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불편한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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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편한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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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편한 조력자
2023.01.21.
칼리드가 상대를 탐색하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름 반반하게 생겼다.
짜증 나게.
“안녕하십니까, 칼리드 황자 전하. 정보 길드 루네스의 로니카 왕국 지부장 레인입니다.”
“가명이군.”
뻔히 누군지 알고 있는데 가명으로 소개하다니. 어이가 없다.
“하하. 습관이라서요.”
데릭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표정도 마음에 안 든다. 웃는 목소리도 거슬렸다. 칼리드는 데릭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나이 지긋한 중년이었다면 좀 덜했을까.
반반하게 생긴 또래의 사내가 벨리아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자신도 벨리아와 단둘이 만났다가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나. 타인에 관심이 없던 자신도 넘어갔는데, 눈앞의 이 남자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벨리아는 반하지 않고 버틸 수가 없을 정도로 매력이 철철 넘쳤다.
……이미 콩깍지가 씌었음을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벨리아 공주님께는 서신으로 내용을 전달받았습니다. 저에 대해 전하께서도 전부 알고 있다고요.”
칼리드가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래도 벨리아가 너무 예뻐서 어중이떠중이 같은 이런 놈들이 꼬여대는 것이 분명했다.
벨리아의 얘기를 하며 한 톤 올라간 목소리라든가, 미묘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제 의심에 확신이 들었다.
‘음. 어쩐지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칼리드의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오랜 기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해왔던 데릭은 직감으로 그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보상 노릇을 하며 이런저런 고객들을 만난 경험이 있기에, 그에겐 그런 칼리드를 대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늘 부득이한 사정으로 함께 오지 못했지만, 다음엔 셋이서 한번 보는 게 좋겠군.”
데릭이 아까보다 더더욱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저 까다로운 손님을 대하는 정보상의 형식적인 응대일 뿐이었지만, 칼리드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벨리아를 만난다는 이야기에 저렇게 환한 미소를 보이다니!
그래서 괜히 경계하며 한마디 덧붙여 보았다.
“……조만간 있을 약혼식 준비로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지.”
괜히 우린 약혼할 사이이며, 연인이 있으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를 은근히 흘려본다.
하지만 경고를 알아듣지 못한 듯 데릭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칼리드는 자신이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법한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증이군.’
벨리아는 정보 길드의 마스터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도.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우선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이이니 사심은 버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우선 앞으로의 계획을 듣도록 하지.”
칼리드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공주님께서 제게 부탁하신 건 제국에 칼리드 전하에 대한 소문을 퍼트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들었네.”
“현재 제국 전역에 저희 길드원들이 이미 파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제가 신호를 보내면 금광의 존재와 칼리드 전하에 대한 소문을 퍼트릴 예정입니다.”
이미 벨리아에게서 전해 들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고작 이걸 이야기하려고 자신과 만나고 싶다고 한 건 아닐 것이다.
칼리드가 지긋이 데릭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해보라는 듯.
“사실 제가 전하를 만나 뵙고자 청했던 것은 한 가지 질문이 있어서였습니다.”
칼리드의 쏘아붙이는 시선에도 데릭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건 굉장히 고급 정보입니다. 그만큼 널리 알리기엔 아까운 소식이죠.”
칼리드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소문을 내지 않고 로니카 왕과 협상을 통해 자신의 재산으로 가지고 있는 게 훨씬 이익일 것이다. 굳이 1황자 측에게 견제할 거리를 던져줄 필요는 없으니까.
“심지어 국가 차원에서 발견한 것도 아닌 개인이 발견한 금광입니다. 이렇게 소문을 퍼트리기엔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를 제공받은 값은 충분히 치러드릴 테니, 이 이야기는 숨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런 이후에 여기저기 정보를 팔아 이득을 취할 생각이겠지?”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칼리드는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상인으로서 더 큰 이득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그것을 그대로 놓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만약 라울이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더라도 금광의 존재는 꼭꼭 숨긴 채 자신의 사비를 마련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을 테고.
하지만 칼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벨리아가 결정한 일이다.”
그의 대답은 무척 단호했다.
그러나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데릭이 조금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저는 전하께 여쭈고 있는 겁니다. 금광을 발견한 것은 칼리드 전하가 아니십니까.”
칼리드는 자신이 아닌 벨리아가 금광을 발견한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굳이 자신을 앞세워 일을 꾸미는 건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칼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벨리아는 생각이 많은 편이니까.’
칼리드는 역으로 데릭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의 소문이 아니고서 제국 전역을 들썩이게 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나?”
데릭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많은 의미가 숨어 있는 말이었다.
