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뜨거운 환영식 (9/88)


#9. 뜨거운 환영식
2022.11.29.


로니카 왕성은 대체로 고요한 편이었다.

물론 한 나라의 왕성답게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하는 자들도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긴 했지만, 역동적이라기보단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분위기였다.

그런 왕성이 오랜만에 무척 시끄러웠다.

잔뜩 들뜬 그 생소한 분위기에 벨리아가 주변을 한번 스윽 둘러보았다.

계단에 서 있는 벨리아의 근처에는 국왕을 비롯한 왕족부터, 재상과 귀족원의 원로들까지 모두가 밖에 나와서 모여 있었다.


“기분은 좀 어떠니?”

그때 곁에 서 있던 헤럴드가 벨리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라버니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유를 빤히 알고 있었지만, 벨리아는 전혀 모르는 척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무척 좋아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벨리아의 대답에 헤럴드가 어색하게 웃는다.

누가 보아도 뭔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기라도 하지. 하여튼 오라버니도 정말…….’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과할 정도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과 옆에서 헤럴드가 곁눈질로 계속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이유는.


“와아아아!”

“로니카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꺄아! 칼리드 전하!”

바로 제국의 2황자이자, 최근 벨리아와 모종의 관계라고 소문이 난 칼리드가 정식으로 왕성을 방문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가 도착했는지 정문에 가까운 곳에서부터 환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성을 방문했던 그날 이후 칼리드는 로니카 왕국에 정식으로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이미 국왕과 이야기가 끝난 사안이었지만, 표면상의 행동이 중요한 때였다.

1황자인 라울은 이미 로니카에 도착해 제국과 왕국의 합동 조사단을 이끌고 있었으며, 이번엔 2황자인 칼리드 황자가 왕성을 방문한다.

제국의 두 명의 황자가 같은 시기에 한 나라를 동시에 방문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타국에서도 무척 관심 있게 지켜볼 게 뻔했다.


“2황자에게 괜히 퉁명스럽게 대하지 마시고요.”

“……흠.”

2황자를 챙기는 듯한 벨리아의 당부에 헤럴드는 뚱한 태도로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내 동생과 몰래 만나다니……!

화르륵 불길이 인 헤럴드의 눈에는 칼리드가 도둑놈이나 다름없었다.


‘아니야. 소문이 사실이라고는 하지 않았어.’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킨 헤럴드가 정문을 향해 시선을 던지자, 이 일의 원흉인 2황자가 자신의 기사단과 수행원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모습이 왕성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벨리아의 표정과 행동을 살폈다.

과연 소문대로 그들이 연인 사이일 것인지 궁금해서 죽겠다는 얼굴들이었다.


“뭐……. 생긴 건 반반하구나.”

헤럴드가 괜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에 벨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동생과 염문이 퍼진 남자라 그런지 괜히 반발심부터 드는 모양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더 잘생겼어요.”

장난기가 가득한 동생의 말에 헤럴드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소문이 진짜라는 거냐는 무언의 물음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벨리아는 그 물음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조금 뒤면 그와 자신의 관계가 모두에게 공개될 테니까.

후후,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린 벨리아는 헤럴드의 뒤편으로 슬쩍 보이는 라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으나 그것이 가식적으로 꾸며낸 얼굴임을 알고 있었다.

미묘하게 비뚤어진 입꼬리와 자주 만지작거리는 엄지와 검지.

무언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나타나는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 진심은 무슨……!’

그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며칠 전 라울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빠득, 하는 소리와 함께 벨리아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에 비하면 훨씬 낫죠.”

누구를 지칭하진 않았으나, 헤럴드는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읊조렸다.


“뭐, 그래도 1황자보다는 덜 뺀질거릴 것 같구나.”

“풉!”

이번엔 옆에 있던 클로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클로제…….”

“아. 미안, 언니.”

클로제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사과를 하고 곧바로 다시 표정 관리를 했다.

칼리드가 성의 입구까지 다다르자 로니카 왕국의 왕과 왕비가 가장 앞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러고는 환영의 인사말을 건넸다.

칼리드는 벨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싸늘한 표정이 아닌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왕과 왕비의 환영에 감사를 표했다.


“언니. 내 말이 맞는 것 같아.”

“뭐가?”

“2황자야. 알았지?”

클로제가 벨리아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지만, 곧바로 이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 벨리아가 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애써 가장한 고고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언니와 저만의 비밀이랍니다. 그러니 묻지 말아요, 오라버니.”

“또 나만 따돌리고 너희끼리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거지?”

“오라버니에게 이야기하면 아바마마 귀에 전부 들어가서 안 돼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클로제가 고개를 흥, 하고 돌렸다. 그러자 헤럴드는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벨리아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무해.”

헤럴드는 어쩐지 조금 외로워졌다.

왕과 칼리드가 서로 주고받는 인사말이 전부 끝났다.

이후 칼리드에게 왕자와 공주들을 소개하려 왕이 슬쩍 몸을 틀자 칼리드와 벨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칼리드가 즐겁다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과연 어떤 환영 인사를 준비했을지 기대된다는 웃음이었다.


