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번엔 그를 도우러 가지 않는다
(16/88)
16. 이번엔 그를 도우러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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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번엔 그를 도우러 가지 않는다
2022.12.24.
사락사락, 서류를 살피는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조금 어두웠지만 벨리아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 잔뜩 집중한 채 최근 마물의 동향에 대해 적혀있는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목격됐다는 보고가 없어.’
분명 라울과 약혼 얘기가 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이즈음 금광을 수색하던 자들 사이에서 마물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와야 했다.
혹시나 자신의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것인가?
벨리아는 다시 차근차근 최근 토벌되었다는 마물이나 목격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결국 보고 있던 서류를 덮어버리곤 옆에 있는 펜을 들어 빈 종이에 기억을 정리했다.
로니카 왕국과 잉고트 제국을 가로지르는 산맥이 있다. 지금 모두가 혈안이 되어 금광을 찾으려 애쓰는 바로 그곳이었다.
그 산맥에는 산과 산을 가로지르는 넓고 커다란 강이 있는데, 그 주변에서 마물이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금광을 찾아내기 위해 산맥을 수색하던 자들 사이에서도 그 마물을 보았다는 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자 곧바로 토벌 일정이 잡혔다. 당연히 선봉은 라울이었다.
마물을 퇴치해 전공을 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운이 좋다면 마력석까지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가 이런 일에서 빠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물에 대한 보고조차 존재하지 않아.’
왜 달라진 거지?
보고가 올라와야 하는 시기에 과거와 달라진 거라곤 벨리아와 라울이 연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수상해…….”
벨리아는 모든 가정을 꺼내 보았다.
‘마물이 나타나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보고서가 누락된 걸까?
조사단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기본적으로 라울이 관리하고 있다.
제국에서 파견된 조사단의 대표였으니 당연했다.
‘그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중간에서 보고서를 가로챘을 확률이 높다. 그가 정보를 독점하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나 아무런 보고가 없을 리가 없다.
잉고트 제국에서 온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조사단으로 파견된 사람 중에서는 로니카 왕국의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분명 그들도 보고서를 올렸을 것이고, 그게 라울에 의해 가로채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무슨 속셈이지?’
혼자서 마력석을 독차지할 셈인가?
만약 자신이 미래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마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른 채 지나갈 뻔했다.
그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대체 이전 삶에선 얼마나 많은 일에 눈이 가려졌던 걸까.
"……."
과거에 라울은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마물을 퇴치하러 떠났었다.
하지만 그 첫 번째 토벌은.
‘……완벽하게 실패했지.’
벨리아는 그때의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라울을 배웅하고 매일 밤을 그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결국 아바마마께 처음으로 떼를 써서 로니카 왕국의 기사들을 데리고 라울을 만나러 떠났다.
그리고 그때 마물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는 라울을 겨우 구해낼 수 있었다.
‘괜찮아요?’
‘……벨리아. 잠시 혼자 있게 해줘.’
그는 마물 토벌에 실패하고 구출 당했다는 사실에 무척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벨리아는 라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자신이라는 죄책감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이곳의 지형, 마물의 종류, 현재 전력, 토벌 가능성…….
그날 라울을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조합해 애썼던 기억이 났다.
‘라울. 제게 방법이 있어요.’
벨리아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만약 정말로 라울이 마물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라울은 지금 분수도 모르고 또다시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그때와 똑같이 그는 자신이 모든 공을 가져가고 싶겠지.
‘그렇게 두진 않아.’
이전의 생에서는 칼리드가 로니카 제국에 온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땐 로니카 왕국의 공주인 자신과도 연인이 된 상태였다. 모든 것이 본인이 생각한 대로 순조롭게 흘러갔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가 계획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벨리아는 라울을 거절했고, 잉고트 제국에 있어야 할 칼리드는 뜬금없이 로니카 왕국을 방문했다. 게다가 자신이 청혼한 벨리아와 연인이라고 우긴다.
여태 수색하던 금광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에 초조할 만도 했다.
“혼자 토벌하려고 하는 걸까?”
그때처럼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면서.
“흐응.”
자꾸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어쩌면 일이 쉬워질 수도 있다.
벨리아는 이번엔 라울을 구하러 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가 로니카 왕국에 방문했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건 추후 제국에서 왕국을 공격할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들 순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죽게 두진 않아.’
벨리아는 라울이 점점 비참해지는 모습을 지켜볼 작정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자신이 아닌, 칼리드로 하여금 그를 구해오게 할 계획이었다.
그토록 싫어하는 칼리드에게 목숨 빚을 지다니, 라울의 성격이라면 무척 자존심이 상하겠지?
이번 사건으로 1황자는 무리하게 토벌하려다 실패한 어리석은 황자로 소문이 날 것이다.
편지를 쓰고 있는 벨리아의 손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우선 라울이 정말로 정보를 빼돌리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해.’
그러고 나서는 확실하게 라울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준비해야 했다.
벨리아는 그 일을 칼리드에게 맡기기로 했다.
