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목소리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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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목소리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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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목소리를 들려줘.
2023.01.17.
남들이 보았을 땐 퍽 감동적인 상봉을 마치고 벨리아와 칼리드는 늦은 오후, 벨리아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칼리드.”
물론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연인의 시간은 전혀 아니었다.
밖에 있는 자들은 두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무척 궁금해하겠지만, 사실 둘은 커다란 지도를 가운데 두고 진지하게 회의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토벌과정에서 변수는 없었나요?”
“그대가 이야기했던 그대로였어.”
“다행이네요.”
벨리아가 유쾌하다는 듯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칼리드가 손을 뻗어 벨리아의 입가를 매만졌다.
“음? 왜요?”
“아니. 그냥, 예뻐서.”
뭐야, 진짜.
함께 밤을 보낸 이후, 몇 번이나 겪은 익숙한 일이라 벨리아는 칼리드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토벌 당시의 일을 자세하게 좀 설명해 봐요. 라울 황자의 기사들이 절반도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거의 다 살아서 오다니. 계획과는 전혀 다르잖아요.”
실제로 예상했던 것은 이전에 벨리아가 그랬듯, 라울 황자와 기사 몇 명만 구해내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그들을 대부분 살려서 데려왔다. 물론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들 중 완전히 불능이 된다거나 할 정도의 중상자는 없었다.
“괜히 황자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죽게 할 수는 없지.”
“동정을 베풀지 말아요.”
벨리아가 조금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그들은 결국 우리의 적이 될 것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선의를 베풀어도 막상 라울과 부딪히게 된다면, 당연하게 반대편에 서서 검을 들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어설픈 동정으로 살려두어 나중에 라울을 무너뜨리기 더 어려워질까 걱정되었다.
“이건 동정이 아니야.”
칼리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라울의 기사들은 라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아니다. 그들은 황제와 제국에 충성하는 자들이다. 그건 칼리드가 거느리고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황제가 된다면 결국 모두 내 기사가 될 사람들이야. 그러니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게 맞아.”
그 말의 의미는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변수는 최대한 줄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칼리드는 라울에 비해 가지고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런데 저런 무른 대답이라니.
어쩐지 저만 악역이 된 것 같지 않은가.
“벨리아.”
“…….”
“벨리아. 날 봐.”
칼리드가 벨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도록 유도했다.
“……제가 냉정하다고 생각하나요?”
벨리아의 풀 죽은 목소리에 칼리드는 말없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대가 아직 나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벨리아가 칼리드의 말에 그의 품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내 소문, 전부 거짓만은 아니야. 설마 내가 누군지 잊은 건가?”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저렇게 다정하게 자신이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니 도무지 와닿지가 않았다.
칼리드는 언제나 벨리아에겐 무른 사람이었으니까.
벨리아는 그에게 자신이 손을 내밀었던 이유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맞아. 내게 약하게 군다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야.’
오히려 첫 만남을 생각하면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다정해질 거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홀라당 까먹어버렸는지.
“라울이 크게 다쳤어. 그래서 기사들과 먼저 후방으로 빠지게 했지. 이후 물길을 틀어막고 손쉽게 알라그를 토벌했고.”
칼리드가 덤덤하게 토벌과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전투 불능 상태였고, 우리는 그들이 수세에 몰렸을 때 아주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도움을 줬어.”
“라울 황자가 의심하진 않던가요?”
“해 봤자 별수 없겠지. 라울이 실패한 건 사실이고, 우리가 전멸 위기에 빠진 그들을 도와준 것도 사실이니까.”
어쨌든 결과는 무척 훌륭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번 마물 토벌에서 그가 반드시 얻어야 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마력석은요?”
“여기.”
칼리드가 내민 마력석은 성인 주먹만큼 아주 커다랬다.
황제가 가진 것 중에서도 흔치 않은 크기였다.
이걸 만약 라울이 얻게 되었다면.
‘그보다 최악은 없었겠지.’
벨리아가 이 마력석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예언이라도 하는 걸까. 혹은 미래를 보기라도 한 걸까.
칼리드는 마력석을 손에 넣었을 때 순간 등이 서늘해졌다.
벨리아가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면? 자꾸만 이런 가정을 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당신이 이걸 얻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겠죠?”
“그래.”
“이건 몰래 보관하고 계세요. 나중에 쓰일 일이 있을 테니까.”
벨리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몇 년 뒤 마탑의 한 마법사가 새로운 방식의 마도구를 개발해낸다.
그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전 생에는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제련해서 수색용 마도구로 만들어버렸다가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번엔 보다 나은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당신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벨리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칼리드에게 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 그게 누구지?”
“정보 길드 ‘루네스’의 마스터 데릭 셀론.”
정보 길드의 마스터는 또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이젠 의구심을 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보다 익숙한 이름에 칼리드가 벨리아에게 물었다.
“셀론? 셀론 후작가인가?”
