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11/88)
11.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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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2022.12.06.
‘저런 소릴 잘도 하는군.’
칼리드는 벨리아가 꺼낸 말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저 말 또한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겠다고?”
그 말 한마디에 더없이 흔들렸다는 사실이었다.
“네. 절 도와주신다면, 전 전하의 완벽한 아군이 되어드릴게요.”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순간이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 너무나도 다디달아서 칼리드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습군.’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곁에 있어 주겠다는 그 말을 얼마나 바라왔었는지.
이미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린 날의 하찮고 나약했던 소망이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 있음이 우스웠다.
물론 그녀가 칼리드가 바랐던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라울이 왜 싫지?”
칼리드가 물었다.
“고작 그 정도로는 제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을 거예요.”
벨리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칼리드는 궁금증이 일었다.
“라울과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 않나.”
편지를 보낸 기간을 따지고 보면, 라울과 벨리아는 고작 한 달을 만났을 뿐이었다.
그런 짧은 기간에 청혼하는 미친놈도 있었지만, 이토록이나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그에겐 무척이나 신기했다.
분명 그 라울이라면 벨리아에게 무척이나 지극정성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갖고자 하는 것에는 언제나 아낌없는 노력을 쏟아부었으니까.
“저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답니다.”
벨리아는 말을 아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그보다 저흰 이제 한배를 탔어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키스까지 해놓고 없던 일로 하시진 않으시겠죠?”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약혼이라도 해주신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전하께서도 부담스러우실 테니…….”
“이미 그러기로 결정한 것 아닌가? 그러니 언제가 되든 상관없겠지.”
“그런가요.”
여상한 칼리드의 표정에 벨리아는 다행이라는 듯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좀 우습기는 한데…….”
벨리아가 조금 뜸을 들였다.
“저와 약혼한다면 정말로 무를 수 없을 거예요. 혹시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것 없다고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나?”
칼리드는 벨리아를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느릿한 시선이 벨리아의 이마를 지나서 눈, 코, 그리고 입술에 닿았다.
“난 이미 결정한 일을 번복하지 않아. 게다가…… 공주를 보고 있으면 무척 재밌거든.”
그 집요한 시선에 살짝 뺨이 상기된 벨리아가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진정한 연인이 생기면 말씀해 주세요. 제 목표를 이루고 나면 깔끔하게 물러나 드릴 테니까.”
“……내 곁에 계속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칼리드가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에 들어온 무언가가 스스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 사실이 더없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제가 옆에서 가짜 연인으로 앉아 있을 순 없잖아요.”
평온한 벨리아의 대답에 칼리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약 내게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그대는?”
그럼 그대는 어떻게 할 거지? 그때도 내 곁에 있어 줄 건가?
이런 속마음을 숨긴 채 칼리드가 벨리아의 대답을 재촉하듯 눈을 맞췄다.
“저는 뭐……. 원하는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그 이후엔 제가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칼리드는 벨리아의 대답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저 아무렇지 않은 태도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내가 그 정도로 못된 사람은 아니야. 공주와 약혼을 하건 결혼을 하건, 한번 그러기로 했으면 신의는 지켜야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으면서 괜히 울컥 솟아나는 반발심에 칼리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칼리드는 애초에 쥐고 있는 게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떤 것이든 라울을 지나 그에게까지 오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겨우 갖게 된 자신의 것들에 대해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거슬려.’
칼리드가 벨리아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벨리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원하는 것을 완전히 움켜쥐었다는 생각에 표정이 밝아진다.
“금광을 발견한다면, 그때부터 곧바로 약혼을 준비하면 되겠네요.”
자신의 약혼을 마치 좌판 위에 놓인 물건 취급하는 벨리아를 바라보며 칼리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지. 그사이에 나는 라울 녀석이 청혼을 철회할 수 있도록 조금 깽판을 쳐볼 생각이야.”
칼리드는 조금 속된 말로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대와 내 모습을 오늘처럼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라울은 그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놓아줄 녀석이 아니야.”
벨리아가 알고 있는 라울 또한 그러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자였다. 그리고 벨리아는 가진 게 많았고.
고작 그런 모습을 봤다고 청혼을 철회할 만큼 라울이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다.
그녀의 뒤에 걸린 조건들이 그의 분노를 억누르고 억지로 미소 짓게 할 것이다.
라울은 그 누구보다도 손익계산이 빠른 남자였으니까.
“혹시 생각해둔 방법이 있나요?”
“내가 그대에게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는 건 어떤가?”
그의 말에 벨리아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1황자의 청혼이 철회되지 않은 상황에서 2황자가 제게 청혼서를 보내온다면, 분명 잉고트 제국과 로니카 왕국, 양국에서 엄청난 화제가 될 것이다.
제국의 황자들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청혼하는 건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 상황에선 황제도 그녀에게 1황자의 청혼을 받으라 강요할 수도 없어지겠지.
