신을 봤을 땐 별 반응도 없었으면서 이렇게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벨리아의 모습에 칼리드는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머리는 좋은 것 같더군.”
“아하하. 그게 뭐예요.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데릭은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자다.
그런 그를 만나본 소감이 똑똑한 것 같다니.
벨리아가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우리의 손을 잡게 될 거예요. 조만간 그를 만나 설득해볼 생각이거든요.”
“그냥 설득한다고 들어줄 사람처럼은 안 보이던데.”
“으음. 데릭은 좋은 사람이니 간절하게 설득하면 들어줄지도 모르죠?”
장난스러운 어조로 벨리아가 대답하자 칼리드의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그럼요.”
“어째서?”
“그때 만나봤더니 인상이 좋던데요?”
벨리아는 그에게 전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삼켰다.
그래서 그냥 농담처럼 넘어가려는데 칼리드가 불쑥 묻는다.
“……그럼 나는?”
“네? 아하하하.”
뜬금없는 물음에 벨리아는 웃음이 터졌다.
그는 종종 이렇게 뜬금없는 부분에서 질투 섞인 행동을 하곤 했다.
“벨리아. 왜 대답을 안 하지?”
“하하하.”
“응? 나는 어떤 것 같지?”
무척 진지한 어투로 대답을 재촉하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도 재밌었고.
생각해 보니 지난번 꽃을 계속 가지고 오던 모습도 그랬다.
어쩜 그는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걸까.
“뭐, 당신도 좋은 사람이죠.”
벨리아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하고 대답하자 칼리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잔뜩 웃었으니 이제 그를 놀리는 것은 그만하기로 한 벨리아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데릭을 설득할 방법이 있어요. 제가 그 사람의 약점을 알거든요.”
“약점으로 협박이라도 할 건가?”
칼리드의 물음에 벨리아는 또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헤픈 편은 아닌데, 왜 이리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
벨리아는 그가 하는 행동이 이상하게도 자꾸만 귀엽다고 느껴졌다.
“협박이라뇨. 그저 그 사람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고, 그걸 제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부탁이나 해보자는 거예요.”
말은 가볍게 꺼냈지만, 벨리아의 계획 속에선 확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데릭은 그녀의 부탁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
이전 삶에서는 데릭이 먼저 제게 호의를 가지고 잘 대해주었다. 황제에게 버림받은 제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기에 데릭의 마음이 참 고마웠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계산적으로 구는 게 못내 걸리긴 했지만, 사실 이건 데릭에게도 기적과도 같은 선물일 테니까 벨리아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보다 약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는 것 같나요?”
“제국에서 대리인이 온다더군.”
“누가 온다고 하던가요?”
자신이 아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황제라면 라울을 지지하는 자를 보낼 게 분명했다.
이미 이곳에 1황자가 있기도 하고, 라울이 벨리아에게 거절당하면서 체면을 구겼기에 칼리드에게 더한 이득이 될 상황은 만들지 않으려 할 테니까.
“셀론 후작이야.”
“그것참 공교롭네요.”
아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돌렸더니 아버지가 등장했다.
“라울 녀석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 온 것뿐일 테니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 말에는 벨리아도 동의했다.
“그보다. 내가 보낸 옷은 입어보았나?”
얼마 전 그가 보내온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를 말하는 듯했다.
그는 자꾸 이것저것 선물을 보내왔다. 처음엔 목걸이, 그다음에는 구두, 팔찌, 드레스까지. 약혼식에 대한 그의 기대감이 느껴지는 듯해 차마 거절하지도 못했다.
“네, 무척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칼리드.”
벨리아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결혼할 당사자가 이렇게 직접 옷을 다 챙기는 경우는 잘 없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뻔뻔한 칼리드의 대답에 벨리아는 오히려 더욱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챙기면, 사람들이 보기에…….”
벨리아가 열심히 설명해보려 했지만, 진심으로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드의 눈빛을 마주하곤 이내 말을 멈췄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민망하고 부끄러운 감정은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면서.
* * *
칼리드가 로니카 왕국에 온 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났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그에게 청혼을 받은 이후 많은 서신이 오가며 결혼 날짜가 내년 봄으로 확정되었다.
“그래도 약혼식은 로니카 왕국에서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클로제가 소파에서 무척 격식 없이 추욱 늘어진 채 말했다.
“뭐야. 결혼식에는 안 오려고?”
“당연히 가야지.”
