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이대로는 안 돼. (14/88)


#14. 이대로는 안 돼.
2022.12.17.



 
2황자의 환영 파티도 무사히 끝났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황자들이 왕성에 머물고는 있었지만, 그들 또한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으니 금광이 발견되기 전까진 당분간 조금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오늘의 업무를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길. 벨리아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 돼.’

뭔가 부족했다.

칼리드를 이용해서 라울을 무너뜨리겠다는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래선 그에게만 기대는 꼴이 되고 만다.


“공주님. 고민이 있으십니까?”

호위 기사인 벤이 그런 벨리아의 곁에서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런 걱정에 고마움을 담아 무어라 대꾸를 하려던 벨리아의 눈에 벤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커다란 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술을 배운다면 어떨까? 분명 도움이 될 텐데.

벨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벤 경.”

“예.”

“그 검 한번 들어봐도 되나요?”

벨리아의 갑작스러운 요청을 듣자마자 벤이 단칼에 거절의 답을 했다.


“안 됩니다.”

“안 되나요?”

순식간에 돌아온 대답에 벨리아가 올망올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예.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그냥 들어보기만 할게요. 옆에서 경이 보고 있으면 되잖아요. 휘두르진 않을 거예요.”

“……공주님.”

벤이 무척 곤란한 표정으로 벨리아를 불러보았지만, 이미 벨리아의 눈은 검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무언가에 빠진 벨리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그녀의 호위 기사인 벤이 제 공주님을 막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아. 들어보기만 하셔야 합니다. 정말 위험하니까요.”

결국 그녀를 이길 수 없었던 벤이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벨리아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렇게 벤의 도움으로 검을 들어보게 된 벨리아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었다.

하지만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을 때,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딱딱하면서도 서늘한 묘한 감각에 벨리아가 잠시 멈칫 굳었다. 하지만 이내 양손에 힘을 주어 검을 들었다.


“생각보다 무겁네요?”

검을 들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들자마자 놓쳐버렸을 것이다.

그 사실에 벨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고집을 부렸는지 깨닫고 볼이 붉어졌다.


“미안해요. 경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어요.”

벤은 조심스럽게 회수한 검을 검집에 잘 넣은 후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궁금증은 좀 풀리셨습니까?”

“음, 혹시 경이 들고 다니는 검보다 가벼운 것도 있나요?”

“있기야 있습니다만, 그것도 공주님께서 들기엔 무거울 겁니다.”

“그래요?”

벨리아는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검술을 익히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더니.

아무래도 평생 도서관에서 책만 읽거나 운동이라곤 정원 산책이 전부였던 자신에겐 검술은 무리였던 것 같다.


“아쉽네요.”

벨리아가 진심 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벤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검에 관심이 생기셨습니까?”

“……그냥 저도 제 한 몸 지킬 수단은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요.”

그녀의 말에 벤이 곰곰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우선 공주님께선 움직임이 거의 없는 편이시니까, 체력적으로 검술은 힘드실 겁니다.”

사실을 말한 거였지만, 괜히 그 말에 침울해질 무렵.

벤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 승마는 어떠십니까? 요즘 여성들도 승마는 취미로 많이 즐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승마요?”

“예. 여차하면 말을 타고 도망갈 수도 있고. 지금 검술을 익히는 것보다는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벨리아가 제국의 황자들에게 청혼을 받은 상황을 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황자와 결혼을 한다면 그녀는 홀로 제국으로 떠나야 할 것이다. 그건 분명 크나큰 두려움이겠지.

그렇기에 벤은 벨리아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승마라니…….”

벤의 제안에 벨리아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말을 탈 수 있다면 분명 언제고 도움이 되리라.

검술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승마는 무척 유용한 기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벨리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좋네요. 벤 경. 혹시 제게 승마를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저보다는 전문가에게 배우는 게 좋을 텐데요.”

“음. 제가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걸 그리 알리고 싶진 않아서요.”

승마라면 벤도 충분히 알려줄 만한 실력이긴 했으니까.


“그 말씀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왕이나 왕자에게도 전하지 말아 달라는 뜻인가 싶어 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벨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비밀은 아니지만, 걱정할 걸 뻔히 아는데 굳이 떠벌리고 싶진 않아요. 게다가, 이왕이면 벤 경처럼 편한 이에게 배우면 좋을 것 같았을 뿐이랍니다.”

하긴. 벨리아는 낯선 이와 마주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런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벨리아는 몸의 라인을 훤히 드러내는 제 차림이 조금 어색해서 자꾸만 걸음걸이가 어정쩡해졌다.

평소의 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승마용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게 쭈뼛거리며 왕성 한쪽 구석에 마련된 실내 승마장에 들어서자 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그는 벨리아가 연습하며 탈 말 한 마리의 고삐를 잘 붙잡은 채 서 있었다.


“벤 경. 고마워요.”

“아닙니다. 공주님께 도움이 된다면 제겐 더없이 기쁜 일입니다.”

상냥한 벤의 말에 벨리아가 조금 마음이 놓였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벤이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이론은 전부 알고 계시지요?”

“물론이죠.”

벨리아는 승마를 배우기로 한 이후 곧바로 도서관에 가서 승마에 관련된 책을 전부 섭렵했다.

기초 이론쯤이야 이미 완벽하게 숙지했다.

