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계약의 완성
(18/88)
18. 계약의 완성
(18/88)
#18. 계약의 완성
2022.12.31.
더없이 열망이 가득한 시선에 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릴 뻔했다.
그러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서둘러 모든 감정을 삼켜내었다.
“벨리아.”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왜 이렇게 질식할 것만 같이 무거운지 모르겠다.
오래전 라울이 벨리아를 불렀을 때는 그저 꿈꾸듯 달콤했다.
하지만 칼리드가 부르는 벨리아의 이름은 등에 찌릿한 감각이 일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만큼 무서웠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벨리아는 본능적으로 칼리드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얼굴을 돌렸다.
“벨리아.”
왜 자꾸만 이렇게 부르는가.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날 봐.”
칼리드가 자신을 외면한 벨리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렸다.
“외면하지 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
“내가 그대를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가?”
벨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대가 나를 밀어내길래, 나도 천천히 다가가 보려고 했었어. 하지만 그대는 나를 똑바로 마주하지도 않은 채 자꾸 도망가기만 하지.”
어쩐지 울고 싶었다.
왜 이 남자는 이렇게나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가.
자신들의 관계에서 진심이 섞인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무엇이 두려운 거지?”
칼리드는 벨리아가 꼭꼭 숨겨둔 마음을 순식간에 헤집어 파낸다.
그 사실에 벨리아는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그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눈치챈 걸까.
“도망치고 싶고 외면하고 싶겠지만, 나는 그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졌어.”
“……제가 원치 않는다면요?”
겨우 뱉어낸 벨리아의 물음에 칼리드가 더없이 나른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다 잡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와도 같은 자태였다.
그에 벨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그대는 거부해도 좋아. 지금처럼 도망가도 돼.”
그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어차피 칼리드에겐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최선을 다해서 그대를 붙잡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재미있는 숨바꼭질을 한다 생각해보지 않겠어?
칼리드가 아이를 어르듯 은근한 어조로 벨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칼리드.”
“그래. 그대는 계속 그렇게 나를 부르면 돼.”
벨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멈춰 세워야 했다.
이건 그저 관심이 소유욕으로 변질된 것뿐이다.
그의 진심 어린 사랑이 아니다.
‘그러니 착각하면 안 돼.’
누군가에게 감정으로 휘둘리는 건 이젠 질색이었다.
라울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또 흔들리다니. 한심했다.
벨리아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게서 손을 떼세요.”
벨리아의 차가운 말에 그녀의 뺨을 지분거리던 칼리드의 손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가 조금 멀어지자마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압사당할 것 같이 무거웠던 공기조차 한결 가볍다.
“하아.”
벨리아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이런 분위기로 유도하는 것도 피해야 했다.
무겁고 끈적한, 욕망으로 가득한 저 시선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칼리드. 우린 고작해야…….”
그때 칼리드가 빠르게 벨리아의 말을 끊었다.
“계약으로 얽힌 사이라는 소리를 할 거라면 관둬.”
그러곤 답답하다는 듯 흘러내린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긴다.
벨리아는 흔들리고 있었다.
첫 만남과는 다르게 구태여 변명하며 그를 밀어내는 것만 봐도 명확했다.
“난 지금 어떻게 해야 너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뿐이니까.”
벨리아가 흠칫 굳었다.
그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은근하고 나른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대에겐 내가 필요하지.”
거부해야 함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건 나를 마음껏 이용할 기회를 주겠다는 소리야.”
칼리드는 더욱 집요하게 벨리아를 몰아붙였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격정적으로 마음이 요동친다.
벨리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온몸을 결박당한 듯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칼리드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어때. 사냥개를 완벽하게 길들이고 싶지 않아?”
그윽하게 물어오는 그의 물음에 결국 벨리아의 망설임이 멈췄다.
‘……내겐 그가 필요해.’
계약은 변한 게 없다.
오로지, 진심이 담기느냐 아니냐의 조건만 추가되었을 뿐.
그렇다면 자신만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벨리아는 칼리드가 걸어온 도발을 받아들였다.
* * *
다음날 남부로 금광의 조사를 위해 떠났던 조사단에게서 급보가 도착했다.
그곳에서 금광의 존재가 확실하게 확인되었으며, 지도에 표시된 강가에서도 사금이 채취되었다고.
금광이 발견되기까지 적어도 2주를 예상했었지만, 그보다 이르게 결과가 도착했다.
칼리드는 그 결과 보고서를 가지고 벨리아를 찾아왔다.
“정말로 그대의 말이 맞았어. 그곳에서 대규모 금광의 반응이 나타났다는군.”
그는 놀랍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보고서를 벨리아에게 내밀었다.
벨리아는 빠르게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수색용 마도구에 격렬한 반응 있음. 금광 확실.]
급하게 보내온 보고라 내용은 짧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마도구로 위치만 확인한 것이니 추가적으로 조사는 더 해봐야겠지만, 아마 그곳에는 반드시 금광이 존재할 것이다.
라울이 책임자로 있는 동부 산맥에서 나타난 반응보다 훨씬 강한 반응이 나타났다.