이윽고 데릭의 얼굴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뒤덮였다.
“제국을 뒤흔들 작정이시군요.”
칼리드도 데릭이 한 말의 속뜻을 곧바로 눈치챘다. 역시 괜히 정보 길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눈치도 빠르고 계산도 빠르다. 자신들이 무엇을 향해 달릴 예정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래도 쓸 만한 인재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마스터를 만날 자격이 있지 않겠나.”
“하하하. 과분한 말씀이지만, 일단 제 정체는 비밀이기에 지부장 레인으로 대해주십시오.”
정보 길드의 내부에서도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러니 마스터라는 이름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칼리드도 그의 상황을 곧바로 이해했다.
“알겠네. 그럼 그대가 내게 질문했으니 나도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칼리드는 재밌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얼마 전, 셀론 후작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벨리아에게 들었지.”
데릭의 표정이 굳었다.
“반년 전이었던가. 셀론 후작가의 하나 있던 적장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래서 셀론 후작가의 명맥이 끊긴다며 걱정하는 말이 많았는데. 이렇게 아들이 하나 더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 후작이 대외적으로 꽤나 애처가거든.”
칼리드가 데릭의 표정을 살피면서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후작가에 들어갈 생각은 정말로 없나?”
“이게 전하의 질문입니까?”
“그렇네.”
데릭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을 꺼냈다.
“예. 전 그곳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어째서지? 후작가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대가 차기 후작이 되는 건 확실하지 않나.”
누가 봐도 탐나는 조건을 대체 왜 거절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후계자가 되지 않아 후작가가 몰락한다면, 그건 분명 자신에게 유리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과는 상관없이 데릭에게 이건 기회였다.
“셀론 후작가라면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가야. 권력을 틀어잡을 기회인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자이니 그 정도는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그때 데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초에 아버지라는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이제 와 저를 찾는 것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죠. 전 셀론 후작과는 어떤 무엇도 연관되고 싶지 않습니다.”
데릭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욕심이 없군.”
“전하께서도 후작가가 그대로 사라지는 편이 더 좋으실 텐데요.”
셀론 후작은 1황자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건 어떻게 보면 1황자의 세력을 줄일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전부 꿰뚫고 있다는 듯 데릭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칼리드는 전혀 모른 척 발뺌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황제가 되시려는 게 아닙니까.”
오호?
칼리드가 흥미롭게 데릭을 살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벨리아 공주님을 만나봤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도 퍽 호기심을 자아낸다.
“공주님께서 라울 전하가 아닌 칼리드 전하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로 한동안 시끄러웠었죠.”
칼리드는 괜히 어깨가 올라갔다.
“왜 그랬을까 궁금했었는데, 공주님을 보니 바로 알겠더군요.”
데릭이 벨리아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벨리아 공주의 그 당당하고 오연한 표정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이건 오랜 정보상의 경험을 토대로 한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벨리아 공주님은 결코 황자비로만 머물 사람이 아닙니다.”
칼리드는 그의 말에 어딘가 뿌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벨리아를 잘 안다는 투로 말하는 것에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게다가 소문의 내용이 전하의 이미지를 바꾸려는 시도가 아닙니까. 그분께서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이유라면 전하를 황제로 올리고자 하는 것뿐이겠죠.”
제게 거래를 제안하던 눈빛은 아주 높은 곳을 바라보는 야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벨리아 공주가 칼리드 황자를 황제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처음엔 워낙 전하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 보니, 그걸 조금 쇄신하려는 뜻인가 했는데, 생각보다 큰 뜻이 숨겨져 있어서 당황했지만요.”
민중을 먼저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왕족이 쉬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솔직히 제국의 황위 싸움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데릭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칼리드를 똑바로 바라본다.
“저를 이리 떠보시는 건, 제가 비장의 한 수가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1황자의 세력에 자신들의 편이 되어줄 이를 숨겨둘 생각인 게 아니냐는 데릭의 질문에 칼리드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쓸 만한 놈이지 않은가. 데릭은 아주 자연스럽게 핵심을 파악해 대화를 주도했다. 확실히 루네스를 이끌 만했다. 그러나 칼리드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
“나야 그저 궁금한 걸 물었을 뿐. 하지만 그대는 발칙하게도 나를 진정으로 떠보려 했지. 영악하게도 내게 붙을지 1황자에게 붙을지 계산하면서.”
칼리드가 양손을 깍지 끼고 테이블 위에 얹었다.
“그래……. 나를 봤더니 어떤 것 같지? 이젠 어느 쪽에 붙어야겠다는 계산이 좀 서나?”
그러곤 과연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느긋한 태도로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데릭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