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만약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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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만약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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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만약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2023.01.07.
칼리드가 기사들을 이끌고 라울을 뒤따라 쫓아갔다.
벨리아는 매일같이 붙어 있던 그의 부재에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어도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물론, 이건 그저, 익숙하게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일 뿐이었다.
“하아…….”
도무지 집중되지 않는다.
벨리아가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곧 머리카락을 헝클며 얼굴을 가렸다.
“……익숙한 사람은 무슨.”
떠나기 전 한동안 못 본다는 핑계를 대며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칼리드를 생각하니 자꾸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전 삶에서는 분명히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비록 한 번도 만나보진 못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라울이 황제가 되었을 때, 제게 걸림돌이 될 칼리드를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라울은 칼리드에게 대공위를 내리고 아주 먼 곳으로 영지를 하사했다. 이후 칼리드는 두 번 다시 수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잊혀진 대공이었지만, 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수도로 오지 않은 것이 라울을 위한다거나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적절한 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라울에게 계속 칼리드를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의 라울은 벨리아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내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이미 과거로 돌아와 모든 것이 부질없긴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칼리드는 반역을 일으켰을까?
라울은 에르제와 행복했을까?
왕족이 모두 사라진 로니카 왕국은 어떻게 멸망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야. 나는 과거로 돌아왔고, 그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벨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보다 금광에 대해 퍼트릴 시기를 잡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친서로 약혼 날짜가 정해졌을 때.”
그때가 최적의 시기일 것이다.
모든 관심이 이쪽에 쏠려 있을 때, 금광에 대해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칼리드가 마물을 토벌하고 위기에 처한 라울을 구해내었다는 사실에 금광의 소식을 얹어 더욱 그를 빛나게 만드는 것이다.
‘소문을 퍼뜨릴 사람들이 필요해.’
사교계에서도 당연히 퍼져야 할 소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국민들이다.
그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했다.
사교계에서는 이미 칼리드에 대한 소문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건 모두 라울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둔 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당장 사교계를 노리는 것은 어려울 테니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제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위로 올라가야겠지.’
누구보다 현명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황자. 심지어 그런 황자가 능력마저 뛰어나다면 모두의 선망을 받게 될 것이다.
제국민들에게 차기 황제는 당연히 칼리드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했다.
그는 제국의 적통 황자이니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교계에도 그 이야기들이 퍼지게 되겠지.
‘상황에 맞게 전략은 바뀌어야 해.’
라울을 황제로 올릴 때는 제국의 귀족들을 노렸었다.
이미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기에 능력마저 뛰어나다는 점을 중심으로 소문을 퍼지게 했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반대여야 했다.
‘제국민들을 시작으로 귀족들의 마음마저 칼리드를 향하게 만들겠어.’
그렇게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을 모두 뒤집고, 두 명의 황자 중 황위에 걸맞은 자가 누군지 온 세상에 알릴 것이다.
‘그건 그가 전문이겠지.’
벨리아는 얼마 전 찾아가려 했었던 누군가를 떠올리곤, 곧바로 망설임 없이 펜을 잡았다.
* * *
칼리드는 기사들을 독려하며 이동을 계속했다. 그들은 라울이 빼돌린 보고서에 적힌 위치가 아닌, 벨리아가 알려준 위치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반신반의였지만, 지금까지의 벨리아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었기에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1황자와 그의 기사단의 흔적을 추적해 강의 하류에 도착했을 때, 알라그에게 공격받고 있는 라울과 기사들을 발견했다.
“와우. 공주님이 말씀하셨던 게 정말이네요?”
아시드는 잔뜩 신나서 말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진짜일지 의심했습니다만, 이젠 벨리아 공주님이 하는 말씀이라면 전부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드는 벨리아가 알라그가 나타난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하길래, 속으론 성에서 책만 읽은 공주님이 뭘 안다고…… 하며 불신했었다. 하지만 벨리아 공주의 말이 맞았다. 아시드가 눈을 반짝였다.
처음에는 겁도 없이 감히 칼리드 황자 전하를 오라 가라 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었다.
하지만 칼리드가 워낙 벨리아를 마음에 들어 하고 그녀에 대한 험담을 금지했기에 탐탁지 않아도 그저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는 없었는데…….
솔직히 금광도, 마물 토벌도 벨리아 공주의 공이 컸다. 아시드는 어쩐지 공주에 대한 호감도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상황 보며 들어가도록 하지. 지금까진 할 만해 보이니까.”
칼리드가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왕 도와주려면 아주 위험한 순간, 모든 것이 다 끝났다 느꼈을 때 도와야 했다.
애매하게 여력이 있을 때 구해줘 봤자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들을 견제할 게 뻔했다.
“1조가 협곡으로 따로 이동했으니 곧 물길도 끊길 겁니다.”
칼리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좋았다.
비가 온다거나 갑자기 돌풍이 분다거나 하는 변수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 두 시간이면 정리되겠군.”