긍정의 말과는 다르게 대답을 꺼내는 목소리는 어딘가 의욕이 없었다.
벨리아가 그런 클로제를 보며 후후, 소리 내 웃었다.
약혼식을 준비하는 내내 주변에서 불만을 터뜨리던 동생을 떠올리니 자꾸만 귀엽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내가 결혼하는 게 싫어?”
“아니이.”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냥 마음이 조금 시끄럽네.”
클로제가 어머니 흉내를 내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자세는 여전히 소파에 늘어져 있는 채라 벨리아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잔뜩 신난 언니를 바라보며 클로제가 볼을 부풀렸다.
“약혼식 끝나고 제국으로 바로 갈 건 아니지?”
잉고트 제국과 로니카 왕국의 수장들은 평등한 동맹 관계를 위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많은 것을 나눠서 진행하기로 했다.
결혼 당사자인 칼리드가 이미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약혼식은 일정을 당겨 로니카 왕국에서 간단하게 치르기로 하고 이후 제국에서 결혼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결혼식이 내년 봄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없어.’
그래도 황제가 생각보다 로니카 왕국과의 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뭐 금광 공동 조사 건도 있고…… 내실이 탄탄한 로니카 왕국이니 제국 입장에선 곁에 두는 게 훨씬 이득이겠지.’
벨리아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전 삶에서도 자신이 제국에 처음 갔을 때 황제가 무척이나 잘 대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건 라울의 비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명 로니카 왕국에 대한 계산도 어느 정도 들어가 있음이 확실했다.
애초에 로니카 왕국이 별 볼 일 없는 소국이었다면 황제는 결혼 자체를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고르고 골라서 가장 도움이 될 만한 곳과 결혼시켰겠지.’
벨리아의 유일한 걱정은 황제가 아끼지 않는 아들과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대우도 달라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래도 정치적인 태도는 중립인 모양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곳에 진을 뺄 필요는 없지.’
황제가 계속 이런 태도라면 제국에 도착해서 황자비로 살게 되더라도 크게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은 칼리드 황자의 비라는 이름보다 로니카 왕국의 공주라는 꼬리표가 더 의미 있을 테니까.
벨리아도 많은 관심을 받는 것보다 이 정도가 훨씬 좋았다. 아무래도 움직임에 제약이 없는 쪽이 일을 꾸미기에 편하지 않겠나.
“……조금 더 준비할 게 있어서. 아마 그게 마무리되면 곧바로 제국으로 가야지.”
클로제가 자리에서 널브러진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2황자만 보내고 언니는 내년에 결혼할 때까지 그냥 여기 있어도 되잖아.”
뭐 그렇게 급하다고 벌써 제국에 간다는 건지, 자꾸만 하루라도 빨리 떠나려는 언니의 모습에 클로제는 갈수록 서운한 마음이 커졌다.
“어떻게 그래.”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미소 지으며 대꾸하는 언니를 보며 클로제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고는 무릎을 끌어모아 얼굴을 파묻었다.
“……언니가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 알았으면 2황자도 별로라고 할 걸 그랬어.”
“뭐어?”
벨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결혼을 이렇게 후다닥 해?”
클로제가 혼자서 꿍얼꿍얼 투덜거렸다.
벨리아는 기가 막혔다.
“클로제. 너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얘기하는 거 맞아?”
“씨이.”
어쩔 땐 너무 어른스러워서 걱정이었는데, 지금 보니 아직도 아이였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면 난 결혼이 늦은 편이야.”
“뭐가 늦어! 오라버니도 아직 결혼 안 했는데!”
클로제는 괜히 가만히 있던 헤럴드를 걸고넘어졌다.
“오라버니도 곧 결혼할 텐데 뭐.”
“……언닌 아무 것도 몰라.”
클로제가 제 맘을 몰라주는 벨리아가 야속하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물었다.
“그보다, 1황자는 약혼식에 오려나?”
클로제는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실상 라울이 벨리아에게 차인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다른 많은 이들도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글쎄.”
그의 성격상 분명 오겠지?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 동생의 약혼을 축하한다며 하하 웃을 것이다. 그러고는 뒤에서 이를 갈며 칼리드에 대한 분노를 키울 테고.
“생각해 보니까 1황자가 오는 것도 웃기고, 안 오는 것도 이상하긴 하네…….”
“아마 올 거야.”
대외적인 이미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언젠가 그 가면을 만인에게 공개해버릴 거야.’
벨리아가 이를 뿌득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