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사건의 빠른 진행 (19/88)


#19. 사건의 빠른 진행
2023.01.03.



 
라울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곁에 있는 화병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다.


“하아, 하아…….”

분노를 다스리려는 듯 힘겹게 심호흡을 해 보지만, 들끓는 속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감히……!’

제 것이어야 했다.

로니카 왕국의 공주를 갖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토록 공을 들였는데 눈앞에서 그걸 채가다니.

라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확인했다.


“……네가 이야기한 게 전부 사실이겠지?”

“네. 칼리드 황자가 새벽녘 벨리아 공주의 침실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한 자들이 있습니다.”

“천박한 놈……!”

벨리아를 보자마자 자신의 여자임을 확신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보라색의 눈동자.

게다가 차분하고 우아한 태도까지.

자신의 곁에 둘 여자로 완벽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진심으로 벨리아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만큼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로니카 왕국의 공주. 신분도 빠지지 않는다.

라울은 자신이 황제가 되었을 때 그 곁에는 반드시 벨리아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부러 노렸을 거야. 내가 벨리아를 가질 수 없도록 그놈이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겠지.”

분명 자신이 청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훼방을 놓고 싶었겠지.

칼리드에 대한 라울의 감정은 무어라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뭐든 자신이 더 우월해야만 했다. 황제의 진정한 아들은 자신이니까.

미쳐버린 황후의 밑에서 자란 칼리드 따위, 제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자꾸만 거슬렸다.


“칼리드……!”

어렸을 땐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를 보며 안쓰럽다고 동정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일 때마다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째서? 선택을 받는 건 나여야 하는데?’

라울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칭찬을 받는 것도, 뛰어나다 칭송받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라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칼리드에게 자신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는 거지?

그는 언제나 자신의 등 뒤를 쫓아와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야만 했다.


“전하. 그리고…….”

우물쭈물 들려오는 말에 라울이 표정을 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국에서 청혼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청혼서라면 이미 로니카 왕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또 무슨 청혼서란 말인가.


“칼리드 황자가 벨리아 공주에게 보내는 정식 청혼서입니다.”

“……방금 뭐라 했나. 정식 청혼서? 지금 폐하께서 그 청혼장에 직인을 찍어주었다고 말하는 건가?!”

라울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벨리아가 칼리드와 연인이라며 대놓고 친밀한 행동을 보여도, 어차피 그녀는 자신과 결혼하게 될 테니 전부 뜬소문으로 무마시킬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칼리드는 정식으로 황제의 직인이 찍힌 청혼서를 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1황자인 자신이 이미 로니카 공주에게 청혼하지 않았나. 그러니 황제가 그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라울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힘을 쓰셨습니다.”

라울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황후를 움직이다니.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에게서 벨리아를 빼앗으려는 칼리드의 모습에 라울이 다시금 분노했다. 감히. 칼리드가. 제 것을 빼앗으려 했다.


“……공주를 만나러 간다.”

라울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곤 순식간에 평소와 같은 온화한 표정을 꾸며냈다.


“곧 방문하겠다고 전해.”

“네.”

칼리드는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벨리아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벨리아도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

라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생각보다 늦게 아셨네요?”

벨리아는 싱긋 웃으며 라울에게 물었다. 이젠 그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벨리아 공주…….”

“라울 황자 전하.”

아련한 목소리로 감성팔이를 하려는 라울을 바라보며 벨리아가 말을 끊었다.


“전 칼리드 황자 전하와 결혼할 거예요.”

“칼리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라울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겁니다.”

그럴 리가.

오히려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벨리아 쪽이었다.


“그건 전하께서 잘못 알고 계시는 거예요.”

“아뇨. 그대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칼리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라울이 벨리아를 향해 걱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도 없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 그대가 힘들어질 겁니다.”

마치 널 걱정하는 건 나뿐이라는 듯이 오만한 태도였다.


“설령 그가 절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어요.”

벨리아는 조소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의 곁에 있지 말라는 말을 라울이 자신에게 할 줄은 몰랐다.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건 벨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라울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 사실을 새겨넣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 부질없죠. 어느 날은 사랑한다고 말하던 입이 어느 날은 이만 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해요.”

“그게 무슨?”

“네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녀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라울은 벨리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건지.

벨리아는 라울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당신은 모른다고 하겠지만, 내가 겪은 일이 과거로 돌아왔다고 모두 사라지진 않아.’

가족을 잃은 슬픔, 나라를 잃은 비참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당신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다는 사실.

벨리아는 그때 찢기고 부서져 버린 자신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건 당신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지만, 내 속죄이기도 하니까.’

벨리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정이라는 건 참 우습죠. 믿는 사람만 바보가 되고, 진심인 사람만 비참해져요.”

“공주…….”

벨리아는 아득히 먼 과거를 떠올리듯 눈을 감았다.

여전히 자신은 어둠 속에 있었다.


“역으로 물어볼게요. 전하께선 어떻게 확신하죠? 평생 저만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그 감정이 일시적인 욕구일 뿐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나요?”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내 마음을 그리도 부정하십니까.”

이미 겪어봤으니까.

라울이 벨리아를 배신하던 그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래요. 어쩌면 그 또한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 그를 선택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괜찮아요.”

뭐가 됐든 너보단 낫겠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저는 그를 선택하고 싶으니까.”