먼발치에서 알라그를 해치우기 위해 열심히 공격하는 라울과 그의 기사단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저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더라도 칼리드는 그들의 실패를 지켜본 후 우연을 가장해 나타날 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라울은 실패했고, 그를 칼리드가 구해내었다는 그림을 위해서.
‘벨리아가 원하는 걸 이루어 주어야지.’
그래야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칼리드는 냉철하게 상황을 살폈다.
‘오른쪽……. 뒤…….’
알라그를 공격하기 좋은 위치다.
라울과 그의 기사단이 고전하는 이유도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점액질 때문에 무기가 몸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뭘 어쨌길래 저렇게 위치도 못 잡고 갈팡질팡하고 있나.
‘저런 인력을 저따위로밖에 못 써먹다니. 머저리 같은 놈.’
1황자가 이끄는 기사단은 사실 무척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황제가 어중이떠중이를 붙여주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라울은 방심했고, 상황을 얕봤고, 자신을 과신했다. 그 결과가 지금 저 모습이었다.
라울이 능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다. 만약 그의 능력이 많이 부족했다면 황제가 아주 사랑하는 아들이었어도 그의 곁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붙어 있지는 않았겠지.
“생각보다 더 마물의 힘이 강해 보입니다.”
확실히 벨리아가 일러주었던 대로 일반적인 알라그의 위력과는 전혀 달랐다.
칼리드가 유심히 마물의 꼬리 부근을 살폈다. 당연히 육안으로 확인되는 건 없겠지만, 괜히 그 부근이 신경 쓰인다.
‘정말 마력석이 있는 건가…….’
일반적이지 않은 마물의 위력과 그것이 나타난 위치.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정보가 없었다. 벨리아가 자신이 아닌 라울을 선택했다면, 이 모든 정보는 그 녀석에게 흘러갔을 터였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정에 칼리드는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벨리아가 라울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다행스러울 줄이야.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자신이 아니라 같은 로니카 왕국의 귀족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그녀와 영영 만나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은 건가……?’
칼리드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벨리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소라면 무시해버렸을 칼리드도 편지를 보고 로니카 왕국까지 직접 찾아왔다.
아주 작은 변덕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 작은 일들이 모여 지금의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전하. 1황자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지금 투입할까요?”
아시드의 말에 칼리드가 다시 전장을 살폈다.
라울은 상처를 입었고 기사들도 겨우겨우 버티는 수준이었다.
조금 더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지금 들어갈 것인가.’
어깨를 다친 라울이 피를 흘리며 후방으로 빠졌다.
기사들 중에서도 부상자들이 생겼다.
아직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칼리드는 잠시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놔두면 전멸할 겁니다.”
……기사들은 죄가 없다.
황자들의 기싸움에 말려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억울하겠지.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전투 준비.”
스릉.
칼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은 오랜만의 전투에 눈을 빛냈다.
알라그 정도야 1조가 물길만 잘 막아준다면 금방 처리할 수 있다.
“지금부터 라울 황자와 기사들을 구한다. 알라그 토벌은 그들을 모두 구해낸 이후에 시작한다.”
“예!”
칼리드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라울을 바라보았다.
“그럼 작전을 개시한다.”
* * *
전장에 합류한 2황자 측 기사들은 순식간에 알라그의 주의를 끌어 기사들과 1황자 라울을 구출해 후방으로 빠졌다.
마물이 이동하지 않도록 아시드를 포함한 몇몇 기사들이 강가에 남아 알라그과 대치했고, 나머지 기사들과 칼리드는 후방에서 마물과의 전투로 심하게 다친 자들부터 치료를 시작했다.
응급처치에 불과했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귀중한 대처였다.
“네놈이 어떻게…….”
어깨를 크게 다친 라울도 흐릿한 의식 속에서 칼리드의 얼굴을 발견했다.
칼리드는 라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이내 라울은 의식을 잃었고, 혼절한 제 형제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드가 망설임 없이 뒤돌아 마물을 향해 다가갔다.
칼리드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드는 모습을 지켜본 1황자의 기사들이 그의 뒷모습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록 성격은 더럽고 행실은 나빴지만, 테사 공작의 손자답게 그의 실력 하나만은 진짜였다.
이윽고 상류로 보낸 기사들이 물길을 막는 것에 성공했는지, 강에 흐르는 물이 점점 줄어들다 어느덧 바닥을 드러냈다.
“모두 마물을 둘러싸 공격한다. 시간 끌지 마라! 단숨에 숨통을 끊어내라!”
“예!”
칼리드가 휘두르는 칼에 알라그의 팔이 잘려 나갔다.
기사들은 사방에서 마물에게 칼을 꽂아 넣었다.
물이 없는 곳에서 마물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졌다.
“와아아!”
지켜보던 1황자 측의 기사들도, 함께 싸운 기사들도 순식간에 제압된 현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칼리드는 그 소리를 뒤로한 채 마물의 꼬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칼을 찔러 넣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하……!”
그곳에는 벨리아가 이야기했던 대로, 정말로 마력석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