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부딪히는 마음 (13/88)


#13. 부딪히는 마음
2022.12.13.



 
오랫동안 밖에 나와 있어서 그런지 살갗에 닿는 바람이 점점 차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

그때 칼리드가 벨리아의 어깨에 자신의 겉옷을 걸쳐주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고마워요.”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옷을 잘 붙잡았다. 춥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그의 옷을 걸치고 있으려니 온몸에 온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고작 파티장의 테라스에서 누군가가 어깨에 옷을 걸쳐준 것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하다니. 그 사실이 우스워 입가에 미소를 띠우려는데 칼리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까, 라울과 무슨 얘기를 나눴지?”

“네?”

“그 녀석과 춤을 춘 이후부터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던데.”

칼리드는 라울이 벨리아에게 어떤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궁금하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에는 벨리아가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라 입을 다물었지만, 그녀가 점점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결국 다시 화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여전히 벨리아는 망설이듯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라울이 자신에 대해 좋은 소리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분명 저 자그마한 머리통 속에서는 말을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있겠지. 얼마나 수많은 생각이 흘러가고 있을지 알 만했다.


“공주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의 한숨 섞인 말에 벨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굳이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라울 황자가 후회하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당신을 선택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라울을 선택했을 때는 왜 그런 결말을 맞이했단 말인가?


“그래서 그럴 일 없다고 얘기했어요.”

“그런가. 그래서 라울 녀석의 표정이 그 모양이었군.”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칼리드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은 내겐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 그렇게 숨길 필요는 없어.”

“……그래도 좋지 않은 말을 들을 필요는 없죠.”

“고맙군. 그리 나를 생각해주다니.”

칼리드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한 것에 비해 별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위해 굳이 입을 다무는 벨리아를 보고 있으려니 어째 기분이 조금 좋아지려 한다.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녀석과 난 사이가 좋지 않지.”

뜬금없는 소리에 벨리아가 그를 바라보자 칼리드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곤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을 이어갔다.


“황위를 두고 싸워야 하는 사이이니 당연히 사이가 좋을 순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어렸을 때까진 무척 사이가 좋았었어.”

“그런가요?”

“그게 라울 녀석이 내게 베푸는 동정심이라는 걸 알기 전까진. 난 진심으로 그 녀석을 형이라 따랐거든.”

그렇게 말을 하는 칼리드의 표정은 덤덤했다.

무뎌지고 무뎌져서 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따라 제국으로 간다면 그대도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내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황자인지.”

“……전하.”

“그러니 라울이 그대가 날 선택한 것을 비웃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벨리아는 그가 자조하듯 말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와 결혼한다면 분명 제가 당신의 힘이 될 거예요.”

“하하하. 로니카의 공주라면 그런 이야길 꺼낼 만하지.”

웃으며 이야기를 흘려넘기려는 칼리드를 향해 벨리아가 조금은 딱딱하게 말을 꺼냈다.


“게다가 전하께서도 1황자 전하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가만히 있겠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보이나?”

“그게 아니라면 제 제안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죠. 금광 따위, 그가 발견하든 못하든 아무 상관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편지를 보고 자신을 찾아온 순간.

분명하게도 그가 라울을 무너뜨릴 어떤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제가 제안한 결혼하자는 허무맹랑한 말에도 그저 조건이 좋다는 소리나 하면서 수락했겠고요.”

그것은 제국의 1황자에게 로니카 왕국을 얹어주지 않기 위한 그의 수 싸움이었을 것이다.

겸사겸사 자신이 로니카 왕국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테니, 그에겐 굴러들어온 복이나 다름없었을 것이고. 게다가 현재의 로니카 왕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벨리아를 보며 자신도 욕심나는 상대라고 한 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벨리아는 그에게 훨씬 이득인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경고하는 모습을 좋게 평가했었다.


“……확실히 그대는 감이 좋아.”

칼리드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머리도 좋고. 상황 판단도 빠르지.”

“칭찬은 고마워요.”

“그래서 더 의심스러워.”

하지만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는 어깨를 으쓱인다.

심각한 말과는 달리 어조는 가벼웠다.


“솔직히 의아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칼리드를 바라보던 벨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벨리아는 그를 앞세워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 정보의 출처를 요구하며 그가 자신을 의심하기라도 한다면. 분명 작은 의심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게 뻔했다.

그렇기에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저와 함께하다 보면 지금처럼 의심스러운 순간이 많을 거예요.”

벨리아가 잠시 말을 골랐다.

칼리드는 그녀의 뒷말을 기다린다는 듯 눈썹을 까닥 올렸다.


“그때마다 그저 믿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금광 말인가?”

“아뇨. 제가 전하께 드리는 모든 정보를.”

그녀의 시선이 단단하게 그를 향했다.

그에게 회귀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 얘기를 힘겹게 꺼낸다고 해도, 그는 분명 믿지 않을 테니까.