벨리아가 톡톡 책상을 두드리다 씨익, 미소를 지으며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주도권이 제게 생기겠군요.”
청혼서를 보내온 이들 중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벨리아가 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청혼서. 받아올 수 있겠어요? 쉽게 내어주진 않을 텐데요.”
“쉽진 않겠지. 하지만 황후 폐하를 통한다면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전에.”
칼리드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벨리아의 손을 슬쩍 붙잡으며 짓궂게 미소 지었다.
“우리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는 있겠지.”
그래야 황제를 설득할 명분이 생긴다.
그저 1황자가 청혼한 여자에게 2황자도 무작정 청혼하는 게 아니라 서로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그녀를 빼앗길 수 없었다는, 사교계에서 오르내리기도 딱 좋은 로맨스 서사까지 곁들일 수 있고.
“나쁘지 않네요.”
벨리아는 벌써부터 그 소문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게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 깽판, 저도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잘 부탁드려요.”
그들은 이 일로 곤란해질 누군가를 동시에 떠올리며 시선을 마주친 채 싱긋 웃었다.
* * *
며칠 뒤 열릴 파티를 준비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헤럴드의 호출에 벨리아가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또 라울 황자가 청혼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한 걸까 싶어 집무실로 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초조했다.
“어서 와라. 벨리아.”
“오라버니. 라울 황자가 또 청혼에 대한 답을 달라고 뭐라 말을 하던가요?”
벨리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하하. 그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그저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렀다.”
잠시 말을 멈춘 헤럴드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벨리아. 아바마마께 칼리드 황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했다던데.”
아. 그건가.
이전 2황자의 환영식에서 보였던 행동에 대해 해명해 보라며 왕의 집무실로 불려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은 라울이 아닌 칼리드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게 헤럴드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어요.”
“……네가 꾸민 짓이니?”
헤럴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벨리아가 라울 황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얘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2황자인 칼리드 황자와의 결혼을 언급한 것이 수상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라울 황자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 칼리드 황자를 이용하는 거냐고 물은 거다.”
정확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헤럴드는 이런 질문을 하면서도 사실 긴가민가했다.
그가 아는 제 동생은 요령이 좋지 않은 데다가 우직하고 조금은 고지식한 편이라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바마마께 그 얘긴 듣지 못하셨나요? 저 칼리드 황자를 좋아해요, 오라버니.”
“벨리아…….”
“진심이에요. 그와 결혼하고 싶어요. 그러니 라울 황자는 싫어요.”
고집을 부리는 벨리아의 모습에 헤럴드는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솔직하게 물어보마.”
헤럴드의 심정이 무척 복잡했다.
차라리 클로제라면 몰라도, 벨리아가 이런 사고를 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울 황자에게 마음이 있었으면서 왜 그리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었어. 게다가 칼리드 황자는 언제 만났었고. 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벨리아.”
“……설명해도 오라버니는 이해 못 하실 거예요.”
과거의 벨리아가 라울을 선택해서 벌어졌던 그 모든 일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를 사랑해서 그를 선택하고 그의 아내가 되어 제국의 황후가 되었을 때, 로니카 왕국이 어떻게 무너졌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어떻게 죽었으며, 클로제와 오라버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그 최후에는 벨리아 본인마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고.
벨리아는 그 모든 말을 입안으로 꾹꾹 눌러 삼켰다.
이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지면서도 문득 그때를 생각하면 분노를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왈칵 올라왔다.
‘그런 모든 일을 겪고 과거로 돌아왔다고 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감정은 갈무리한 채 변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제 철없는 변덕이라 생각해주세요, 오라버니.”
벨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헤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행동이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하니 솔직히 조금 걱정스럽단다.”
“오라버니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벨리아의 행동이 변했다.
‘아마도 펑펑 울던 그날부터였지.’
헤럴드는 제 동생이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벨리아는 조금 냉소적인 구석이 있어서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도 남들보다 조금 느린 편이었다.
그런 제 동생이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공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벨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1황자에게 호감이 있어 보였는데.’
어떻게 그렇게나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었는지.
감정을 깨닫는데 느린 편이라 한번 마음 준 이에겐 돌아서는 것도 쉽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벨리아가 대체 1황자를 왜 그리 미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건 헤럴드도 제 동생이 그토록 싫어하는 자와 결혼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나도 계속 제국과 마찰 없이 청혼을 거절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이리 갑작스럽게 2황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구나.”
아…….
오라버니께서도.
벨리아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에 조금 놀라 헤럴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널 믿는다. 네가 괜한 짓을 할 아이가 아님을 알아. 아무튼. 나도 방법을 더 찾아볼 테니, 그리 갑작스러운 행동만 자제해주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장난스럽게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하는 헤럴드의 모습에 벨리아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벨리아가 헤럴드를 따스하게 마주 보았다.
언젠가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면.
그때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벨리아의 미소가 어딘가 조금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