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소문 (8/88)


#8. 소문
2022.11.26.


벨리아와의 대화를 마치고 왕성을 빠져나온 칼리드의 곁으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호위기사 아시드가 조용히 다가왔다.


“어떠셨습니까?”

칼리드의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대화가 꽤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아시드는 그들이 대체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황자 전하께선 이야기해 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으음. 글쎄.”

“웃고 계시는 걸 보니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뭐. 당돌하긴 하더군.”

다시 생각해도 벨리아는 너무 겁이 없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뭐…….’

앞으로는 자신의 연인이 될 여자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위험한 행동은 자제하라고 일러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칼리드가 눈을 감았다.


“금광의 위치는 들으셨습니까?”

“아니.”

“그걸 들으러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아시드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 편지의 주인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1황자 측에서 알게 될까 봐, 현재 운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이 편지가 보내진 동선을 역으로 조사했다.

일부러 남겨둔 게 뻔한 그 실링 왁스의 생산지와 편지가 중간에 머물렀던 장소, 편지지에 남아 있는 글자들의 조합을 통해 끝내 발신자가 벨리아 공주임을 알 수 있었다.

발신자를 확신하기까지 칼리드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닦달했던 것을 떠올리자, 아시드는 어쩐지 조금 우울해졌다.

그런 모진 대우를 받으며 알아낸 정보이거늘.


“혹, 공주가 거짓을…….”

“아시드. 괜히 넘겨짚지 마라.”

아시드가 벨리아에 대해 의심스러워하자 칼리드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것보다 조만간 왕성에 정식 방문할 예정이니 준비해.”

결국 그렇게 된 건가.

아시드는 예정된 일정을 대폭 변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문을 좀 내야겠어.”

공주와 연인 사이라는 말을 미리 퍼뜨려둔다면, 자신이 왕성에 방문하기 전까지 라울 녀석이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안달 낼 게 뻔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 누군가를 얻기 위해 절절맬 모습을 생각하니 어째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그건 무조건 실패할 테니까.


‘재밌겠군.’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앞으론 라울 녀석이 공주를 미행하거나, 그녀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건 더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게 티 안 나게 제대로 했어야지. 멍청한 놈.’

하여튼 자기 잘난 맛에만 살고 있으니 하는 짓을 보면 영 허술하다.

나름 머리를 쓰긴 해도 기본적으로 깔린 생각이란 게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본인의 실패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작전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와 비호를 받는 현재 라울의 위치가 그것을 전부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절대적이긴 했지만.


“어떤 소문입니까?”

“벨리아 공주와 내가 사실은 무척 깊은 사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1황자의 청혼을 받아 줄 수 없었고, 지금 굉장히 곤란해하고 있다고.”

아. 거기에 덧붙여.


“오매불망 제 정인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말도 추가하면 좋겠지.”

“……예?”

이왕 서로 손을 잡았으니 제대로 도와주어야지 않겠나.


“사랑하는 내 연인을 위해 할 일이 많군.”

“그게, 무슨……?”

방금 뭐라고……? 사랑? 연인?!

아시드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나 결혼할 것 같다. 참고해 둬.”

“……예에?!”

맥락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아시드가 소리쳤다.

결혼이라니……!


“자, 잠깐! 전하!”

비명과도 가까운 아시드의 외침을 완벽하게 무시한 칼리드가 미소를 지은 채 걸음을 옮겼다.


 

* * *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제국의 2황자 칼리드와 로니카 왕국의 첫 번째 공주 벨리아가 남몰래 은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한낱 가십으로 치부하기엔 그들의 신분이 엄청났기에 여기저기서 다들 그 이야기를 수군거렸다.


“언니!”

결국 소문은 로니카 왕성까지 도달했고, 친구들과의 티파티에서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란 클로제가 벨리아의 방으로 우다다 달려와 소리쳤다.


“내가 방금 헛소문을 좀 들었거든?”

벨리아는 우아하게 앉아 책을 읽다가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상대가 클로제임을 확인하곤 읽던 자리를 표시해둘 책갈피를 가지런히 끼워두고 책을 덮었다.


“클로제. 내가 그렇게 뛰지 말라고 얘기했었지?”

“언니! 지금 그런 얘기 할 때야?!”

클로제는 숨을 헉헉거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언니랑 2황자랑……! 그으! 그!”

“……연애한다고 소문이라도 났니?”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을 더듬는 클로제를 대신해 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거!”

“그게 뭐?”

담담하게 되묻는 제 언니의 모습에 클로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게 뭐냐니?! 지금 귀족들 사이에 소문 다 났대! 제국에도 퍼졌을 거라고!”

“상관없어.”

벨리아의 태도가 이상하리만치 태연했다.


“설마…….”

그러고 보니 1황자의 청혼을 거절할 방법을 찾겠다고 분주했던 제 언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게다가 1황자보다는 2황자가 훨씬 나을 거라고 자신이 한마디 던졌던 기억도 난다.

설마, 아닐 거야…….

클로제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언니가 일부러 소문낸 건 아니지?!”

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낸 소문은 아니야.”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소문을 직접 냈을 리가…….


“그 사람이 냈겠지.”