의기양양하다는 듯 턱을 치켜드는 벨리아의 모습에 벤이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바로 기승부터 해보겠습니다. 제가 잡아드릴 테니까 천천히 차근차근해 보시면 됩니다.”

벤은 벨리아가 발을 딛고 올라설 받침대를 놓아주었다.


“이걸 딛고 올라가십시오. 이쪽에 왼쪽 발을 넣으시고.”

벨리아는 벤이 일러주는 대로 조심스럽게 발판을 딛고 등자에 왼발을 올렸다. 그러곤 책에서 봤던 것을 기억하며 최대한 말의 배에 신발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안장에 올라탔다.


“잘하셨습니다. 여러 번 해본 것처럼 능숙하시군요.”

“책을 읽고 나서 몇 번이고 움직임을 머릿속으로 그려봤어요. 그게 도움이 되었나 봐요.”

벨리아가 야무지게 오른발을 반대쪽 등자에 끼우곤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상한 움직임을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건, 공주님께서 승마에 재능이 있다는 뜻입니다.”

고작 말에 올라탄 것을 성공했다고 이렇게 칭찬해주니 벨리아는 괜히 민망해져 뺨을 긁적거렸다.

벤은 정말 친절한 선생님이었다.

벨리아에 대한 애정도 가득했을 뿐더러, 의외로 가르침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는 무척 차분한 목소리로 이해가 쏙쏙 잘 되게 설명해주었는데, 그 덕분에 벨리아도 빠르게 승마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정말 재능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말과도 빠르게 친해지시는군요.”

“정말 재밌네요.”

벨리아가 무척 환하게 웃으며 말에서 내려왔다.

말에서 내려올 때도 벤이 하나하나 잡아주긴 했지만, 확실히 벨리아가 운동신경이 나쁘진 않은 듯 일련의 과정들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제가 매번 도서관에서만 살아서 그렇지 어렸을 때부터 검을 들었다면 검술에도 재능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농담이 분명한 말이었지만, 벤이 진지하게 검토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자님께서도 검술이 무척 뛰어나시니까요.”

“……더 어렸을 때였다면 검술을 배워보는 거였는데.”

벨리아가 아쉬움을 표했다.

벤은 그저 지금 검술을 배우긴 너무 늦었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말이었지만, 사실 회귀한 시점에 대한 아쉬움의 표출이었다.

훨씬 어렸을 때로 돌아왔다면 검술을 배워서 자신을 지킬 수단을 더욱더 철저하게 만들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애초에 라울의 청혼을 거절하겠다는 고민 대신, 로니카 왕국을 지키고 그를 무너뜨릴 생각만 하면 되었을 거고.


“벤 경. 정말 제가 지금 검술을 배우는 건 힘들까요?”

“하하하. 공주님. 안 됩니다.”

“벤 경이 잘 가르쳐주면 되잖아요.”

말을 타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벤에게 칭찬을 받은 것도 뿌듯했지만, 스스로도 몸을 움직이는 게 무척 수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은근히 자신감이 붙은 벨리아가 슬쩍 검술까지 욕심을 내게 된 것이었다.


“가르침의 문제가 아닙니다. 검을 들고 휘두른다는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만…….”

벤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휘두르기도 하지요.”

거기까지만 들어도 벨리아는 말의 숨겨진 뜻을 이해했다. 누군가를 해할 수 있다는 자각 없이 가볍게 검을 배우는 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고집부려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공주님께서 의욕을 보이시는 일인데 아무런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벤의 침울한 표정에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처럼 이렇게 훌륭한 승마 선생님이 되어주셨는걸요?”

“하하하. 그거 아십니까? 제가 공주님께 늘 좋은 말만 해드리는 게 아니라, 항상 공주님께서 제게 이리 칭찬을 해주신다는 걸요.”

“그런가요?”

역시 벤은 참 좋은 사람이다.

벨리아는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준 호위 기사가 벤이었음이 참 행복하게 느껴졌다.


“경이 제 기사라는 게 정말 행운이라 느껴지네요.”

그렇게 즐겁게 첫 승마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려 출구 쪽으로 몸을 튼 순간.
 

 


“……전하?”

그곳엔 언제 와 있었는지 칼리드가 삐딱하게 서서 벨리아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칼리드가 승마장까진 무슨 일인가 싶어 벨리아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전할 얘기가 있어서.”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걸 보니, 급한 일인가 봐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전하?”

벨리아가 다시 한번 그를 부르자 그제야 칼리드가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의 답신이 도착했어. 그대를 만나러 갔더니 승마장에 있다고 하더군.”

“아아. 그렇군요. 나머지 얘긴 방에 가서 할까요?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해서.”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묘하게 그의 눈길은 벨리아의 어깨를 지나 있었다.

그에 의아한 표정으로 벨리아가 뒤를 돌아보다, 여태 벤을 칼리드에게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쪽은 제 호위 기사인 벤 호릴트 경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늘 곁에서 저를 지켜주는 분이랍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2황자 전하.”

벤이 깍듯하게 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나 칼리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벤을 노려보다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반갑군.”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는 말투였다.

하지만 칼리드는 평소에도 그리 상냥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벨리아와 벤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벤 경. 저는 전하와 함께 돌아갈 테니 뒷정리를 부탁해요.”

벨리아는 서둘러 벤에게 인사를 건네고 칼리드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그들이 승마장을 막 나서려는 순간, 칼리드가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

그의 묘한 시선이 잠시 벤에게 머물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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