조만간 로니카 왕국에서도 추가 인원을 파견하겠지.
‘금광을 발견한 게 칼리드 황자의 뛰어난 판단 때문이라고 소문을 퍼뜨린다면…….’
라울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미 라울은 동쪽에서 헛수고 중이었으니까.
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금광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 그러니 이전에도 몇 년이나 지나서야 발견되지 않았나.
“다행이네요.”
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드디어 칼리드가 그녀의 말이 모두 진실임을 알았다. 그러니 이젠 그의 차례였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도 아닌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곧바로 그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 껄끄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계획에 대해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벨리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전 약속을 지켰어요. 그러니 이제 제가 원하는 첫 번째 조건을 이뤄주세요. 청혼서는 언제 도착하죠?”
그래야 우리의 계약서에 서명까지 완료되는 것이다.
벨리아가 또렷한 목소리로 그에게 요구했다.
긴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고 삐딱한 자세로 벨리아를 바라보던 칼리드가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지금쯤이면 이리로 오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제는 그대가 진정한 목적을 말할 때지. 그 조건은 성사된 것과도 다름없으니.”
이건 아니지.
그의 양심 없는 태도에 벨리아는 괜히 발끈하는 마음이 생겼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는 아직 약속한 조건을 이루지 못하지 않았나.
라울은 여전히 로니카 왕에게 전달했던 청혼서를 철회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칼리드를 마주하는 게 어색하기만 하던 자신의 모습은 까맣게 잊은 채, 벨리아가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라울 황자의 청혼이 철회된 이후라고 얘기했었잖아요.”
“어차피 곧 청혼서가 도착해. 그럼 그대가 원하는 조건은 자연스레 이루어질 거고.”
칼리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며 벨리아에게 지긋이 시선을 맞췄다. 그러곤 무척이나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는 벨리아를 향해 칼리드가 책상을 손으로 짚고 상체를 바싹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그는 글자 하나하나 그녀에게 꽂아 넣듯 한 글자씩 씹어가며 전했다.
“그러니 솔직하게 털어놔. 그대의 진짜 목적이 뭐지?”
벨리아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와 앞으로도 함께하기 위해선 자신의 진정한 목적은 공유해야 했다. 그는 조력자였지, 자신의 하수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벨리아.”
칼리드가 다시금 벨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날 이용하라고 했잖아. 겁내지 말고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말해.”
벨리아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무겁게 입을 떼어냈다.
“……당신이 황제가 되어주세요.”
“뭐라고?”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칼리드가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당신이 잃은 것들을 모두 되찾아준다고 했잖아요.”
황제가 되라는 말.
칼리드에게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벨리아가 두 번째였다.
그의 어머니인 황후와 벨리아.
‘저 말을 다시 들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칼리드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어째서 그녀는 본인의 목적은 이야기하지 않고 칼리드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말만 하는가.
“내가 황제가 되는 것과 그대의 목적이 무슨 상관이지?”
그의 물음에 벨리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를 속으로 삼켰다.
“……저는, 제 목적은 라울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그 사람이 철저하게 파멸하는 걸 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그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바로 칼리드로 하여금 라울이 가졌던 황제의 자리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라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손에 쥐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벨리아는 언제나 자신이 죽어가던 그 순간이 매초 단위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억지로 얼굴을 붙잡고 독약이 든 차를 입에 들이붓던 그 잔혹한 얼굴이.
죽어가는 제게 향하는 시선 한 자락에 동정조차 품지 않았던 황제의 얼굴이.
그를 짓밟고 무너뜨리고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전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그래…….
자신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고작 제 감정에 흔들리며 유약하게 굴 때가 아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해야 한다. 심지어 그조차 자신을 마음껏 이용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나.
벨리아의 흔들리던 시선이 멈췄다.
“당신은 절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라울의 것을 손에 넣고 싶다는 소유욕이 생긴 것뿐이죠. 하지만 이젠 그것조차 상관없어요.”
라울이 보고를 가로채면서까지 마물 토벌을 몰래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과거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저 평화에 안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빠뜨리고, 로니카를 무너뜨릴 자였다.
“절 원한다고 했나요?”
고작 그것으로 그를 제게 묶어둘 수 있다면.
고작 그것만으로 라울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세간의 평판 따위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벨리아가 천천히 칼리드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칼리드의 뺨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칼리드가 시선을 떼지 못하자 벨리아가 눈을 사르르 접고 웃었다.
“라울을 제 발밑으로 데려와요. 그럼 그때는 제 마음마저 온전히 드릴 테니까.”
벨리아가 그에게 살며시 입을 맞췄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칼리드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듯 웃어 버린다. 하지만 이내 짧은 웃음은 사라지고 그에게서 낮고 위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의 소원. 반드시 이뤄주지.”
“좋아요. 그럼 그때의 실수를 만회해 봐요, 칼리드.”
벨리아가 환영식이 있던 날에 나눴던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도발했다.
칼리드는 숨이 막힌다는 듯 자신의 셔츠의 단추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러곤 여유라곤 느껴지지 않는 다급한 표정으로 벨리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