“아……?”

잠깐!

뭐, 뭐라고?!


“지금 그 소문을 2황자가 냈다고 말하는 거야?”

“응.”

“언니!”

버럭 소리 지르는 클로제의 목소리에 벨리아가 눈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귀 아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아니, 잠깐. 잠깐만……!”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제 동생의 모습을 보며 벨리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 당황할 것 없어. 2황자와 이미 합의된 이야기니까.”

“설마 진짜 2황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지?”

“그거 맞아.”

대수롭지 않게 사실을 정정해준 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걸어갔다.

아직 날이 밝았다.

햇살이 반짝이는 게 어쩐지 개운한 기분이 든다.


‘그는 계약을 이행하려고 하고 있어.’

여기서 라울이 추문이 있는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다고 청혼을 철회한다면 아주 깔끔하고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지금도 귀찮을 정도로 매일 찾아오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칼리드 황자에겐 미안하지만, 자신들이 연인임을 빨리 공개하는 쪽이 나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 알리는 게 좋을까…….’

사실 누군가와의 관계를 이토록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런 행동은 라울이 제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이건 애초에 사랑이 없는 관계다.

그저 서로의 이득이 맞아떨어져서 이루어진 사이.

그렇다면 전과는 다르다.

이전 삶에서의 라울처럼 칼리드 또한 벨리아에게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고 얘기를 해 온다면.


‘그땐 깔끔하게 물러나 주면 돼.’

황족의 이혼은 제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시골 별장에 내려가 죽은 듯이 살아줄 수도 있었다.
라울만 처절하게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에게 자신이 겪었던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돌려줄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언니. 2황자와는 얼마 전까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잖아. 아무리 1황자와 결혼하기 싫다고 해도 갑자기 연인이라니……! 이건 수습하기 어려울 거라고!”

테라스까지 벨리아를 쫓아온 클로제가 황당함에 말을 쏟아내었다.

대체 그 짧은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거란 말인가! 게다가 2황자와는 어떻게 만났고?


“걱정하지 마.”

경악한 클로제의 얼굴과 상반되게 벨리아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결말이 오지 못하도록.

부디 소중한 가족들이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내게 다 생각이 있어.”

새롭게 주어진 삶에선 그 비극을 되풀이하게 만들지 않을 작정이니까.


‘모두에게 속죄하는 거야.’

자신의 선택으로 일어난 불행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문제없다.

그게 비록 벨리아의 삶을 희생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 * *

벨리아와 칼리드에 대한 소문은 이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그러나 여전히 라울은 끊임없이 벨리아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칼리드 대신에 줄 수 있는 것들을 꺼내놓으며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슬쩍 칼리드에 대한 험담을 흘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

대놓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그저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모습처럼 보였겠지만, 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아주 은근한 방법으로 사람을 깎아내리는 라울의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것을.


“그러니 부디 제 청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전하.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벨리아가 지겹다는 듯이 거절의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라울이 웃으며 그 말을 잘라내었다.


“벨리아 공주. 전 인내심이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 그대를 얻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쯤은 감내할 수 있어요. 그러니 더 깊이 고민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칼리드를 마음에 품었다 하셨지요?”

라울은 계속해서 벨리아의 말을 끊었다.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은 애초에 못 하게 하겠다는 듯이.


“그건 녀석에 대해 공주께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벨리아는 마음에 품은 자가 있노라 라울에게 전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이러는 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 뿐이라고.

그저 말을 전했다고 하기엔 어조가 강했으니, 그것은 네 청혼을 거절하겠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하지만 라울은 멈추지 않았다.


“그에 대해선 잘 알아요.”

“아뇨. 그건 공주의 착각이십니다. 고작 한 번 만나본 게 전부이지 않습니까.”

마치 제가 알고 있는 게 전부인 양, 그럴 리 없다 단언하는 그의 모습에 벨리아가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라울 전하. 그는 지금 왕국 수도에 머물고 있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그와 단 한 번만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벨리아의 말에 라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방긋, 웃으며 그녀를 설득하려 애썼다.


“공주께서 칼리드와 알게 된 지 고작해야 한 달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깊다고 이렇게 속단하십니까.”

그러는 라울도 벨리아를 만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자신은 예외라는 듯이 말하는 게 우스웠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이상하네요. 사실 전하께서도 저를 본 지 얼마 안 되셨잖아요.”

이렇게까지 그를 밀어내면 조금이라도 표정에 변화가 있을 법도 한데, 그는 전혀 타격이 없어 보였다. 라울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면서 여전히 다정하게 말했다.


“전 진심으로 그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점점 커지고 있고요. 공주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접니다.”

거짓말……!

과거의 벨리아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실이 분하고 화가 났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얼마나 우스웠을까!


 
벨리아는 자꾸만 밖으로 뿜어져 나오려는 깊은 분노를 갈무리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라울이 호소력 있게 계속 그녀를 설득했지만, 벨리아는 단호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만 티타임을 끝내겠다는 말과 함께 전혀 말귀를 못 알아먹는 라울을 향해 강력한 의사를 전했다.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 같군요.”

그 어떤 달콤한 사탕발림에도.

널 선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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