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당신의 것을 되찾아 드릴게요.
(10/88)
10. 당신의 것을 되찾아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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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당신의 것을 되찾아 드릴게요.
2022.12.03.
왕성을 둘러본 후, 벨리아는 칼리드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헤럴드가 도끼눈을 뜨고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무언의 반대를 던졌지만, 벨리아는 제 오라버니의 시선을 무시하곤 그를 방으로 들였다.
소문 따위 나라지 뭐. 어차피 지금 퍼져 있는 소문에 몇 가지 더해지는 게 뭐 어떻다고.
“꽤 당돌한 짓을 하더군?”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까의 애틋한 연인의 행색은 순식간에 지워버린 칼리드가 비어 있는 의자에 가서 털썩 앉으며 물었다.
벨리아도 지지 않겠다는 듯 그의 앞에 마주 앉으며 싱긋 웃었다.
“전하께서 기대하신 만큼 보여드린 거죠.”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평범한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신을 환영하는 그 자리에서 대놓고 입맞춤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역시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괜히 조금 괴롭혀볼까 싶어진 칼리드가 양손을 깍지 끼며 테이블에 올리곤 씨익 입꼬리를 당겼다.
“그보다 자꾸 공주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데.”
벨리아는 무슨 소리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칼리드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머. 그런 말에 상처받으실 분인 줄은 몰랐는데요.”
“뭔가 오해하고 있군. 상처를 받은 게 아니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야.”
농담이 분명한 어조였다.
벨리아는 그 말을 맞받아치기보다는 본격적인 계획을 이야기하는 쪽을 택했다.
“농담은 그만둬요. 그럴 시간 없으니까.”
그럴 시간이 없다니.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이건 그가 입버릇처럼 자주 꺼내는 말이 아니던가.
“……흠.”
재미없군. 하며 칼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선 금광의 위치부터 알려드릴게요. 생각해보니 제가 전하께 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니.”
“……그대가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벨리아가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나는 고작 금광의 위치를 듣겠다고 그 제안을 수락한 게 아니야, 공주.”
그간 봐왔던 여자들은 모두 라울의 침대에 뛰어들지 못해서 안달 난 여자들뿐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청혼을 받은 여자가 그것을 거절하기 위해 다른 이도 아닌 하필 자신을 선택하다니.
그 사실이 흥미로워 칼리드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뭐, 겸사겸사 얻어낼 이득이 많기도 했지만.
“라울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봐. 왜 그 녀석의 청혼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무려 제국의 1황자였다.
그것도 황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아들.
당연히 차기 황제의 자리는 라울일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대다수였다.
라울은 황비의 아들이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는 황비를 등에 업고 모든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에 비해 칼리드는 황후의 아들로 그 누구보다도 정통성을 갖고 있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라울에게 빼앗겼다.
그런데도 라울은 칼리드가 자신보다 정통성이 짙다는 점을 질투했고 한없이 경계했다.
“사람이 싫은데도 이유가 필요한가요?”
“잉고트 제국의 1황자와 혼인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알 텐데?”
“그걸 알고 있으니 그의 청혼을 거절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이런 일까지 하는 거죠.”
“이런 일이라면?”
“제가 직접 전하께 청혼했잖아요?”
벨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아 있는 칼리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아주 느릿한 손길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분히 유혹적인 손길이었다.
“정 궁금하시다면, 오늘 깊은 대화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공주. 지난번부터 생각했지만, 언행을 조심해야겠어. 내가 별로 무섭지 않나 봐?”
“무서울 게 있나요. 이미 제 편이 되기로 하셨는데. 그러니 그렇게 여기저기 소문을 내신 것 아니었나요?”
“큭.”
역시나.
험한 세상 따위는 하나도 모를 것처럼 순진하게 생긴 이 공주님은 자꾸만 칼리드의 흥미를 끌어냈다.
칼리드의 평소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벨리아 공주의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랄 게 분명했다.
목숨이 두 개도 아닐 텐데 어쩜 이리도 겁이 없는지.
“그리고 자신의 연인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던가요?”
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칼리드의 어깨에 올린 손을 아래로 내리며 자연스럽게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칼리드를 안기 위해선 허리를 조금 숙여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 이젠 제 말을 잘 들어 주세요.”
벨리아가 말을 마치며 칼리드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는 아주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런 벨리아를 바라보던 칼리드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소리 내 웃었다.
역시 재밌는 여자였다.
“하하하. 약속한 건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
날카롭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웃으니 묘하게 인상이 순해지는 것 같아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벨리아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저희의 계약 연애의 첫 번째 조건은 제가 금광의 위치를 알려드리는 대신, 전하께서 라울 황자의 청혼이 무산되게 만드는 거예요.”
벨리아는 미리 가져다 놓은 지도를 펼쳤다. 그러고는 로니카 왕국의 동쪽에서 뻗어 나오는 산맥을 가리켰다. 잉고트 제국과도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현재 조사단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그에 칼리드가 의문스럽다는 시선을 던지자 벨리아는 가는 손가락을 뻗어 천천히 남쪽으로 쭉 이어 내려갔다.
남쪽의 사막과 가까우면서도 산맥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
“여기.”
망설임은 없었다.
“흐음?”
칼리드가 무어라 입을 떼려는데 벨리아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곳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
이번엔 그 근처의 강줄기를 짚어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라 벨리아가 가리킨 곳에 강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금광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제가 첫 번째로 가리킨 이곳이 금광이에요. 이 부근에서 지하를 조사하면 분명 금광석이 발견될 거예요.”