그때, 마주친 시선 속에서 칼리드가 피식 웃어버리곤 말했다.


“그대는 내게 과한 것을 요구하고 있어. 알고 있나?”

“……함께 협력할 사이에서 믿어달라는 말이 그리 과한 소리인가요?”

어쨌건 조력자가 되기로 하지 않았나.

거기다 약혼과 결혼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할 사이였다.

그런 벨리아의 뚱한 감정을 읽어낸 칼리드가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 어떤 것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주제에, 내게는 그대를 온전히 믿으라고 하지.”

“그건…….”

칼리드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얼버무리는 벨리아의 모습이 또 거슬렸다.

그녀가 제게 어떤 사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건 칼리드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 곁에 머물겠다 하는 것임도.

그렇다면 서로 이득만 취하면 되는 일인데. 어째서.


‘신경 쓰여.’

그래서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왜 유독, 그녀에게만은 이렇게 관대하고 너그러워지는지.

그저 재미있기만 했던 공주가 어째서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는지.

칼리드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공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벨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내게 많은 것을 숨기고 있지만, 난 그대를 믿어 볼까 해.”

그러고는 손을 뻗어 벨리아의 어깨에 걸쳐진 옷을 잘 여며주었다.

고작 한걸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옆에서 앞으로 옮겨온 단 한걸음으로 주변에 흐르는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더없이 가볍고 경쾌했던 공기의 밀도가 무겁고 답답해졌다.


“……칼리드 전하.”

이상했다.

여러 번 불렀던 이름인데.

방금 입 밖으로 나온 그의 이름은 마치 의지를 가진 글자처럼 벨리아의 입안을 맴돌며 굴러다녔다.


“벨리아.”

이번에는 그가 더없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른다.

이곳의 오묘한 분위기에 취해서일까.

급격하게 바뀌어버린 공기에 적응하지 못해서일까.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것도,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는 것도.

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심장이 쿵, 쿵. 소리를 내며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그대를 온전히 믿는다면, 언젠가 그대도 진실을 말해주겠지.”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제 옷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가진 게 별로 없지. 그렇기에 더더욱 내 사람이나 내 것은 놔주지 않아. 몇 안 되는 것마저 빼앗길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 그대가 진실을 감추더라도.”

칼리드가 흐트러진 벨리아의 머리카락을 아주 천천히 귀로 넘겨주었다.


“한번 내 사람이 된 그대가 자신을 믿어달라 했으니, 난 그대를 믿을 거야.”

물론 확인은 하겠지만.


“그러니 나를 배신하지만 마. 그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니까.”

한껏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것과는 다르게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그의 간질거리는 시선이 자꾸만 그녀를 흔들었다.

벨리아가 호흡조차 멈춘 채, 떨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전하…….”

그녀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어내려던 찰나.

칼리드가 벨리아의 입술에 제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섰다.


 


“그러면 나는 최선을 다해 그대가 라울 대신 나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어. 어때?”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도 점점 은근해졌다.


‘정신 차려, 벨리아.’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푸른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본 순간 벨리아는 직감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그에게 완벽히 휘말리리라는 것을.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벨리아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칼리드를 밀어냈다.


“전하께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의 계약은 훨씬 단단해지겠군요. 다행이에요.”

벨리아는 자신들이 그저 계약관계임을 상기시켰다.

더는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이건 그저 불필요한 감정일 뿐이다.


“하…….”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던 칼리드는 더는 다가오지 말라며 칼같이 끊어내는 벨리아에게 어쩐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동등하게 계약을 맺었으니 서로 노력하는 건 당연하겠지요. 전하께서 절 믿어주신다면, 전 전하를 배신하지 않을게요. 이러면 조금 신뢰가 생겼을까요?”

태연하게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서운했다.

칼리드는 벨리아에게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거슬린다는 말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온 신경이 그녀를 향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칼리드는 그녀가 완전하게 제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소유욕이 스멀대며 칼리드를 잠식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혀 보려 괜한 소리를 꺼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대에게 진심이 된다면?”

“……그저 호기심이라는 거 알아요.”

그의 말에 벨리아가 움찔 굳었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칼리드도 그런 벨리아의 모습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첫 번째 목적만 생각하죠. 우선 금광의 존재가 확실해지고, 제가 라울 황자와 약혼하지 않는 것. 다른 건 그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단호하게 말을 마친 후 슬쩍 칼리드를 바라보자 그는 어쩐지 조금 허탈한 표정이었다.


“아셨죠?”

다시 한번 벨리아가 칼리드의 확답을 요구했다. 그러자 칼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래.”

마지못해 떨어진 그의 대답에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애써 웃던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칼리드는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요.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어요.”

벨리아는 제 어깨를 감싸고 있던 칼리드의 옷을 벗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옷은 고마웠어요.”

그러고는 미련 한 점 남지 않았다는 듯 연회장으로 통하는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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