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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마음이 요동치는 이유 (22/88)


#22. 마음이 요동치는 이유
2023.01.14.



“하……!”

데릭이 순식간에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벨리아에게 겨눈 채 물었다.


“위험한 도박을 하시는군요. 제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를 살려둘 것 같습니까?”

데릭이 검을 벨리아의 목에 대었다. 차가운 금속이 목에 닿는 느낌이 매우 좋지 않았다.

서늘하면서 소름 끼치는 차가운 감각.

하지만 벨리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설마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당신은 절 죽이지 못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의 물음에 벨리아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그 호기심이 절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어째서 공주가 알고 있을까. 이것 말고도 어떤 정보를 더 가지고 있을까…….”

그러곤 데릭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게 궁금해서 당신은 날 못 죽여.”

정확했다.

뼛속까지 정보상의 자세가 배어 있는 자가 데릭이었다.

이대로 죽이면 궁금한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데릭이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벨리아의 목에서 거둬들였다.


“……피곤한 의뢰인이 왔군요.”

검을 허리에 찬 검집에 집어넣으며 데릭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는 이전 삶에서 벨리아가 알고 있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를 구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도박과도 같은 모험이었지만, 운이 좋아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뭐,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론 나를 죽이진 않았겠지만.’

과연 네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냐는 협박을 하긴 했지만, 셀론 후작가의 사생아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죽이는 건 그들이 감당해야 할 게 너무 컸다.

그는 계산적인 사람이니 득실을 따졌을 때 자신들에게 손해가 더 크다는 걸 깨달았을 터.


“좋습니다. 그럼 제가 예상하지 못할 정보는 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데릭의 태도가 바뀌었다.

벨리아를 의심하고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보다 짙어졌다.


“의뢰비는 이미 다 지불한 것 같은데요?”

“선금으로 달아두겠습니다. 공주님과는 앞으로 거래할 일이 많을 것 같으니.”

벨리아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

분명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거래를 이어가게 될 것이다.

벨리아는 팔짱을 척, 끼면서 조금 뜸을 들였다.


“흠. 사실 이걸 제가 얘기한다고 해도 루네스에게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닐 거예요.”

게다가 이걸 듣는다면 정보 길드 안에서 자신의 고객 등급은 가장 최상위로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길드 내부 사람들에게도 감춰졌을 뿐 아니라 제국의 황제도 모르는 정보.

벨리아는 씨익 미소 지었다.


“당신. 정보 길드 지부장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죠?”

무슨 소리냐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데릭이 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벨리아는 내심 재미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모두 이미 겪은 일을 바탕으로 얻은 정보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들이었다. 지금 꺼낼 이 이야기도 이미 그의 입으로 확답을 받았었던 내용이었고.

과연 지금의 그는 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정보 길드 루네스의 마스터 데릭 셀론. 저를 만나본 소감이 어떠신가요?”

당신만 내 정체를 알고 있으면 억울하잖아. 안 그래?
 

 

* * *

벨리아가 굳은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벤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곤 칼을 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들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조용히 주점을 빠져나갔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네. 일이 잘 풀렸어요.”

“그렇습니까.”

침울해진 벤을 보며 벨리아가 말했다.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함께 와 줄 수 있는 사람이 벤 경뿐이었어요. 늘 제 무리한 요구를 들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벨리아의 다정한 말에 벤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풀어진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아주 맛있는 과일이 들어왔어요. 남대륙에서만 자란다는 열대과일인데, 벤 경의 집으로 조금 보낼게요. 부인과 아이가 좋아할 것 같군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선물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마음 편히 받아줘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호위로 곁에 있어 준 벤이었기에 벨리아는 그에겐 조금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벤도 그런 벨리아의 마음을 알기에 끝까지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성으로 돌아가면 클로제가 이것저것 캐물어도 모른 척 부탁해요.”

“물론입니다.”

눈치가 빠른 클로제가 이번에도 빠져나온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을 것을 알 테니, 분명 벤을 귀찮게 할 게 뻔했다.


“그럼 서둘러 돌아가요.”

“예.”

 

* * *

벨리아가 성에 도착했을 때,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지?’

떠들썩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가라앉아 있는, 이상한 분위기였다.


“혹시 무슨 일 있니?”

지나가는 하녀를 불러 묻자 하녀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공주님! 네네! 방금 제국의 황자 전하들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칼리드 황자와 라울 황자, 둘이 함께 왔다는 이야기니?”

“네! 맞습니다.”