“그럼 다른 곳은?”
“여긴 강이에요. 사금이 나올 아주 귀중한 곳이고요.”
“사금이라……. 광산 옆이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군.”
칼리드가 턱을 매만지며 지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벨리아는 확신에 차서 지도에 위치를 말해주었다. 과연 저 말이 실제로 정답일까?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확실해요.”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이 보이자 벨리아가 서둘러 말을 얹었다.
“지금 라울 황자를 비롯한 조사단은 모두 여기 이 부근, 그러니까 제국과 가까운 이 동쪽 산맥을 탐색하고 있죠.”
마도구를 사용해 광산이 있다고 신호가 들려온 곳이 그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그쪽이 아니다.
“이번에 함께 온 인원 중에서 금광을 수색할 자들이 포함된 걸 봤어요.”
“눈썰미가 좋군.”
자신이 괜히 라울 곁에서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겠나.
책으로 쌓인 풍부한 지식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판단력.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벨리아의 선택은 라울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러니 그녀를 황후까지 만들어 올렸던 거였다.
에르제라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정인이 있음에도 벨리아를 곧바로 버릴 수가 없었을 만큼, 그녀는 그에게 많은 쓸모가 있었다.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서 조사를 명하세요.”
벨리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칼리드는 그녀가 하는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조사를 지시할 생각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 황자는 저에게 계속 약혼을 강요하고 있어요. 많이 초조해 보이더군요. 전하께서 왕성에 방문하기로 한 이후엔 더 심해졌죠.”
“그럴 만도 하지. 제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할 테니까.”
벨리아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가 빼앗길 만큼 뭔가를 가지고 있던가요?”
솔직히 말하면 그건 전부 칼리드 황자가 누려야 할 것들이 아닌가.
이전에야 자신이 라울의 연인이었으니 라울의 편을 들었지만, 황비의 가문이 한미한 편이라 원래라면 절대로 라울이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황제가 황비를 너무 사랑했고, 황후에 대해서는 조금의 감정도 없었다.
그 극단적인 감정의 온도 차이로 라울 황자와 칼리드 황자의 운명이 갈렸다.
“애초에 적통 황자는 당신인데.”
하필 라울이 더 먼저 태어날 건 뭐람. 그게 아니었다면 칼리드가 핏줄의 정통성으로라도 찍어누를 수 있었을 텐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라울에게 온전히 마음을 다 주었을 때는 그 점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그게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되었다.
“전 당신이 잃은 것들을 찾아줄 생각이에요.”
“벨리아 공주.”
“그게 제 최종 목적과도 닿아 있어요. 그러니 제가 당신을 배신할 일은 없어요.”
단호한 그 말에 칼리드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라울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는 거지?
칼리드도 라울을 좋아하진 않았다. 자신의 형제이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매사에 비교를 당하며 자랐다.
칼리드가 잘하는 것은 황자로서 당연하고 라울이 잘하는 건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황제와 칼리드, 라울이 함께 있으면 마치 칼리드 자신만 외부인이 된 기분이 들곤 했었다.
‘나도 당신의 아들이야.’
하지만 황제의 시선과 웃음은 라울에게만 향했다. 제 아들은 라울뿐이라는 듯이.
황제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바라보며 그 뒤를 조용히 숨죽여 따라가야 했다.
황제는 늘 황비와 시간을 보냈고, 황궁의 정원에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맑고 높은 소리를 들으며 황후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늘 비참함만 남았던 나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황후가 제 아들인 칼리드를 붙잡고 말했다.
“아가. 너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
“어마마마.”
“네가 황제가 되어야 해. 황후는 나고 그년은 고작해야 운 좋은 귀족 계집일 뿐이다. 황실의 정통성은 네가 갖고 있어.”
“……아바마마는 절 싫어하세요.”
황후는 어린 칼리드의 어깨를 억센 손길로 붙잡았다.
그녀의 눈빛이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이 어미는 제국의 공신이자 서부 귀족 연합의 수장인 테사 공작의 딸이다. 그리고 제국의 하나뿐인 황후이기도 해.”
“……아파요, 어마마마.”
“난 절대로 그년에게 그것만은 양보하지 못해.”
어린 칼리드가 고통을 참으며 제 어미를 애타게 불렀지만, 황후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황제의 자리는 너의 것이다. 알겠니?”
마치 세뇌라도 하듯 황후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 나는 죽지 않을 것이야. 내가 이 자리를 버티고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내가 죽는다면 그년이 황후가 될 텐데. 그럼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정통성마저 라울에게 빼앗기겠지. 그 꼴은 절대로 내가 용납할 수가 없어.”
하지만 칼리드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 부모가 온전히 자신을 사랑해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소원이었다.
“내 아가, 네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
어린 칼리드는 광기에 물들어 있는 어미의 품에서 그저 눈을 꽉 감았다.
“칼리드 전하.”
긴 상념에 빠져 있던 칼리드가 벨리아의 목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제가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울 거예요.”
“……그건 내가 그대의 목적을 이룰 사냥개가 되는 것에 대한 조건인가?”
사냥개라.
황자인 그가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로는 부적절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처럼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
벨리아는 상념을 지우고 피식 웃어버리는 칼리드를 보며 눈을 사르르 접고 웃었다.
“그리해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이겠지요? 후후.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당신은 황제가 되고, 나는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 하며 빛났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의 곁에 있어 드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