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비밀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17/88)


#17. 비밀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2022.12.27.


우습게도 칼리드가 제 감정을 알아차리기도 전, 벨리아가 먼저 그의 마음을 눈치채 버렸다. 그러니 그렇게 먼저 선수를 쳐서 달아났을 것이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래서 칼리드는 벨리아에게 천천히 다가가 보려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제게 흔들린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때마다 자꾸만 그다음이 보고 싶어진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벨리아와 마주할 때마다 그녀가 탐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아니야.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그녀가 제게 흔들리는 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겁쟁이인 벨리아는 계속 도망칠 것이고, 이런 상태라면 그런 그녀를 계속 쫓아갈 수밖에 없겠지.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칼리드는 이 쫓고 쫓기는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다.

칼리드는 진심으로 벨리아를 원했다.

그녀가 흘리는 시선 한 자락조차 제 것이길 바랐다.

벨리아가 있을 정원을 뒤돌아본 그의 눈에서 깊고 진한 열망이 어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하하하. 그래서?”

“요즘 2황자가 언니 뒤만 졸졸 쫓아다닌다고 소문이 자자하다니까요?”

“벨리아가 난감하겠구나.”

오랜만에 남매끼리 함께 보내는 시간.

클로제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헤럴드에게 요즘 있었던 일을 열심히 설명했다.


“매번 화원에 가서 꽃을 직접 고르고 포장해서 들고 가는데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있죠?”

자포자기 심정으로 상황을 관망하던 벨리아가 클로제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보았다.

클로제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한껏 어둡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노란색 꽃을 들고 걸어가는데 눈을 떼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요.”

“하하하. 그래도 그가 우리 벨리아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내 입장에선 기분이 좋기만 하구나.”

두 사람이 아주 사이좋은 연인이라 생각하며 헤럴드는 그저 허허 웃었다.

벨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저렇게 순하디순해서 앞으로 어쩌려나 모르겠다.

이전에도 자신이 라울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온전히 믿어버리지 않았나.


“오라버니. 잉고트 제국은 동맹국이긴 하지만, 온전한 저희의 편은 아니에요.”

“알고 있단다.”

“아뇨. 혹시나 제가 황자비가 되어 잉고트 제국으로 가게 되더라도 결코 그곳은 완전한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늘 경계하시고, 의심을 풀지 말아요.”

벨리아가 단호하게 하는 말에 헤럴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벨리아. 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털어놓거라.”

“……그런 거 없어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구나.”

헤럴드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칼리드 황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벨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네.”

“그래. 그럼 되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는 헤럴드를 바라보며 벨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클로제가 와그작, 쿠키를 씹어먹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국으로 가고 난 뒤가 걱정인 모양인데.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긴 하지만, 나 눈치도 빠른 편이고 상황 판단도 잘하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여긴 날 믿고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앳된 얼굴의 클로제가 벨리아를 단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공주가 언니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나는 이 생활을 꽤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러니까 언니는 얽매이지 않아도 돼.”

클로제가 말을 마치고 민망한지 다시 손을 뻗어 쿠키를 와그작 소리를 내며 베어 문다.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모습이 멋있었다.

헤럴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질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믿어주렴. 너희가 봤을 때는 영 미덥지 못한 것 같다만…….”

헤럴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래도 힘내보마.”

그러곤 든든해 보이려는 듯 치아까지 보이며 씨익 웃는다.

벨리아는 그 모습을 보곤 꺄르르 소리 내 웃어 버렸다.

* * *

벨리아는 칼리드가 전해주는 서류를 살폈다.


“……정말이었군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산맥에서 발견된 마물에 대해서 여러 번 상부로 보고서를 보냈지만, 모두 중간에서 가로채여졌다.


“이걸 공론화할 생각인가?”

“아뇨. 일단 내버려 두세요.”

라울은 예상대로 칼리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물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걸 알아보라고 한 거지?”

“그는 실패할 거예요.”

벨리아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라울이 혼자서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선 오로지 자신의 기사들로만 성공해야 했다. 그러니 칼리드의 기사는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삶과 다른 것이 없다. 벨리아는 라울의 실패를 발판으로 삼아 칼리드의 활약을 부각시킬 작정이었다.


“보고서 읽어보셨죠?”

“그래.”

“당신이 생각해도 실패할 것 같지 않나요?”

보고서에는 발견된 마물의 종류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대부분은 잔챙이들이었지만, 강 속에서 머무는 마물이 아주 위험한 녀석이었다.


“알라그가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군.”

알라그는 고산지대의 호수에서 사는 마물이었다.

이렇게 지대가 낮은 곳에서 발견된 적은 손에 꼽혔다.

무척 날카로운 발톱과 단단한 외피, 그리고 몸을 감싼 미끈거리는 점액질까지.

알라그를 처치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바로 이 점액질이었다.

점액질이 물에 닿으면 더욱 점성이 커져 무기로 공격을 해도 본체에까지 닿기가 어려웠기에 물가에서 알라그를 퇴치하기는 쉽지 않았다.


