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정신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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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정신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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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정신 차려야지.
2022.12.20.
그들은 곧바로 성 안으로 들어온 후, 그녀의 방과 연결되어 있는 응접실에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황후 폐하께서 곧 청혼서를 보내주겠노라 응답하셨어. 아마 조만간 정식으로 청혼서가 도착할 거야.”
“황후 폐하께서 나서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벨리아가 알맞게 우려진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폐하께서 1황자 전하에게 불리한 조건을 들어줄 리 없을 뿐더러, 황후 폐하께서 직접 움직일 거란 확신이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칼리드가 물었다.
“무슨 뜻이지?”
황후는 칼리드의 어머니였다.
그런 그녀가 그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확신이 들지 않았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그런 칼리드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벨리아가 당황하며 변명했다.
“아. 전 그저, 황후 폐하께서 황후궁에서 나오지 않으시니까 도움을 주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벨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 칼리드가 물었다.
“그런 소문이 로니카에도 퍼졌나?”
“네?”
과거와 미래의 정보가 섞이며 혼동이 있었다.
순식간에 벨리아의 표정이 낭패라는 듯 어두워졌다.
벨리아가 제국에서 지냈을 때, 황후가 황후궁에서 칩거하듯 지내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지금의 벨리아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을 꺼내고 보니 벨리아도 제국에 가기 전에는 황후의 사정을 몰랐다는 게 떠올랐다.
‘……실수야.’
벨리아가 자연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표정을 정리했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그때 칼리드가 아주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선 욕심도 많고, 과시하길 좋아하는 분이시지. 그러니 아무리 다른 여자에게 푹 빠져 있다고 한들, 황후 폐하께서 황후궁에서 두문불출하며 죽은 사람처럼 지낸다는 걸 타국까지 퍼지게 두지는 않았을 거야. 그건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일 테니까.”
그의 손가락이 느리게 찻잔을 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캐묻지 않겠어. 그러니 어떻게 변명할지 머리 굴리지 않아도 돼.”
벨리아가 조금 당혹스러워하며 칼리드를 바라보자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황후 폐하께선 황비에게 무언가 넘겨주는 조건으로 청혼서를 받아냈을 거야. 분명 적잖은 것을 포기하셨겠지.”
“……그런가요.”
“어쨌든 그대는 곧 정식으로 청혼서가 올 거란 사실만 알아두면 돼.”
벨리아가 작게 끄덕였다.
“미리 알려줘서 고마워요.”
“협조하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해야지.”
칼리드는 호쾌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혹시 내일 점심에 일정이 있나? 식사라도 같이 하지.”
“미안해요. 그땐 승마하는 시간이라…….”
벨리아가 난감하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기껏 제안해주었는데 거절하려니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참이라 바로 빠지기는 좀 내키지 않아서요. 저녁에는 시간 괜찮아요.”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여유 있을 때 익혀두는 게 좋을 테니까. 벨리아는 최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칼리드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일도 아까 그 기사가 가르쳐주나?”
“벤 경이요? 아, 네. 맞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했어요.”
“호위와 무척 친밀하군?”
그의 목소리에서 못마땅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팔짱을 낀 자세도 어딘가 삐딱했다.
“물론이죠. 제겐 가족같이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벨리아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평온하게 답했다.
칼리드는 승마장에서 벨리아와 벤이 널 만난 게 행운이라는 식의 대화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칼리드가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벨리아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전하?”
“……이젠 내 이름을 부를 때가 되지 않았나?”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벨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어냈다.
“칼리드.”
역시나 그의 이름을 부를 땐 입 안에서 글자가 맴도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가 눈치채게 두고 싶진 않았다.
“벨리아.”
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한다.
그때 칼리드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벨리아에게 가깝게 다가갔다.
“생각해 봤는데, 우리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그대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아.”
칼리드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승마를 가르쳐주는 건 어떤가?”
“전하께서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해 벨리아가 습관적으로 전하라 부르자, 칼리드가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하지만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게다가,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아까 벤과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일반 검술은 어렵더라도, 단검을 다루는 것 정도는 알려줄 수 있어.”
“그게 정말인가요?”
벨리아가 반색했다.
“그래. 그러니 승마는 내게 배우도록 해. 단검술을 알려주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없는 게 편하니까.”
그에게서 승마를 배우면서 단검까지 함께 익힐 수 있다니. 단검이라면 눈에 띄지 않도록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급할 때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에 쏙 드는 제안이었다.
벨리아는 곧바로 수락의 말을 건넸다.
“그대가 쓸 만한 단검을 찾아볼 테니, 당분간은 말 타는 것을 봐주도록 하지.”
“고마워요.”
벨리아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칼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볼일은 전부 끝났다는 듯 깔끔한 태도였다.
“승마를 마치고 난 이후에 식사도 같이하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될 수 있으면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 게 좋을 테니까.”
“알겠어요. 따로 일정은 없으니, 내일은 종일 함께 있는 것으로 하죠.”