“네. 후작의 사생아예요. 아, 물론 후작은 자기 아들이 정보 길드의 마스터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고요.”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벨리아는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라울을 발밑으로 데려오라니까?
칼리드는 벨리아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는 어떻게 알게 됐지?”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 담겨 있다.
정보 길드의 마스터인 것보다 벨리아가 다른 남자를 따로 만나보았다는 게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외간 남자와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해. 질투 나니까.”
그러면서 칼리드는 자연스럽게 벨리아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벨리아도 익숙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의 거리는 부쩍 가까워졌다.
‘이러면서도 마음을 온전히 열어주지 않는 게 괘씸하긴 하지만…….’
칼리드는 벨리아의 부드러운 손짓에 편하게 눈을 감았다.
“칼리드.”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청량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충족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대답 안 할 거예요?”
“응.”
칼리드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더 이름을 불러줘.
“그럼 저도 말 안 해요.”
“계속 말 걸어 봐. 목소리 들려줘.”
계속 눈을 감은 채 벨리아에게 요구했다.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는 벨리아의 손길에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나른해진다.
그녀와 함께 있지 않았던 시간은 고작 며칠이었는데, 그동안 잔뜩 날이 서 있었던 것을 생각하니 왠지 스스로도 우스웠다.
“떨어져 있는 동안 그대의 목소리가 자꾸만 환청처럼 들렸어.”
“……거짓말.”
“정말이야.”
내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고 얘기했었나?
칼리드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내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였을 뿐이었으니까. 오히려 고통스러웠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걸 참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직접 듣고 싶어. 뭐라도 좋으니까 목소리를 들려줘.”
“……동화라도 읽어 줘요?”
벨리아가 괜히 농담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칼리드는 그것도 좋지, 라며 더욱더 편한 자세를 잡는다.
“이왕이면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면 좋겠군.”
벨리아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뭘 이렇게 진지하게 대답한단 말인가.
“칼리드.”
“응.”
벨리아가 그를 불렀다.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그땐 그가 제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을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제가 왜 좋아요?”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그가 보이는 진심에 벨리아는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그도 자신을 그저 계약 관계로 생각하든가, 혹은 라울처럼 필요에 의해 취한다고 했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대체 왜…….’
미련해서 또 누군가가 보이는 마음을 온전히 믿어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걸지도 몰랐다.
라울이 그랬듯, 칼리드도 그저 진심인 척하는 것뿐인데 혼자서 오해하고 착각해서 진짜일 거라고 믿어버리는 건지도.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가 자신에게 진심이라면…….
“제게 모든 마음을 다 쏟지는 말아요.”
칼리아가 감았던 눈을 뜨고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벨리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드의 시선을 피하고자 양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무슨 뜻이지?”
“그냥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온전히 자기 생각처럼 움직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속절없이 흔들렸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나 멍청한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단 걸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인정사정없이 흔들리고 마음이 요동치고 만다.
칼리드가 제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자꾸만 밀어내려는 결심이 약해졌다.
‘한심해.’
라울을 무너뜨릴 때까지는, 그가 모든 것을 잃고 처절하게 바닥을 구를 때까지는.
‘흔들리지도 말고, 휩쓸리지도 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니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 따위 없어야 마땅했다.
‘나는 그러면 안 돼…….’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벨리아가 눈을 감았다.
칼리드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벨리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 올렸다.
“벨리아.”
“…….”
“내가 말했잖아. 도망쳐도 된다고.”
왜 저렇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하는가.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계속 외면하고 그렇게 달아나. 난 괜찮으니까.”
칼리드는 벨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으로 시야가 모두 가려졌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잔떨림으로 불안해하는 벨리아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대는 그래도 돼.”
“…….”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느린 속도로 서서히 잠식해 나갈 작정이었다.
“그저 날 이용하라고 했잖아. 죄책감 느끼지도 말고. 내 감정에 그대가 흔들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더 무서워하고 더 겁내 해.
내가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로 계속 달아나도록 해.
“처음 나를 마주했던 그날처럼 그대는 그대의 목적만 생각해도 괜찮아.”
칼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잘하고 있어.”
계속 내게 흔들려. 혼란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만을 생각해.
칼리드는 속마음을 꼭꼭 감추며 눈을 휘며 웃었다.
손바닥에 그의 속눈썹이 움직이는 게 생생하게 느껴져 벨리아가 흠칫 굳었다.
“그저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돼. 난 늘 곁에서 도울 테니까.”
칼리드가 자신의 눈을 가린 벨리아의 손을 치워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당신에게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에요.”
벨리아의 단어 선택에 칼리드가 웃음을 꾹 참았다.
몹쓸 짓이라니.
어딘가 야릇한 단어였다.
“몹쓸 짓이라면 더 당해도 난 상관없는데.”
칼리드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자 벨리아도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웃어버렸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칼리드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벨리아를 훑었다.
“그리고 그대가 말한 몹쓸 짓은 이제부터 내가 할 생각이거든.”
이윽고 칼리드는 벨리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