라울은 단호한 벨리아의 모습에 결국 무어라 더 설득하지 못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잉고트 제국의 2황자, 칼리드가 로니카 왕국 벨리아 공주에게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냈다.

1황자가 청혼한 사람에게 2황자도 청혼서를 보냈다는 사실에 양국은 발칵 뒤집혔다.

모두의 관심사가 벨리아에게 쏠렸다.

과연 벨리아 공주는 1황자를 선택할 것인가, 2황자를 선택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벨리아 공주가 1황자인 라울을 선택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황제가 가장 아끼는 아들,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아들.

공공연히 차기 황제는 적통 황자인 2황자를 제치고 1황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아도 황제는 침묵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차기 권력은 라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로니카 왕국의 공주 또한 1황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 서신을 잉고트 제국에 잘 전해주세요.”

벨리아가 작성한 서신을 시종장에게 건넸다.

왕이 황제에게 보내는 긍정의 답에 벨리아의 서신이 동봉될 예정이었다.

얼마 뒤, 왕과 공주의 편지가 황제에게 도착했고 그녀의 선택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모두가 궁금해하던 답이 공표되었다.

-벨리아 공주는 2황자 칼리드를 선택했다.

그 소식에 제국 전역이 들썩거렸다.


“제길!”

라울은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아바마마께서 이 결혼을 승낙한단 말인가!


“아바마마께선 뭐라고 하셨나?”

“로니카 왕국과의 동맹 건이 얽혀 있어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젠장!!”

빌어먹을!

금광의 수색은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공들이던 여자는 칼리드가 채갔다.

로니카 왕국까지 와서 얻어낸 결과가 아무것도 없었다.

라울은 이를 갈았다.


“마물 토벌 일정이 언제였지?”

“다음 달 중순입니다.”

“일정을 당겨. 이번 달 말에 출발한다.”

“하지만 준비가…….”

“고작 알라그 하나 잡는 게 어려운가?! 제국의 기사들이 할 소린 아니지 않나!”

마물을 토벌한 공이라도 자신이 가져가야 했다.

황제가 아무리 제 아들을 예뻐하고 아낀다 해도 내세울 게 없다면 대놓고 밀어줄 수가 없다.


“이건 무조건 성공해야 해. 칼리드가 알아차려서 마물 토벌의 전공마저 세운다면…….”

웃음거리가 되는 건 자신이었다.

라울은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물 토벌만은 성공해야 한다.

토벌에 대한 대책은 전부 세웠다.

알라그가 산에서 내려와 강에 머무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아예 사례가 없지도 않다.

강으로 내려온 알라그의 토벌에 대한 자료도 모두 모아 확인했다.

실패는 없을 것이다.

* * *

제국에서 황제의 서신이 도착했다.

칼리드 황자와 벨리아 공주의 약혼으로 양국의 동맹이 더욱더 굳건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황제도 그들의 만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밀어준다는 이야기였다.

양국은 둘의 약혼 준비를 진행하기 위해 많은 서신이 오갔다.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라울 황자가 기사들을 이끌고 마물 토벌에 나섰다.


“어떻게 생각하지?”

칼리드와 벨리아는 라울이 떠난 왕성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토벌에 실패한 라울을 구해내려면 칼리드도 곧 떠나야 했지만, 그전에 둘은 조금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칼리드는 꼭 맞잡고 있는 벨리아의 손을 흔들며 물었다.


“흐음. 일단 가는 길에 다른 마물도 토벌하면서 이동해야 하니 생각보다 강까지 도착하는 게 늦어질 거예요.”

“우리는 모두 준비되어 있다.”

이미 칼리드 휘하의 기사들은 토벌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라울이 몰래 정보를 빼돌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에 대비한 훈련까지 진행했다.

물을 막을 협곡의 위치도, 알라그의 토벌 방법도 완벽하게 숙지했다.

이젠 실전만 남은 상태였다.


“라울 황자가 출발한 지 겨우 하루 지났으니까 4일만 더 지난 후 뒤따라가세요.”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아의 전술은 기사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무척 깔끔했다.

로니카의 사람이기에 알 수 있었던 지형의 특성과 마물의 약점을 잘 이용한 작전이었다.


“알라그 토벌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물길만 틀어막는다면 기사들의 전력으로 충분히 처리 가능한 수준이니까.”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칼리드는 자꾸만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녀를 믿겠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제 입으로 말했다. 그런 주제에 꺼냈던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후……. 아직도 갈 길이 멀군.’

벨리아가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고 온전히 본인을 맡기기까진 아무래도 한참 걸릴 것 같다.


“그보다 금광에 대해서는 일단 함구하세요. 마물을 토벌하고 돌아온 이후에 퍼트릴 작정이니까.”

칼리드가 데려온 조사단은 무척 은밀하게 남부로 향했으니, 현재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관련자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극적인 방법으로 당신이 드러나게 할 생각이에요. 이미 계획은 짜여 있고요.”

“어떤 계획이지?”

“음, 우선 토벌에 성공하고 돌아오세요.”

 

 
벨리아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밝게 웃었다.


“지금 말씀드려도 재밌겠지만, 깜짝 선물처럼 돌아왔을 때의 즐거움으로 놔두는 것도 좋겠죠.”

“그렇다면, 부디 내가 놀랄 만큼 대단한 일이길 바라지.”

그렇게 말하는 칼리드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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