벨리아도 칼리드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방을 나서던 칼리드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벨리아. 내일 올 때는 그자는 두고 오는 게 좋겠어.”
그러곤 휙, 하니 방을 빠져나갔다.
“……아?”
이거, 설마?
‘착각이겠지.’
벨리아는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소파에 스르륵 기대어 누웠다.
오후라 노을의 햇살이 방 안 깊숙하게 들어왔다. 벨리아가 양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하루라도 빨리 칼리드가 제게 청혼서를 가져와야 한다.
“후우…….”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놓친 기분이었다.
벨리아는 차분하게 지금까지 진행된 일을 정리해보았다.
우선은 2황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성공했다. 그와도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가 청혼서를 보내온다면 그를 선택해 깔끔하게 라울의 청혼도 거절할 수 있다.
그런 후에는 2황자의 비가 되어 칼리드를 황제로 만들 계획을 세우면 된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 정보를 토대로 라울이 성공할 일들을 모두 빼앗는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다. 황제가 1황자를 편애한다는 게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황제는 곧 죽는다.
‘3년도 안 남았어.’
그 사이에 판도를 바꿔야 했다.
그렇게 놓고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없음을 깨달은 벨리아가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춤거려선 안 된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이쪽은 상대보다 가진 게 없다. 그러니 지금보다 더욱 날카롭게 자신을 벼른 뒤 한순간에 그의 목을 물어뜯어야 했다. 지금처럼 감정 놀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벨리아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제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이라.’
파티장에서 칼리드가 꺼내었던 농담이 분명한 그 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가 그럴 리 없지 않나.
“벨리아.”
이 순간 어째서 칼리드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떠오르는지.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그의 푸른 눈동자도, 제게 입을 맞출 듯 다가오던 그의 유려한 얼굴도, 그날의 선선했던 바람과 서늘하게 내려앉았던 공기까지.
마치 그 자리에 지금도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만.”
벨리아는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제 뺨을 치곤 양손으로 꾹 눌렀다.
볼이 화끈화끈했다.
“정신 차려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어쩐지 죄책감이 느껴진다.
복수하겠다고 다짐할 땐 언제고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지내는 게 자꾸만 마음에 덜컥덜컥 남았다. 제가 느꼈던 그 절망감은 여전히 가슴에 생채기처럼 깊게 파여 박혀 있는데.
벨리아의 눈빛이 다시 단단하게 굳어 어두워졌다.
* * *
오전에 칼리드와 승마를 하고 난 후, 점심을 함께 먹고, 오후에는 산책하는 생활도 익숙해졌다. 그 모습은 이젠 다른 이들에게도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오늘도 벨리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승마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칼리드와 점심을 함께 하고 있었다.
“맛있군요.”
식사를 마친 벨리아가 입을 닦아내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테이블에 턱을 괴고 삐딱한 자세를 한 칼리드가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얘기 안 해줄 건가?”
“정말 아무 일도 없으니까요.”
걱정이 분명한 물음에도 돌아오는 건 냉정한 대답뿐이었다.
칼리드의 미간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요즘 통 웃지도 않고, 내게 차갑게 굴어. 그런데도 별일 아니라고?”
“과한 참견이군요.”
그 말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그대는 뭐가 그렇게 무섭지?”
그가 뜬금없이 불쑥 꺼내든 질문에 벨리아의 손이 움찔 굳었다.
눈치가 빠른 건 그도 마찬가지다.
제 속내를 들킨 것에 심장이 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역시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지금은 너무 가까웠다. 그러니 속마음을 들키는 게 아닌가.
결국 쓴웃음을 짓던 벨리아가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칼리드. 승마는 다시 벤 경에게 배우도록 할게요. 그동안 바쁜데도 굳이 시간 내주어 고마웠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칼리드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했지?”
“주변에서 저희가 사이좋은 연인처럼 보인다는 말이 많이 들리더군요. 목적은 이뤘어요. 그러니 당신에게 배우는 건 이만하면 됐어요.”
그가 가르쳐주기로 했던 단검술은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기존 단검들이 그녀에게 너무 무거웠기에, 벨리아가 사용하기 적당한 무게로 새로 제작해 그것을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검은 아직 제작이 끝나지 않아 당장 단검술을 배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승마를 함께하기로 한 원 목적을 달성했는데 계속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함께하는 건 진짜 연인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진짜 연인이 아니었고.
그것은 칼리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이 전부 충분히 납득되었다.
‘그래. 우린 계약을 한 조력자일 뿐이지. 그런데…….’
칼리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될 것을 자꾸만 그녀를 붙잡고 싶어진다.
“그래도 우리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칼리드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벨리아도 그의 기분이 상했음을 눈치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자신이 해이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벨리아는 지금처럼 그와 감정적으로 가까워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계약으로 묶인 관계이니 필요 이상 친밀해질 이유는 없다.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사이가 나쁘면 곤란하죠.”
벨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청혼서를 가져와요, 칼리드.”
다시 한번 그에게 독촉한 후, 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식당을 나간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칼리드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긋이,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