“라울 황자가 과연 알라그를 퇴치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제국의 기사들은 뛰어난 자들이다. 속단하긴 일러.”

“아뇨. 라울 황자도 그렇게 생각하며 토벌을 준비하고 있겠죠. 하지만 공식적인 토벌대를 꾸린 것도 아니고 측근들만 이끌고 가서 무슨 성과를 낼 수 있겠어요. 그들은 지금 상황을 얕보고 있어요.”

벨리아는 보고서를 휙휙 넘겼다.

몇 장의 종이가 넘어가고 난 이후, 벨리아의 손이 멈췄다.


“여기 보시면 마력석의 존재가 의심된다 적혀 있죠?”

칼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석을 가진 마물이 일반 마물과 같을까요?”

벨리아가 씨익 웃었다.

그러곤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지난번 금광의 위치를 설명할 때 사용했던 지도였다.


“여기 강을 따라 쭉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어느 한 지점을 콕 찍었다.


“이 부근에 강물을 막아버릴 수 있는 좁은 협곡이 있어요. 알라그의 주변에 물을 죄다 없앤 후 퇴치하면 토벌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물이 가장 문제니까.”

칼리드는 지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벨리아가 얘기한 전략이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지형이었다.

상류에서 물줄기를 틀어막아 강의 바닥을 드러나게 만든 후 알라그를 토벌한다.

어려운 전략은 아니었지만, 마물 토벌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가 꺼낼 수 있는 전략 또한 아니었다. 주변 지형과 마물의 특성까지 모두 상세히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작전이었다.


“그대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많이 읽었거든요.”

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칼리드는 벨리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의아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라울 대신 나를 선택한 것부터…….’

금광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

라울이 보고서를 누락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보고서를 읽자마자 알라그의 정보와 토벌 전략을 세운 것.

벨리아는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응했다.

칼리드는 그 가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때 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제가 이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그게 뭐지?”

“당신이 라울 황자와 그 기사들을 구해내고 반드시 알라그를 퇴치하셔야 해요.”

칼리드가 모든 무훈을 가져가야만 했다. 거기다가.


“알라그의 몸통과 꼬리가 연결되는 부분에 마력석이 있을 테니까.”

벨리아가 단언했다.


“그러니 그것까지 전하께서 챙기셔야 해요.”

대체 이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칼리드는 말간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벨리아를 혼란스럽게 마주했다.


“제가 의심스럽다는 거 알아요.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 정보를 어떻게 얻었을까 궁금하시겠죠.”

벨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난번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칼리드가 말없이 벨리아를 응시했다.


“……절 믿어주셔야 해요.”

“벨리아.”

“저도 알아요. 제가 수상하게 보인다는 거.”

하지만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그가 믿어줄 리가 없었다.

이건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과거로 돌아온 벨리아조차 잠이 들기 전, 이게 모두 꿈이 아닐까 의심하곤 하니까.


‘이해받지 못할 거야. 하지만…….’

벨리아는 고개를 떨궜다.


“때가 되면 모두 말씀드릴게요.”

계속 의심을 할까? 혹은 일단 두고 보자고 생각을 할까?

칼리드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을 살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때 무척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칼리드가 벨리아를 불렀다.


“벨리아.”

벨리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는 의심이 풀리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태도였다. 벨리아도 그런 그의 태도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와의 관계가 유지되어야 했다.

비록 회귀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못하더라도 다른 정보를 더 주어 그를 설득해보려 마음을 먹었을 때, 귓가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대가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가?”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벨리아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그건 더없이 허무맹랑하고 꿈같은 이야기였다.

칼리드가 의심하고 예상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대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난 공주에게 목줄을 잡힌 신세이지.”

“그게 무슨……?”

마음을 품었다니.

벨리아가 깜짝 놀라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런 벨리아의 모습에 오히려 칼리드가 더 놀랍다는 듯 물었다.


“그대도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름 열렬하게 표현하지 않았었나?”

“농담은 그만둬요.”

“농담이 아니야, 벨리아.”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진지했다.

어쩐지 목이 콱, 막힌 듯 답답했다.


“……칼리드.”

겨우겨우 흘러나오는 숨에 그를 부를 수 있었다.


 
칼리드가 책상을 돌아서 의자에 앉아 있는 벨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그를 벨리아가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칼리드가 책상에 한쪽 손을 짚고 벨리아의 곁에 똑바로 섰다.


“그래.”

칼리드가 벨리아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느릿한 손길로 그녀의 눈가, 뺨, 귀까지 어루만졌다.


“머리로는 그대를 의심하고 캐물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보다 앞서는 감정은…….”

칼리드가 벨리아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벨리아는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이 고장 난 것처럼 자꾸 쿵쾅거렸다.

우린 고작해야 계약으로 묶여 있는 관계일 뿐인데. 그를 이용하는 것뿐이어야 하는데.

흔들리는 벨리아의 보라색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던 칼리드가 더없이 욕망에 잠긴 탁한 목소리로 지금의 감정을 그대로 내뱉었다.


“너를 갖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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