‘후우.’

벨리아는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해 보았다.

미친 짓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큭…….”

긴장한 듯 굳어버린 벨리아의 모습을 발견한 칼리드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헤럴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헤럴드는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칼리드의 표정은 그와 대비되듯 무척 밝았다.

이윽고 왕이 칼리드에게 로니카 왕국의 공주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쪽부터 벨리아, 클로제일세. 모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지.”

“예. 정말 그렇군요.”

못 살아, 정말.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그의 대답에 벨리아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안녕하세요. 클로제 로니카입니다.”

“클로제 공주. 반갑습니다. 칼리드 잉고트입니다.”

“네! 저도 정말! 반가워요!”

벨리아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동안 그와 인사를 나누던 클로제가 누구보다도 환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1황자보다야 2황자가 더 나아 보이기도 했고.

제 언니도 그와의 관계를 인정했다.

이럴 땐 자신이라도 나서서 언니의 편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한 클로제는 눈을 찡긋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언니 잘 부탁드려요.”

너무나도 귀여운 그 말에 칼리드도 아주 작은 소리로 화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고는 뭐가 좋은지 둘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잠시 후 칼리드가 벨리아의 앞에 섰다.


“벨리아.”

아주 달콤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준비한 게 있으면 해보라는 투였다.


“세상에 그대의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처럼 맞이해 주길 바라.”

그가 남겼던 말이 귓가에서 윙윙 맴돌았다.

아무런 인사도, 행동도 하지 않는 벨리아를 다들 의아하게 생각할 때 즈음.

벨리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늦었어.’

모든 건 자신이 시작한 일이다.

어차피 한 배를 탄 사이이지 않나.

부끄러워하며 뺄 필요는 없다.

잠시 후, 그녀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었을 때는 조금 전과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이것 봐라?’

그녀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칼리드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칼리드.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아가 팔을 쭉 뻗은 채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곤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주변이 환해지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세상에 오롯이 자신만 보이는 것처럼 대해달라고 했었나?’

못 할 것도 없지.

라울이 제게 한 청혼을 철회하게 만들기 위해선, 2황자와 자신의 관계를 소문내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모두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큰 사건이 필요했다. 도저히 청혼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사건이.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누군가가 지금 벨리아의 속을 들여다봤다면 최선을 다해 뜯어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속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그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어머!”

“벨리아!!”

“어이쿠!”

  

 
벨리아가 까치발을 들고 양손을 칼리드의 목에 감았다. 그러곤 장난스럽게 그와 시선을 맞추더니 곧바로 입을 맞춰버렸다.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지만, 칼리드의 반응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맞닿은 그의 몸이 굳어버린 게 느껴졌다. 항상 여유로운 태도가 괜히 마음에 안 들었는데, 어쩐지 속이 시원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에게 입을 맞추던 벨리아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원하는 모습이었을까요? 칼리드 황자 전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벨리아를 칼리드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읍!”

칼리드가 벨리아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시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맙소사…….”

헤럴드의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벨리아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칼리드의 입맞춤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겠지?

비록 이곳이 칼리드 황자의 방문을 환영하는 자리이고, 로니카 왕국의 왕성 앞이었지만.


‘라울도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겠지?’

그걸 생각하니 조금 즐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 남자, 도저히 '적당히'를 모른다.

벨리아는 칼리드의 목을 감았던 손을 내려 그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정말!’

하지만 칼리드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믄(그만)…….”

벨리아가 이번엔 소리를 내서 작게 경고했다.

그제야 칼리드가 벨리아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아주 다정한 표정으로 벨리아를 품 안에 꼭 껴안았다.


“환영 인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군.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부탁하지.”

칼리드가 아주 작은 소리로 벨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벨리아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질 수는 없었다. 여기서 기선제압을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이 제멋대로의 남자를 휘두를 수 없을 테니까.


“그보다, 키스를 잘하는 편은 아니네요?”

칼리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다음엔 더 잘 부탁드려요, 전하.”

벨리아의 도발적인 말에 칼리드가 푸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만족스럽지 못했다니. 다음엔 더 노력해보지.”

그렇게 마지막 말을 전한 후 칼리드가 벨리아를 놓아주었다.

그들의 엄청난 만행이 끝나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베, 벨리아……!”

왕과 왕비는 눈이 잔뜩 커다래져 벨리아를 바라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헤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속에서 오로지 클로제만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언니가 언제 저런 대범함이 생겼지?’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은 귀족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늘 조용하고 얌전한 벨리아가 대뜸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도 타국의 황자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저런 대담한 행동을 할 줄이야.

게다가 2황자는 어떤가.

벨리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더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물론 움찔하고 슬쩍 몸이 굳기는 했으나 클로제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클로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사이인 둘을 바라보며, 조만간 언니에게 모든 걸 하나하나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칼리드와 라울을 비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봐도 1황자보다는 2황자가 나아.’

클로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실제로 2황자를 마주하니 자신의 추론이 아주 타당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안내를 도와 드릴게요.”

“좋지.”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칼리드와 벨리아만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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