여기까지 떠올린 벨리아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보다 대체 왜 자꾸…….’
그의 최근 행태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온다.
‘겸사겸사 그를 보내서 잠시 떨어뜨려 두는 게 좋겠어.’
고민을 끝마친 벨리아는 서둘러 작성하던 편지를 마무리하고 그것을 봉했다.
“공주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시녀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벨리아는 작성한 편지를 시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칼리드 황자에게 전해주고 오렴.”
오늘은 귀족 영애들과 함께하는 티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이런 자리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공주라는 신분이기에 한 번씩 이렇게 시간을 내야만 했다. 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으로 향했다.
* * *
최근 왕국을 방문한 제국의 황자들이 무척 인기가 많은지 티파티에 참여한 귀족 영애들이 쉴 새 없이 그들에 대해 재잘거렸다.
“공주님. 칼리드 황자 전하와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아주 우연한 기회로 인연이 닿았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희만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했기에, 그대들에게 전할 수 없어 미안하군요.”
“어머, 아니에요! 저희가 너무 사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죄송해요.”
벨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보다, 마리안 상점에서 새로운 디저트가 나왔다던데.”
벨리아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가 오갔다.
원래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벨리아는 조금 피곤했지만, 끝까지 웃는 낯을 유지하며 그녀들의 말을 경청했다.
“벨리아.”
그때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파티에 참여한 귀족 영애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칼리드가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벨리아도 그 모습을 발견하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요즘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칼리드의 저런 모습이었다.
우습게도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칼리드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전에도 계약자에게 하는 것치곤 퍽 상냥한 편이긴 했지만…….’
최근엔 마치 정말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그의 모습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벨리아는 우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쩐 일인가요, 칼리드?”
“이걸 전해주고 싶어서.”
칼리드가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내밀었다.
“백합?”
“화원에 예쁘게 피었더군. 이걸 보니 그대 생각이 나서. 마침 티파티를 하고 있으니, 이곳에 장식해두면 좋을 것 같군.”
칼리드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벨리아는 꽃다발과 칼리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필 다른 종류도 아니고 백합이라니.
청초한 백합과 날카롭게 벼려진 칼리드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상반된 기운을 지녔다.
어쩐지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머.”
“칼리드 황자 전하께서…….”
조용히 이야기한다고 했겠지만, 귀족 영애들의 수군거림이 벨리아의 귓가로 들려왔다.
벨리아는 꽃다발을 든 채로 칼리드의 가슴에 포옥 기대어 안겼다.
그에게 감동하여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고마워요.”
“별말씀을.”
칼리드는 그리 대답하며 제게 기대어 오는 벨리아를 꼭 껴안았다.
그러곤 즐겁다는 듯 웃는다.
“……이제 그만 해요.”
“매정하군. 나는 그댈 생각해서 꽃다발까지 들고 찾아왔는데.”
칼리드가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벨리아는 기가 막혔다.
그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느낀 순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는 더욱더 철저하게 거리를 뒀고.
그런데 그때부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꽃다발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훌쩍 벌린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오는 그의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쿵쿵, 울려대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칼리드.”
얼른 그를 돌려보내야지.
여기 머물게 했다간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번엔 벨리아보다 칼리드가 빨랐다.
그는 벨리아의 어깨를 붙잡아 품에서 떨어뜨리곤 티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레이디들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군. 그럼 좋은 시간 보내길.”
뭐?!
벨리아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벨리아. 그대가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렀던 거야. 얼굴 봤으니 이만 가도록 하지.”
칼리드는 미련 한 점 없다는 듯 깔끔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며 벨리아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편지는 잘 받았어. 그건 최대한 빠르게 알아보도록 하지.”
그러고는 아주 능숙하게 그녀가 바라는 만큼 다시 거리를 두고 물러난다. 어쩐지 그 모습이 조금 얄미웠다.
하지만 다들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등을 돌려 사라지는 칼리드를 바라보며 벨리아는 그저 상냥하게 배웅의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 * *
미소를 머금고 있던 칼리드의 얼굴이 정원을 빠져나오자마자 빠르게 굳었다.
조급해지는 감정을 꼭꼭 감추고 벨리아 앞에선 다정하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그도 이미 한계였다.
“하…….”
칼리드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는 자신이 이런 행동까지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보게 된, 다른 남자와의 친밀한 모습이 자꾸만 거슬렸다. 그저 보고 있으면 재미있었고, 조금 신경이 쓰이던 것뿐이었는데……. 그날 이후 온종일 그 장면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거기다 먼저 연애와 결혼을 제안한 주제에 감정적으로 얽히자마자 곧바로 거리를 훌쩍 둬버렸다는 점이 제일 화가 났다.
“내가 머저리도 아니고.”
이게 어떤 마음인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한번 자각한 감정은 성난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벨리아가 저만을 보고 웃었으면 했다. 제게만 온 신경을 기울이길 바랐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분명 내게서 도망치겠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칼리드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