칼리드와 라울이?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이겠지.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시녀가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또 정원에서 잠드셨죠?! 지금 2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어요.”

“오면서 들었어. 그는 어디 있지?”

“정문 쪽 광장에서 왕자님과 대화 중이세요.”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밖에 나갔다 오느라 지금 입고 있는 차림새가 그에게 보여주기엔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이건 어떠세요?”

“음. 조금 어두운 색은 없을까? 너무 밝은 색은 일부러 꾸민 것 같잖아.”

“흐음. 뭘 입으셔도 꾸민 것 같으실 텐데…….”

시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벨리아가 조금 어두운 푸른색의 드레스를 골랐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수수해 보이지도 않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벨리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서둘러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시녀의 말대로 헤럴드와 칼리드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는 아주 큰 마차에 올려진 마물의 사체가 보였다.


“하하하. 역시 대단하군요!”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라울 형님이 걱정되어 따라갔을 뿐이었는데…….”

칼리드가 겸양의 말을 꺼냈다.

헤럴드는 그런 칼리드가 마음에 들었다.

벨리아와 연인이라는 소문이 났을 때만 해도 발을 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꼴 보기 싫었었는데. 지금 보니 남자답고 성격도 서글서글한 데다 능력까지 출중하다.

잘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라울 황자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덕분에 라울 황자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형님이 무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칼리드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뻔뻔하게 내뱉었다.

헤럴드는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음마저 따뜻한 사람이라며 감동을 받았다.

헤럴드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무 좋은 사람이라 걱정이 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가 슬쩍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칼리드.”

“벨리아! 어디 갔었느냐. 칼리드 황자가 알라그를 토벌한 데다 라울 황자까지 구하고 돌아왔단다!”

“어머! 그때 1황자 전하가 걱정된다고 하시더니! 칼리드가 1황자 전하를 따라간 게 다행이었네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벨리아도 뻔뻔하게 사기극에 동참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와 연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칼리드가 그런 벨리아를 보며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벨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벨리아도 익숙하게 그가 자신을 껴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응?’

하지만 기다려도 그에게선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의아해 그를 바라보자 자신에게 뻗었던 손을 거두는 칼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드?”

벨리아가 고개를 갸웃 움직이며 칼리드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칼리드가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응?!’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는데 자신을 피하는 모습에 어쩐지 엄청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뭐예요?”

맨날 어떻게든 제게 닿으려고 했던 주제에!

그랬던 그가 갑작스레 자신을 거부하는 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벨리아의 기색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칼리드는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미치겠군.’

칼리드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토벌을 막 끝내고 돌아온 상황이라 며칠째 씻지도 못했다. 게다가 옷에는 마물의 피와 진액이 묻어 있었고 조금 쾨쾨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상태로 벨리아를 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벨리아가 손을 뻗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걸 외면하자니 마물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칼리드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벨리아. 지금 옷이 더러워서 그대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

“왜요?”

“며칠째 씻지도 못했고…….”

지금 저것 때문에 밀어낸 거야!?

칼리드의 말에 벨리아는 어쩐지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일단 기분이 상했다.

자신이 손을 내밀었는데 거절한 것도 기분이 나쁘고, 자신을 보자마자 칼리드가 달려오지 않은 것도 서운하고, 고작 옷이 더럽고 씻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가오지 못하는 모습도 짜증 났다.


‘뭐야,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 건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고작해야 계약 관계라고 생각하면서 보자마자 다가오지 않았다고 서운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애써 혼란스러운 마음을 서둘러 갈무리한 후 벨리아가 칼리드를 바라보았을 때.


‘하, 진짜!’

자신보다 더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축 처진 칼리드의 얼굴에 마음이 또 한없이 약해진다. 결국 벨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칼리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벨리아!”

 

 
칼리드가 놀라서 벨리아를 불러보았지만, 벨리아는 못 들은 척하며 칼리드를 꼭 껴안았다.


“옷이 더러워지니까 이걸…….”

칼리드는 벨리아의 손을 밀어내었지만 벨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상관없어요.”

“하지만…….”

“고생했어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의 마음이 쿵쿵쿵 거세게 뛰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준 것만 해도 이미 한계치였다.


“다녀왔어.”

칼리드가 망설이던 손을 뻗어 벨리아를 힘껏 껴안았다.

그러곤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보고 싶었어, 벨리아.”

저도요, 라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는 사실.

더러운 자신을 보며 상관없다고 말하던 모습.

그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어쩐지 칼리드는 벨리아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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